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세레나의 가녀린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아카데미 대심문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녀의 뽀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이 하얀 드레스 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시스템 알림: 킬리안 드 루미나스의 감정 채무가 폭증합니다! (+10,000 마일리지)] [시스템 알림: 하인리히 폰 아델하이트의 집착 수치가 임계치를 돌파합니다! (+12,000 마일리지)] [시스템 알림: 루카스 벨몬트의 독점욕과 죄책감이 폭발합니다! (+9,000 마일리지)] [현재 보유 자산: 76,000 마일리지]
귓가를 때리는 시스템 알림음이 마치 클럽의 사이렌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세레나는 머리가 깨질 듯한 고열 속에서도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아니, 퇴근 직전에 결재 다 받고 가방 쌌는데 추가 근무라니…… 그것도 무급으로……!’
그녀의 영혼은 이미 가출하기 직전이었으나, 육체는 야속하게도 심장을 쥐어짜는 페널티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호감도 과부하. 남주들이 품은 죄책감과 집착이 너무 커져 세계의 억제력이 작동한 결과였다. 쉽게 말해, 너무 인기가 많아서 몸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세레나! 정신 차려라! 세레나!”
황태자 킬리안이 품위고 체통이고 전부 내팽개친 채 대리석 바닥을 기어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며 세레나의 뺨을 감싸 쥐었다.
“이게 무슨…… 왜 피를 흘리는 것이냐! 방금 전까지 그렇게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 않더냐!”
“성녀님!”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가 붉은 제복 자락을 휘날리며 검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차가운 벽안에는 평생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제가 미련했습니다. 당신이 홀로 그 어둠을 짊어지고 가시는 줄도 모르고, 감히 의심하고 심문하려 들다니……!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시고 제발 눈을 뜨십시오!”
‘아니, 제발 비켜봐. 숨 막혀 죽겠으니까 좀 떨어지라고, 이 집착광공들아.’
세레나는 산소 호흡기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저 가냘픈 기침과 함께 터져 나오는 붉은 피 한 줌뿐이었다.
“콜록……!”
그 잔인하도록 붉은 피가 킬리안의 황금빛 예복을 적시자, 대심문장에 모인 귀족들은 단체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경악했다.
그 와중에, 기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엘리제 에버하르트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가짜야! 저년은 교황청을 속이고 있는 가짜라고! 모두가 저 위선자에게 속고 있어!”
엘리제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비명을 질렀다.
“내가 똑똑히 기억해! 내가 악마 숭배 상인에게 에버하르트 가문의 공금까지 수천 골드나 빼돌려서 산 ‘흑마법 고대 독약 가루’를 저년의 홍차에 몰래 탔단 말이야! 진짜 성녀라면 어떻게 그 독을 마시고도 멀쩡할 수가 있어? 애초에 성력 따윈 없었던 거야! 저건 다 사기극이라고!”
정적이 감돌았다.
엘리제의 절규는 재판장 가득 울려 퍼졌으나, 사태를 반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거대한 무덤을 파는 꼴이 되었다.
대심관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노대심관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법봉을 내리쳤다.
“무어라……! 에버하르트 가문의 공금을 횡령하여, 감히 황실에서도 금기시하는 흑마법 고대 독약을 구매해 성녀님을 시해하려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냐!”
“자, 자백이라니! 그게 아니라 저년이 가짜라는 걸 증명하려고……!”
“입을 닥쳐라, 악독한 년!”
하인리히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살기 어린 마력이 대심문장을 얼려 버릴 듯이 뿜어져 나왔다.
“에버하르트 영애가 그 끔찍한 독약을 드시고도 멀쩡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당신의 그 더러운 독 따위는 성녀님의 무구한 마력 앞에 흔적도 없이 정화되었기 때문이지. 그것도 모르고 감히 죄를 자백하다니, 네년의 영혼마저 지옥의 불꽃으로 정화해 주마.”
“아, 아니야! 아버님! 저 좀 살려주세요!”
엘리제가 에버하르트 후작을 바라보았으나, 이미 포박당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후작에게는 그녀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인리히는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양가죽 서류를 꺼내 대심관들에게 던졌다.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성녀님의 안위를 위해 극비리에 보관해 오던 교황청 기밀 대서리다! 성녀님의 마력 검출 수치가 성력인지 마력인지 이중 판별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보관해 두었으나, 이미 교황청의 성인(聖印)이 완벽하게 날인되어 공증된 진짜 성녀 증서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대심관이 황급히 서류를 받아 들고 인장을 확인하더니, 깊은 감동과 전율에 차 소리쳤다.
“오오……! 교황청 공인 성녀 증서가 확실하도다! 하인리히 경이 직접 수호하고 보증한 이 대서리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세레나 영애는 진정으로 이 제국을 비출 유일무이한 성녀이시다!”
‘어라, 저게 왜 저기서 나와?’
세레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8화에서 자신이 하인리히의 주머니에서 슬쩍해 마일리지를 써서 위조하고 공증해 둔 그 기밀 대서리가, 이제는 완벽한 면죄부를 넘어 하인리히 본인의 손으로 바쳐진 셈이었다.
정말이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물려 들어가는 자본주의적 사기극이었다.
“세레나 영애!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루카스 벨몬트가 헐떡이며 인파를 헤치고 다녀왔다. 평소의 그 냉철하고 계산 빠른 상단의 행주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흐트러진 셔츠 깃과 땀방울이 그의 절박함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내 마차가 대기 중이다! 비켜라! 황태자 전하고 집행관이고 나발이고 당장 비키란 말입니다! 영애를 치료해야 해!”
루카스가 소리치자, 킬리안이 세레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내가 직접 안고 간다. 아카데미 특별 병동으로 즉시 이송한다! 황실 의관들을 전부 소집해라! 치료하지 못하는 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렇게 세레나는 제국의 가장 고결한 세 남자의 호위를 받으며, 피를 토하고 쓰러진 비련의 성녀로서 재판장을 퇴장했다. 뒤에 남겨진 에버하르트 가문 사람들의 절규와 기사들의 무자비한 쇠사슬 소리는, 세레나에게는 그저 감미로운 은퇴식 배경음악에 불과했다.
***
사흘 뒤, 아카데미 최상층에 위치한 황실 전용 특별 병동.
세레나는 최고급 실크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는 펄펄 끓는 냄비처럼 뜨거웠고, 뼈마디가 쑤시는 것이 꼭 K-직장인 시절 일주일 연속 야근을 때리고 독감에 걸린 채 주말 출근을 강행했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아, 죽겠다…… 진짜 죽겠네.’
하지만 그녀의 비참한 신체 상태와는 달리, 침대 주변은 그야말로 ‘금은보화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동업자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침대 머리맡에 앉아 밤새 그녀를 간호한 듯 핼쑥해진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인장이 찍힌 두꺼운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루카스 님?”
세레나가 가식적인 극존칭과 함께 영혼 없이 물었다.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루카스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일전에 말씀하셨던 남부 에르제 영지의 개발권입니다. 그리고…….”
루카스는 서류 한 장을 따로 빼내어 세레나의 힘없는 손가락 사이에 쥐여주었다.
“그곳의 가장 골칫거리이자 처분 곤란했던 마물 지대의 ‘마력 분출구 권리증’입니다. 원래는 마물이 뿜어내는 탁한 마력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였으나…… 당신 같은 성녀시라면, 이 마력을 정화하여 무궁무진한 동력원으로 쓰실 수 있겠지요. 제 쓸데없는 손익계산보다 영애의 목숨과 안위가 먼저입니다. 이 땅을 무상으로 영애의 명의로 이전해 두었습니다.”
‘심봤다!’
세레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력 분출구! 마물이 나오는 똥땅이라고 다들 버려두었지만, 현대 지식을 가진 세레나에게는 평생 가스비와 전기세 걱정 없이 오븐을 가동할 수 있는 무한 동력원이나 다름없었다. 빙수기 돌릴 마력도 여기서 충당하면 공짜였다.
“아아…… 루카스 님. 이렇게 귀한 것을 제게 주시다니요. 저는 그저…… 남부의 작은 땅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세레나가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아련하게 속삭였다.
[시스템 알림: 루카스 벨몬트의 감정 부채가 극에 달합니다! (+8,000 마일리지)] [시스템 알림: ‘마력 분출구 권리증’이 완벽하게 귀속되었습니다!]
“영애…… 당신은 정말 제 영혼의 CFO이십니다. 이 쓸모없는 땅마저 제국을 위해 정화하시려는 그 숭고한 뜻에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루카스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 특별 병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하인리히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양손에는 푸른빛을 내뿜는 거대한 마력석들이 가득 담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성녀님, 정화의 집행관으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하인리히는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마력석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것은 제가 평생 이단을 처단하며 모은 가공할 순도의 마력석들입니다. 성녀님의 마력이 제국의 어둠을 정화하느라 고갈되어 병을 얻으신 것이니, 제발 이 마력들을 흡수해 주십시오. 제 모든 마력과 생명력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고통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아니, 나 마력 고갈된 게 아니라 호감도 과부하 때문에 열병 앓는 건데…… 저 고농도 마력석들을 방에 깔아두면 방사능 노출되는 기분이라고…….’
세레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하인리히 경…… 당신의 고결한 성의만으로도 제 영혼은 충분히 정화되었습니다. 부디 자신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 병은…… 세상의 업보를 씻어내기 위한 작은 대가일 뿐입니다.”
“성녀님……!”
하인리히가 결국 참지 못하고 세레나의 침대 자락을 붙잡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의 오열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울 때쯤, 황실 공인 대심관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병실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세레나의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깊은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성녀 세레나 영애여. 황실과 대심관회는 영애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노대심관이 장엄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제국 전역의 사교계에 공포하였습니다. 성녀께서 앓아누우신 이 열병은, 에버하르트 가문의 위선과 제국에 깃든 모든 이단과 어둠의 기운을 홀로 정화하시느라 겪으시는 ‘신의 주벌’이자 성스러운 대속이십니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성녀님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황실은 영애의 남부 에르제 은퇴 영지에 대공 자작 작위의 공식 라이선스와 영구 면세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와, 대공 자작 작위에 영구 면세권?! 미쳤다, 진짜!’
세레나는 속으로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세무조사 걱정 없는 빵집이라니! 제국 공인 면세 디저트 카페라니! 이것이야말로 K-직장인이 꿈꾸던 궁극의 불로소득이자 세금 탈루 없는 합법적 무세권이었다.
[시스템 알림: 전 제국 사교계의 경외심과 호감도가 폭증합니다!] [현재 보유 자산: 95,000 마일리지] [태양의 눈물(황실 가보) 귀속 대기 상태 완료!]
그녀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완벽한 은퇴 설계를 완성해가며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병실 안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며, 묵직하고 비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터벅.
문가에 정지한 그림자. 황태자 킬리안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황태자로서의 화려한 의복은 먼지와 피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의 눈밑은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양손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는데, 붕대 틈새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킬리안 전하……?”
세레나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킬리안이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제지했다.
“누워 있어라, 세레나. 제발 움직이지 말아다오.”
킬리안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품 안에서 붉은빛으로 기괴하게 진동하는 보석을 꺼냈다.
황실의 가보이자, 과거에 세레나에게서 빼앗아 보관 중이던 신물, ‘태양의 눈물’이었다.
“이 보석은…… 원래 네 것이었다. 내가 미련하여 네게서 빼앗고 너를 외면했지.”
킬리안이 피 묻은 손으로 보석을 꽉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신선한 피가 보석의 표면에 스며들며, 보석이 눈부신 태양의 광휘를 내뿜기 시작했다.
“황실의 비기에 적혀 있더군. 이 가보는 황실 직계의 진실한 피와 영혼의 속죄를 바쳐야만 그 진정한 봉인이 해제된다고. 네가 흘린 피와 고통에 비하면, 내 손가락 몇 개를 베어 바치는 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킬리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세레나의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너를 구하겠다. 그러니 부디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살아만 다오.”
그가 피를 흘리는 진실한 참회의 손길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눈물’을 세레나의 가슴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보석이 그녀의 가슴에 닿는 순간, 세레나의 뇌리에 붉은색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황실 가보 ‘태양의 눈물’의 봉인이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 [시스템 강제 구동: 보석에 담긴 방대한 황실의 마력을 급속 정화 및 마일리지 환전 절차를 개시합니다!] [환전 예상 금액: 500,000 마일리지……!] [정화 작업 가동률: 1%…… 5%……]
세레나의 심장이 기괴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보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압도적인 황금빛 광휘가 그녀의 전신을 감싸 안으며, 뇌를 태울 듯한 마력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