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광태의 안면 근육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검붉은 선혈이 제단 바닥의 음각된 기문(奇門)을 타고 번져 나갔다. 그 피가 고대 검선이 억겁의 세월 동안 봉인해 두었던 절망의 인과마검(因果魔劍)의 사슬을 짚어 삼킨 순간, 지하 사당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죽어라, 설우향! 네놈의 오만함과 가문의 잔해를 한데 묶어 이 깊은 구렁텅이에 처박아 주마!"
은광태가 핏대를 세우며 시조 검선이 고대에 봉인해 놓았던 절망의 인과마검을 제단에서 강제로 발인해 우향에게 격발했다.
콰아아아앙!
핏빛으로 물든 파멸의 기운이 사당 천장을 뚫을 듯 솟구쳤다. 검붉은 뇌전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고, 은광태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천외마인급 마공 기포들이 사방을 메우며 우향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위압감이 아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외뢰(外雷)의 압박이 우향의 전신을 짓눌렀다.
피할 곳은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공 기포들은 호흡을 빼앗고 기혈을 조여왔다.
설상가상으로, 우향의 단전 깊은 곳에서 또 다른 폭풍이 몰아쳤다. 검선인결을 발동해 베어 넘겼던 수많은 적들의 원혼들이, 사흘간 미처 다 갚지 못했던 천여 망령들의 지독한 미련과 슬픔이 한꺼번에 고개를 든 것이다.
- 왜 우리를 베었느냐! - 내 처자식은 어찌하고 혼자 살아남았단 말이냐! - 억울하다, 이 원한을 어찌 갚을 것이냐!
귓가를 찢는 환청과 뇌리를 헤집는 환각이 우향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내면을 잠식하는 심마, 즉 내마(內魔)의 습격이었다.
"으으윽……!"
우향의 입술 사이로 거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빨을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잇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전신의 혈도가 뒤틀리고 뒤집히는 역류의 고통에 무릎이 꺾이려 했다.
내외로 몰아치는 파멸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향의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눈앞이 암흑으로 변해 가던 바로 그 찰나였다.
무너지는 돌바닥과 매캐한 먼지 구덩이를 뚫고, 한 줄기 백색 장포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우향 씨!"
목연화였다. 사당 바깥에서 가솔들과 식솔들을 대피시키던 그녀는 우향의 기운이 급격히 쇠락하는 것을 감지하고,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이 지옥 같은 사당 지하로 뛰어든 것이었다.
연화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우향의 상태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칠공(七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직전인 모습은 영락없는 주화입마의 말로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연화는 소매 안쪽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작은 옥병을 깨부수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빛을 발하는 영단이었다. 과거 나락천 침전의 얼음 절벽 틈새에서 목숨을 걸고 채취했던 극한의 차가운 얼음 정수, '빙로단의 정수'였다.
하지만 우향은 이미 아관긴폐(牙關緊閉) 상태였다. 이빨을 꽉 맞물린 채 혼절하기 직전인 그에게 약을 삼키게 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연화는 망설임 없이 빙로단의 정수를 자신의 입에 물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우향의 턱을 잡아당겨,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읍-!
우향의 굳게 다친 구강을 억지로 열고, 연화의 혀가 얼음의 정수를 밀어 넣었다.
순간, 극독보다 더 차가운 빙한의 진기가 우향의 식도를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타오르는 불길 같던 단전에 빙로단의 정수가 도달하자, 끓어오르던 마기와 심마의 기운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진정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우향의 흐려지던 동공에 푸른 안광이 번뜩이며 다시금 초점이 돌아왔다. 입술을 타고 흐르는 연화의 온기와 빙한의 영기가 뒤섞이며, 뒤틀렸던 기혈이 기적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연화…… 어찌 여기에……."
우향의 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연화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뒤로 물러섰다.
"살아야 해요. 당신은 여기서 쓰러질 사람이 아니니까."
정신을 다잡은 우향은 내면의 심연을 응시했다. 여전히 수천의 망령들이 울부짖으며 그의 영혼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러나 빙로단의 정수로 심력을 회복한 지금, 우향은 더 이상 그들의 원망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는 대신, 그 무거운 인과의 빚을 온전히 자신의 어깨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무인으로서의 독존과 가문의 완벽한 재건을 위해, 이 정도의 업보는 디딤돌에 불과했다.
우향은 내면의 망령들을 향해 묵직하고 단호한 도념(道念)을 선언했다.
"너희의 죽어간 억울한 원혼의 대소사를, 백협의 가문 주인이 된 내가 정화하리라."
피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들의 한과 슬픔을 기꺼이 짊어지고 청산하겠다는 무거운 약속이었다.
그 순간, 우향의 가슴속 깊은 곳에 거대한 도심이 박혔다. 도념 대도심 낙추(大道心落椎).
우향의 도심이 굳건해지자, 내면을 갉아먹던 망령들의 비명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그들의 원망과 슬픔은 더 이상 독이 아니었다. 억눌려 있던 영적 외채가 정화되어 푸른 선천진기로 변모하더니, 우향의 삼매검력과 융합되어 폭발적인 기세로 단전을 채워 나갔다.
그러나 은광태는 우향이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잔대가리를 굴리는구나! 그래봤자 모두 여기서 가루가 될 뿐이다!"
은광태가 부러진 오른팔의 뼈를 마공으로 강제로 맞추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개의 붉은 인과검기가 우향과 목연화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푸른 옷을 입은 신형이 번개처럼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우향아! 뒤는 내가 맡는다!"
소가주 설천교였다.
그가 휘두르는 검초는 백협 설가의 자랑인 설호검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극도로 뒤틀린 흑철의 기운과 사악한 궤적을 그리는 마교의 금기 무공, 철혈검법(鐵血劍法)이었다.
천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어깨와 손목의 혈도가 과부하로 터져나가며 붉은 피가 안개처럼 비산했다. 주화입마를 각오한, 아니 이미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자의 처절한 사투였다.
그 모습을 본 우향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 과거 나락천 절벽을 기어 나오던 날의 기억이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가문 경계선에 서 있던 늙은 경계목. 그 단단한 나무껍질을 깊게 파고들었던 뒤틀린 흑철 흔적과 기형적인 검흔들.
‘그 흔적이…… 바로 형의 검흔이었나.’
설천교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마교의 손아귀에서 설가를 존속시키기 위해 홀로 그 밤마다 내공 과부하의 고통을 견디며 마공을 익혔던 것이다. 가문을 수호하겠다는 비장한 신념 하나로 스스로 더러운 진흙탕에 발을 담근 고결한 대적자. 그것이 설천교의 진실이었다.
"크아아악!"
천교가 비명을 지르며 은광태의 핏빛 검기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의 철검이 부러지고 어깨 뼈가 드러나는 중상 속에서도, 천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우향의 앞을 지켰다.
"어서 해라, 설우향! 이 가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저 간사한 놈에게 똑똑히 보여줘라!"
천교의 목을 긁는 듯한 외침이 무너져 내리는 지하 사당을 뒤흔들었다.
우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품 안에서 차가운 쇳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과거 천명회방 척살대를 처단하고 그들의 시신에서 거두었던 기이한 수라흡혼잔의 파편이었다. 그 표면에는 은광태의 이름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이 파편은 은광태가 설호룡맥의 정수를 빨아들이기 위해 시조의 사당 지하에 설치해 둔 최종 의식용 제단의 핵심 매개체였다.
우향은 각성한 삼매검력을 아낌없이 그 파편에 주입했다. 은색과 청색이 뒤섞인 찬란한 신기가 파편을 감싸 안으며 웅웅거리는 울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은광태, 네놈이 심은 파멸의 씨앗으로 네놈의 제단을 깨부수마."
우향이 신형을 날려 수라흡혼잔의 파편을 제단의 중심, 즉 룡맥의 기운이 모여드는 진안(陣眼)을 향해 강하게 던졌다.
슈우우우웅- 콰직!
파편이 제단 중앙의 붉은 보석에 정확히 박히는 순간, 은광태가 갈무리하고 있던 사악한 에너지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수라흡혼잔의 파편이 제단의 마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급격한 과부하를 일으킨 것이다.
"아, 안 돼! 내 제단이……! 내 룡맥이……!"
은광태가 절규하며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콰콰콰콰광!
사당 바닥에 그려져 있던 피의 문양들이 일제히 폭사하며 기괴한 붉은 광선들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제단 자체가 단숨에 폭발하며 은광태가 기고만장하게 휘두르던 마공의 동력이 완전히 분쇄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스스스……
지옥의 번개가 천장을 뚫고 번뜩였다. 무너져 내리는 돌가루와 매캐한 연기 속에서, 그리고 억만 망령의 마지막 속삭임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우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한 손에는 검선의 비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의 전신에서는 일체의 공포와 심마를 완전히 지배한 진짜 천하제일의 아우라가 비상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맑고도 깊어, 그 어떤 어둠도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은광태는 제단의 잔해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우향을 올려다보았다.
"괴물…… 괴물 같은 놈……!"
우향은 대답 대신 검을 느리게 치켜들었다.
바로 그 순간, 우향의 가슴을 관통하는 중심 혈맥에서 은색과 청색을 거칠게 뒤섞은 고대 무결 신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하 사당의 경계를 넘어 온 우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장막을 허무는 폭광을 일으키며 거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두 눈을 부릅뜬 은광태의 시야가 은청색의 폭광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단순한 기운의 방출이 아니었다. 나락천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백발검선의 선천진기와, 우향이 스스로 짊어진 천여 원혼들의 정화된 사리가 융합하여 빚어낸 무결(無缺)의 극치였다.
"이, 이것은…… 검선의……!"
은광태의 목소리가 공포로 찢어졌다.
우향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검선의 비검이 허공을 가르자, 이지러진 달빛처럼 차가운 궤적이 허공에 새겨졌다.
스사사삭!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은청색의 신기가 일도양단(一刀兩斷)의 형상으로 일어섰다.
"인과의 고리는 여기서 끊는다."
우향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대지를 흔드는 종소리처럼 묵직했다.
스으윽!
무결선참(無缺仙斬).
초식의 이름조차 생략된, 오직 일 순간의 의념만으로 완성된 일격이 은광태의 전신을 관통했다.
콰아아아앙!
은광태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마공 기포들이 비누방울처럼 허무하게 터져 나갔다. 그의 가슴팍에 거대한 검흔이 새겨지며,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사악한 원혼들이 비명을 지르며 정화되었다.
"쿨럭……! 내가…… 내가 천하를 손에 쥐기도 전에……!"
은광태는 피눈물을 흘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단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마기가 급격히 소실되자, 그의 육신은 마치 수백 년 묵은 고목처럼 급격히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가문을 좀먹던 거대한 암영이 마침내 종막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궁-!
은광태의 숨통이 끊어짐과 동시에, 그가 피로 역류시켰던 설호룡맥의 폭주가 극치에 달했다. 지하 사당의 바닥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듯 쩍쩍 갈라져 나갔다.
"우향아! 피해라!"
만신창이가 된 설천교가 부러진 철검을 바닥에 짚으며 소리쳤다.
갈라진 바닥의 틈새, 그 천 길 낭떠러지 아래의 칠흑 같은 심연에서 아까 전 느꼈던 정체불명의 검은 안개가 해일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고대 시조 검선이 나락천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태고의 원망이자, 설호룡맥의 심장부를 지키던 영적인 파수꾼의 분노였다.
스스스스스!
검은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 안광과 마주한 순간, 우향의 단전 속에 도사린 검선인결의 낙인이 거칠게 요동쳤다.
쿵! 쿵! 쿵!
마치 거인의 심장 소리와 같은 박동이 지하 사당을 메웠다.
그 검은 안개는 은광태마저 도구로 삼았던 진짜 재앙의 실체였다. 안개 속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개의 검은 사슬들이 무너지는 천장 돌더미를 산산조각 내며 우향을 향해 쇄도했다.
"연화!"
우향은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목연화를 감싸 안았다.
비장한 바람이 사당 가득 휘몰아쳤다. 우향은 무결의 진기를 끌어올려 비검을 휘둘렀으나, 솟구치는 검은 사슬들은 물리적인 검기를 비웃듯 그대로 통과해 우향의 전신을 휘감았다.
철그렁!
"으윽……!"
사슬이 닿은 살갗이 타들어 가듯 그을렸다. 그것은 육체가 아닌 영혼을 묶는 인과의 사슬이었다.
"우향 씨!"
연화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검은 안개의 흡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향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갈라진 바닥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지 마라!"
설천교가 남은 내공을 쥐어짜 내며 몸을 날렸다. 그의 철혈검 기운이 사슬의 일부를 타격했으나, 사슬에서 뿜어져 나온 반탄력이 천교를 멀리 날려버렸다.
"커흑!"
천교는 석벽에 부딪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심연의 붉은 안광이 우향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머릿속을 울리는 기괴한 음성이 뇌리를 짓눌렀다.
- 계승자여…… 마지막 인과의 외채를 청산할 시간이 도래했다. 검선의 업을 지고 심연으로 내려오라.
우향의 몸이 끝없는 어둠의 구렁텅이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돌더미들 사이로,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는 목연화의 얼굴이 멀어져 갔다. 피를 흘리며 일어서려 발버둥 치는 설천교의 모습도 어둠에 잠겼다.
이대로 나락천의 가장 깊은 지옥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때, 추락하는 우향의 귓가에 낯익은 깐족거리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 이보게, 제자 놈아. 거기서 정신 줄 놓으면 진짜 개죽음이라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지.
백발검선의 원영이었다.
동시에 우향의 가슴팍에 박힌 은청색의 도심이 붉은 안개 속에서 한 줄기 태양처럼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과연 우향은 나락천의 태고 봉인을 깨부수고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깊은 심연의 지옥에서 영원히 잠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