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허공을 가르는 바람은 칼날보다 매서웠다.

쿠구구구구!

귓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신형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백협 설가의 뒤편, 해가 단 한 번도 닿지 않아 만년의 음기만이 도사린다는 천 길 낭떠러지 나락천(奈落川)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혼백이 날아간다는 그 심연을 향해, 설우향의 몸이 사정없이 처박히고 있었다.

"서자 주제에 가문의 혈맥을 탐한 대가다. 지옥에서 네 어미와 함께 기어가거라."

떨어지기 직전, 귓가에 박혔던 계모 임씨의 표독스러운 음성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그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밀쳐내던 천명회방의 주구, 은 장로의 주름진 얼굴이 허공의 핏빛 잔상으로 일그러졌다. 가문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누명. 단지 서자로 태어나 숨을 쉬었다는 죄 아닌 죄가 우향의 발목을 잡아 어둠 속으로 끌어내린 결과였다.

스스스스슥!

날카로운 절벽의 돌출부들이 우향의 등 가죽과 어깨를 사정없이 긁고 지나갔다. 거친 나뭇가지들이 몸을 때리며 뼈를 부러뜨리는 둔탁한 파열음이 심연의 정적을 깨웠다.

콰드득! 카학!

"크흑……!"

핏덩이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쏟아져 나왔다. 백협 설가의 가솔들은 언제나 그를 개처럼 취급했다. 밥줄을 쥔 계모의 눈치를 보며 침을 뱉었고, 사촌 형이자 가문의 천재라 불리는 설천교의 그림자에 가려져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차가운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우향은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를지언정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그 고집이, 결국 이 처참한 종말을 불러온 셈이었다.

차가운 안개가 얼굴을 때렸다. 추락의 끝은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우향은 허공을 움켜쥐려 손을 뻗었으나, 손끝에 걸리는 것은 오직 허무한 허공과 절망적인 냉기뿐이었다.

쿵! 콰르르릉!

마침내 육신이 바닥에 처박혔다. 나락천 깊은 곳에 쌓여 있던 썩은 낙엽과 해골 더미 위로 우향의 신형이 기괴하게 꺾이며 굴러떨어졌다.

척추가 끊어지고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극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입을 열자 거친 피거품이 바닥의 검붉은 흙 위로 번져나갔다. 사방은 기형적으로 자라난 붉은 나무들이 기괴한 팔을 뻗고 있는 환각의 숲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곡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때렸다.

'이대로…… 끝인가.'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서자로 태어나 멸시만 받다 이 어두운 시궁창에서 이름도 없이 썩어갈 운명. 억울함이 서린 뜨거운 눈물이 핏물과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우향의 손가락 끝이 무언가 딱딱하고 기이한 물체에 닿았다.

차가운 돌바닥이 아니었다. 사람의 뼈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골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은은하고 청아한 백색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골의 뒤편에는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 표면에 새겨진 조잡하면서도 정교한 검흔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선암벽(劍仙巖壁).

그리고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영면에 든 이는 수백 년 전 천하를 오색 검기로 물들였다는 신화 속의 존재, 백발검선(白發劍仙)의 유해였다.

스으으으읍.

우향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바닥을 타고 흘러 검선의 유해와 암벽의 기단에 닿았다. 그 순간, 암벽에 새겨진 검흔들이 일제히 청백색의 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귓가를 울리는 것은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주인을 기다려온 절대적인 검의 울림, 거문고 소리처럼 맑고 고결한 검명(劍鳴)이었다.

[인(因)을 심었으니, 과(果)를 거둘 지어다.]

뇌리에 깊고 묵직한 노인의 음성이 내리꽂혔다. 방관자적이면서도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목소리와 함께, 검선암벽에서 흘러나온 청백색의 액체 같은 기운이 우향의 깨진 혈맥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밀려들어 왔다.

"아, 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고통이자 동시에 기적이었다.

부러진 뼈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불통 계통의 경맥들이 청백색의 기운으로 메워지며 전보다 수십 배는 더 단단하고 넓은 통로로 재건되었다. 단전 깊은 곳에 한 줄기 은하수가 들어앉은 듯,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내공의 심연이 개방되었다.

검선인결(劍仙因結).

백발검선이 남긴 신화적인 기연이, 죽어가던 서자의 육신을 완벽한 무인의 그릇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개의 초식이 은빛 유성처럼 스쳐 지나갔다. 손끝 하나에 천하를 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압도적인 힘이 전신을 채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무게감이 얹어졌다. 마치 타인의 슬픔과 원망이 쇠사슬이 되어 심장을 옭아매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었다.

"거기 쥐새끼처럼 쓰러져 있는 놈이 설가의 그 서자 놈인가?"

스산한 숲의 어둠을 찢고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명의 인영이 붉은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얼굴에 흉측한 흉터를 새긴 사내들. 가문의 배신자 은 장로가 우향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기 위해 사주한 흑림의 살수들, '수라검귀(修羅劍鬼)'들이었다.

"흐흐흐, 뼈가 제멋대로 으스러졌군. 은 장로께서 굳이 시신을 확인하고 가루로 만들라 하셨거늘, 수고를 덜었어."

선두에 선 덩치 큰 사내가 검을 뽑아 들며 이죽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살아있는 생명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잔인함이 가득했다.

"불쌍한 놈. 서자로 태어나 개처럼 살다 개처럼 죽는구나. 다음 생에는 권력 있는 집안의 적자로 태어나거라."

사내들이 키득거리며 우향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우향의 신경을 자극했다.

우향은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관절에서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어라? 이 새끼 봐라? 뼈가 다 부러졌을 텐데 어떻게 일어서는 거지?"

사내들이 주춤하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기이한 위압감이 숲의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우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을 천천히 뻗었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그러나 손끝을 따라 피어오르는 기운은 이미 이 세상의 무학이 아니었다.

'검선인결.'

단전의 심연에서 잠자고 있던 거대한 해일이 깨어났다. 무림 십대 고수급에 달하는 초월적인 내공이 우향의 손가락끝으로 다이렉트로 인출되었다.

우웅!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우향의 손끝에서 한 자루의 거대한 청백색 검기가 형상화되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검은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했고, 그 주변의 대기를 송두리째 얼려버릴 듯한 극음의 한기를 뿜어냈다.

"이, 이게 무슨……! 이놈 무공을 못 하는 폐물 아니었나?!"

수라검귀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검기로 형상화된 무형검(無形劍)은 화경(化境)의 고수조차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신화 속의 경지였다.

"죽여라! 당장 목을 베어!"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검풍이 우향을 향해 사방에서 쇄도했다.

우향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조소가 그의 입술에 머물렀다.

"가소롭군."

우향이 힘을 실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파아앗!

초식의 이름은 필요 없었다. 그저 가벼운 손짓 하나에, 공간을 채우고 있던 청백색의 검기가 폭발적으로 사방을 쓸어버렸다.

스화아악!

그것은 칼바람이 아니라, 빛의 장막이었다. 청백의 검막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붉은 나무들이 소리도 없이 두 동강 나며 먼지로 화했다. 쇄도하던 수라검귀들의 검이 먼저 산산조각 났고, 그들의 신형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아, 아아아……!"

사내들의 눈동자에 극도의 공포가 떠올랐다. 자신들이 마주한 존재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심연에서 걸어 나온 절대적인 사신임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콰아아앙!

청백빛 검기가 수라검귀들의 전신을 관통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들의 육신은 뼈와 살이 분리되며 청백색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줌의 재와 먼지로 분쇄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나락천의 어둠을 가득 채웠던 살수들이 단 한 번의 손짓에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이다.

우향은 손을 내렸다.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고, 오직 바람만이 붉은 숲을 쓸고 지나갔다. 가문을 짓누르던 그 수많은 멸시와 억압을 단숨에 찢어발긴 듯한 극상의 희열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압도적인 무력. 이것이야말로 그가 갈망하던 독존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 통쾌한 기쁨은 반 호흡조차 가지 못했다.

쿵!

우향의 심장이 고장 난 시계추처럼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커헉!"

우향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쏟아진 피는 이전의 상처로 인한 피가 아니었다. 단전 내부에서 기경팔맥을 타고 역류하는 광폭한 마기가 내장을 헤집어놓는 고통이었다.

"으, 으윽……! 머리가……!"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앞의 시야가 핏빛 환각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라검귀들의 임종 직전의 비명, 그들이 품었던 처절한 원한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평생 지어온 피비린내 나는 업보의 무게가 우향의 영혼으로 고스란히 전송되어 오고 있었다.

검선인결의 대가. 베어낸 적의 모든 인과적 채무와 원한을 시전자가 온몸으로 떠안아야 한다는 파멸적인 법칙이 발동한 것이었다.

- 네놈이 우리를 죽였느냐! - 지옥으로 가자! 혼자 죽을 수는 없다! - 내 가족은 어찌하고……! 네놈에게 저주를……!

귀를 찢는 듯한 수라검귀들의 저주 섞인 환청이 이명처럼 뇌세포를 후벼팠다. 내공의 흐름이 미친 듯이 뒤틀리며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얼음이 동시에 충돌했다.

"크아아악!"

우향은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전신의 혈도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관절들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첫 기연의 달콤함 뒤에 찾아온, 뼈를 깎는 심마(心魔)의 저주였다. 사방의 붉은 나무들이 그를 비웃듯 춤을 추는 환각 속에서, 우향은 피눈물을 흘리며 의식을 잃어갔다.

"크으윽……!"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오는 신음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우향의 시야가 검붉게 물들었다. 방금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라검귀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허공의 핏빛 안개 속에서 실체화되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네놈이 우리를 죽였느냐! - 지옥으로 가자! 혼자 죽을 수는 없다! - 내 가솔들은 어찌하라고……! 네놈에게 저주를……!

귀를 찢는 듯한 원혼들의 저주 섞인 환청이 이명처럼 뇌세포를 후벼팠다. 단전의 청백색 내공이 그들의 원한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기경팔맥을 거꾸로 뒤흔들었다. 역혈(逆血)의 고통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검선인결의 대가, 베어낸 적의 모든 인과적 채무와 원한을 시전자가 온몸으로 떠안아야 한다는 파멸적인 법칙이 마침내 발동한 것이었다.

"한낱…… 잡귀 놈들이."

우향은 억지로 턱뼈가 으스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비굴하게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입술을 고쳐 깨물며 솟구치는 피를 삼켰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타협 없는 오만함과 독존(獨尊)을 향한 갈망이었다.

백발검선의 유해가 놓인 자리를 흘려보며, 우향은 차가운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사정없이 떨렸으나 무릎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내 갈 길을 막아서는 자는 귀신이든 신선이든 베어 넘길 뿐이다."

그가 단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선천진기를 강제로 쥐어짜 내어 폭주하는 마기를 억눌렀다. 뼈를 깎는 신형의 고통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천 길 낭떠러지 위, 해가 뜨기 시작하는 절벽의 끝을 향했다.

이 음침한 수라의 구렁텅이에 뼈를 묻을 순 없었다. 자신을 밀어 넣은 계모 임씨와 은 장로, 그리고 자신을 벌레 보듯 했던 가문의 심장부로 돌아가야 했다.

퍽!

우향의 손가락이 단단한 절벽 암벽을 파고들었다. 검선인결의 내공이 실린 손끝은 강철보다 단단했다.

그는 오직 손가락의 악력과 단전의 기운만으로 수직의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등 뒤에서 원혼들이 발목을 잡아끄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이명이 고막을 찢고, 시야가 흐려져 당장이라도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은 아찔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우향은 멈추지 않았다. 손끝이 터져 피가 흐르고 손톱이 뒤집어져도, 그는 묵묵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이 그의 깨진 옷자락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밤하늘에 걸린 차가운 그믐달만이 홀로 그의 비장한 등반을 굽어보고 있었다.

* * *

휘이이이잉.

새벽녘의 서늘한 기운이 나락천 위쪽의 숲을 쓸고 지나갔다.

스슥.

흙먼지를 뒤집어쓴 손이 마침내 절벽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우향은 온몸의 진기를 소진한 채, 간신히 평지로 몸을 끌어올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심장은 폭발하기 직전처럼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직 심마의 불길은 꺼지지 않은 채 단전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

우향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다, 가문 경계선에 서 있는 거대한 경계목(境界木)을 짚었다.

바스락.

그의 손끝에 기이한 감촉이 걸렸다.

"……?"

우향의 미간이 좁혀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경계목 표면에 선명하게 남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표면 일부가 거무스름하게 타들어 가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그을음이 아니었다. 사악하고 뒤틀린 흑철(黑鐵)의 흔적이었다. 그 위를 사선으로 깊게 베고 지나간 검흔은 기형적일 정도로 비틀려 있었으며, 은은한 마기(魔氣)의 잔재를 풍기고 있었다.

백협 설가의 정종 무학인 설호검법으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극도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무공의 흔적.

'가문의 경계에…… 어찌 이런 마교의 흔적이 있는 거지?'

그것은 마치 누군가 밤마다 이곳에서 가문의 눈을 피해 기이한 마공을 수련한 듯한 형태였다.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이 심마의 고통보다 더 차갑게 심장을 찔렀으나, 더 깊이 생각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쿵!

"윽……!"

억누르고 있던 심마가 다시 한번 단전을 강타했다. 전신의 혈도가 일시에 막히며 우향의 신형이 정원 바닥의 잡초 위로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는다면, 폭주하는 내공에 온몸의 혈관이 터져 죽음에 이를 터였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잡초가 밟히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피비린내와 흙먼지로 가득했던 코끝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은은한 약초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난 백합처럼 청초한 향기였다.

우향의 흐려져 가는 시야 속으로 백색의 소복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

우향은 본능적으로 검선인결의 내공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단전은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았다. 적의 주구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살수인가. 타인을 향한 극도의 불신이 본능적인 경계심을 깨웠으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이마로 닿는 손길은 얼음처럼 차가운 우향의 체온과 달리 한없이 따스했다.

"이리 지독한 심마와 상처를 품고도 살아있다니…… 대체 무슨 일을 겪으신 건가요?"

공기를 정화하는 듯한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의식을 잃어가는 우향의 눈동자에,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여인의 실루엣이 마지막으로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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