릴로

사무치도록 고요한 수술방의 모니터에는 바이탈 사인이 규칙적인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 기형적인 불법 임상시험 신약에 오염되었던 마지막 환자의 동방결절(Sinuatrial node)이 비로소 제 리듬을 찾은 순간이다. 심박수 분당 72회, 정상 동성 맥박. 당신이 지켜낸 것은 단순한 생체 신호가 아니라, 거대 자본이 하찮게 여겼던, 결코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한 인간의 존엄한 호흡이다.

하지만 이 의학적 승리는 가혹한 반쪽짜리다. 병원 이사회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서늘하다. 당신이 제출한 847페이지 분량의 임상 데이터 분석 결과 덕분에 불법 시험은 공식 중단되었지만, 그 뒤를 받치던 다국적 제약사와 정재계의 배후들은 법망의 그물코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법률 대리인단이 내세운 '연구원 개인의 과실'과 '독자적 판단'이라는 가림막은 그들의 꼬리를 완벽하게 잘라냈다. 입증 불충분과 불기소. 법은 거대 카르텔의 겉껍질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과장실을 정리하던 라이벌 백현우 교수와 로비에서 마주친다. 그의 충혈된 눈망울에는 패배의 굴욕 대신, 지독한 자기합리화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다. "나라고 처음부터 이 손을 더럽히고 싶었던 줄 알아?"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거대 의료 자본의 압박 속에서 서서히 괴물로 변해간 한 인간의 비열한 딜레마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국가 연구비가 끊기고 병원의 실적 압박이 목을 조여올 때,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생존 줄이 바로 그 악마의 계약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이제 거산병원의 새하얀 복도는 더는 안전한 요람이 아니다.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공허한 그늘 속에서, 당신의 목숨을 조여오는 사방의 음모와 소리 없는 암살의 위협이 스며든다. 그들의 반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당신은 어깨에 걸쳐진 의사 가운을 천천히 벗어 진료실 의자에 걸어둔다. 고온 멸균된 가운의 빳빳한 촉감이 마지막으로 손끝을 쓸고 지나간다. 의사 면허라는 온건한 방패 뒤에 숨어 싸우는 시대는 끝났다. 법이 심판하지 못하는 어둠의 세력이 밤거리를 지배한다면, 당신 역시 그 깊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 것이다.

주머니 속 세컨드 폰이 소리 없이 진동한다. 화면에는 다른 대형 병원에서 유출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조작된 임상 데이터 파일이 떠오른다.

차가운 밤비가 내리는 거산병원의 로비를 걸어 나오는 당신의 등 뒤로, 거대한 유리 건물이 침묵 속의 성벽처럼 솟아 있다. 당신은 허울뿐인 의사 가운 대신 차가운 어둠을 걸친 채, 진실을 수호하는 영원한 게릴라가 되어 젖은 아스팔트 위로 첫 발을 내딛는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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