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바람이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감각에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켜쥐었다.
단두대.
목뼈가 단번에 으스러지고 차가운 칼날이 살점을 파고드는 그 끔찍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 예정된 악역 영애 세레나 에버하르트의 확정된 미래였다.
화려한 황립 아카데미의 무도회장 뒤편, 인적 없는 어두운 정원 한구석에서 세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로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흘러나왔지만, 이곳은 오직 죽음의 그림자만이 일렁이는 무덤가처럼 고요했다.
‘진짜로 목이 잘린다고? 고작 저 잘난 남주인공 놈들한테 매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했다. 전생에서 부장님의 온갖 갑질을 견디며 야근을 밥 먹듯 하던 K-직장인 시절에도 이토록 불합리한 처사를 당해본 적은 없었다. 퇴직금은커녕 목숨을 압수당하게 생긴 마당에 얌전히 칼날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맑고 청아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특수 권능: ‘호감도 회계 장부’가 개설되었습니다.] [개설 축하 기본 자산: 0 Gold] [※ 경고: 세계의 인과율을 조정하는 자산 거래 시스템입니다. 타인이 보유자에게 느끼는 감정 부채(미안함, 애정, 집착 등)는 즉시 자산(Gold)으로 변환됩니다. 단, 장부상 감정 부채의 총액이 임계치를 초과할 경우, ‘운명 보정력’에 의해 치명적인 패널티(급성 열병, 불운 등)가 청구되오니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세레나의 눈앞에 반투명한 금빛 호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격자무늬가 촘촘히 박힌, 전생에서 닳고 닳도록 보았던 엑셀 가계부와 똑 닮은 형태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굴러갔다.
‘회계 장부? 감정 부채를 돈으로 바꾼다고?’
자본주의의 노예로 뼈가 굵은 세레나에게 ‘장부’와 ‘자산’이라는 단어는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위험 부담이 있는 패널티 조항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목이 날아갈 처지였다. 적당히 감정 부채를 조율하며 자금을 세탁해 은퇴 자금을 마련한다면, 저 지긋지긋한 중앙 정계를 떠나 남부의 따뜻한 영지에서 프리미엄 크루아상을 파는 디저트 카페를 차려 꿀 빠는 백수 생활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바스락.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무거운 발소리에 세레나는 척추를 꼿꼿이 세웠다. 어둠 속에서 푸른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 나오는 사내. 제국의 황태자이자, 원작에서 세레나를 차갑게 외면해 단두대로 몰아넣었던 장본인, 킬리안 드 루미나스였다.
그의 완벽하게 조각된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늘 오만하게 치켜올려져 있던 눈매에는 낯선 물기가 축축하게 서려 있었다.
“세레나…….”
갈라진 목소리가 밤공기를 흔들었다. 세레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K-직장인 시절, 진상 고객을 응대할 때 쓰던 영혼 없는 가식적 미소가 얼굴 위로 자동 장착되었다. 입꼬리를 정확히 15도 올리고, 눈동자에서 생기를 완전히 거둔 무결한 자본주의식 미소였다.
“아, 황자님. 안녕하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비즈니스…… 아니, 사적인 공간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극존칭과 함께 깍듯이 허리를 숙이는 세레나를 보며 킬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세레나는 스치듯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거리를 두는 완벽한 회피 기동이었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예전처럼 킬리안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인가?”
“어머나, 황자님. 황실의 고결한 아드님이신 황자님의 존함을 제 비천한 입에 담다니요. 그것은 제국 법률상으로도, 제 개인적인 도덕적 기준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결례이옵니다. 부디 고귀하신 신분에 걸맞은 품위를 유지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세레나의 말투는 물 흐르듯 우아했으나, 그 안에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쳐져 있었다. 상대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는 완벽한 아웃소싱형 거절이었다.
킬리안은 심장을 칼로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책과 후회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내가 잘못했다! 네가 에버하르트 저택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면서도 외면했고, 네가 내게 내밀었던 손을 차갑게 쳐내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는…… 끝까지 내 앞날을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며 물러나려는 것이냐?”
‘예? 제가요? 탈세하고 은퇴 자금 모으려고 그러는 건데요?’
세레나의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킬리안의 필터링 회로는 이미 심각한 고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레나가 차갑게 선을 그을수록, 킬리안은 그것을 ‘정치적 풍파로부터 황태자인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멀어지려는 눈물겨운 자비’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 순간, 세레나의 머리 위로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띠링!] [공략 대상: 킬리안 드 루미나스의 감정 상태를 분석합니다.] [존경과 미안함, 그리고 자책감이 결합된 회한의 감정 부채가 급증합니다!] [부채 수치: 300,000 Gold 상당] [자산을 즉시 흡수하시겠습니까? (Y/N)]
‘30만 골드?!’
세레나의 영혼 없는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달러 기호가 스쳐 지나갔다. 30만 골드면 남부 영지에 테라스가 딸린 고급 3층 건물을 통째로 사고도 크루아상 생지 수만 개를 들여올 수 있는 거금이었다.
황태자의 죄책감은 그야말로 우량주 중의 우량주였다. 세레나는 당장 머릿속으로 ‘Y’를 클릭했다.
[자산이 성공적으로 입금되었습니다!] [보유 자산: 30만 Gold] [※ 주의: 킬리안 드 루미나스의 감정 채무가 장부에 영구 기록되었습니다. 감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주기적으로 상대에게 ‘정신적 타격(뺨 맞기, 욕설 듣기 등)’을 유도하여 부채를 탕감하지 않으면 운명 보정력이 작동합니다.]
좋은 소식 뒤에 찾아온 불길한 경고였지만, 세레나는 일단 눈앞의 거금에 입안이 다 달콤해졌다. 뺨을 맞는 페널티 탕감이야 나중에 대충 길가는 시비꾼을 고용해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자본주의의 단맛을 본 세레나의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럽고 가식적으로 변했다.
“황자님, 지나간 과거의 일에 마음을 쓰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 부족함 때문이었으니, 황자님께서는 그저 높고 푸른 하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시옵소서. 저처럼 음지에 어울리는 존재는 황자님의 찬란한 빛을 가릴 뿐입니다.”
“세레나……! 어찌 그리도 다정하단 말인가! 나를 원망하란 말이다! 차라리 뺨이라도 때리며 욕을 해!”
킬리안이 결국 무릎을 꿇을 듯한 기세로 울먹였다. 그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숫자가 요동쳤다.
[추가 감정 부채 발생: 50,000 Gold]
‘와, 노다지네.’
세레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남자는 훌륭한 자금줄이었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돈이 복사되는 기적의 금융 치료기였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자산을 쌓으면 패널티가 청구되므로, 일단 이쯤에서 적당히 퇴근 타이밍을 잡아야 했다. 세레나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그럼 황자님, 부디 옥체 보존하시고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오늘 나눈 대화는 제 기억 소멸 장치…… 아니,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겠습니다.”
“기다려라, 세레나!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킬리안이 절박하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세레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무도회장 외곽의 한적한 테라스로 피신한 세레나는 품속에서 작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가문의 정보원 노릇을 하던 시녀 마리에게 뇌물을 쥐여주고 알아낸 극비 정보들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수첩을 펼친 세레나의 깃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메모: 의붓동생 엘리제 에버하르트의 최근 동선.] [- 암시장의 악마 숭배 상인과 접촉 흔적 확인.] [- 가문 공금 중 상당액이 출처 불명의 약초 거래로 유출됨.] [- 입수한 소문에 따르면, 영혼을 좀먹는 ‘흑마법 고대 독약 가루’를 구매했다고 함.]
세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착하고 가련한 척 내숭을 떨던 의붓동생 엘리제. 그녀는 세레나를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해 뒤에서 온갖 더러운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저 고대 독약은 분명 며칠 뒤에 있을 티타임에서 세레나의 찻잔에 들어갈 예정일 터였다.
‘독약이라 이거지? 아주 훌륭한 투자 포트폴리오야.’
세레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엘리제가 음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황실과 학회에 고발하면 엄청난 감정 부채와 합의금을 뜯어낼 수 있었다. 위기는 곧 기회였고, 독약은 곧 대박 상장 주식이었다.
수첩을 덮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단순한 밤바람이 아니었다. 살을 베어낼 듯한 예리하고 무거운 마력이 테라스 사방을 짓눌렀다.
자갈을 밟는 우직하고 절제된 군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저벅. 저벅.
은빛 월광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등 뒤로 성스러운 백은색 검집이 언뜻 보였다. 제국 최고의 이단 심문관이자, 사악한 마녀를 처단하는 일에 영혼을 바친 집행관 하인리히 폰 아델하이트였다.
그의 매서운 적안이 세레나의 얼굴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거기까지다, 에버하르트 영애.”
하인리히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고드름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자, 시퍼런 검끝이 세레나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서늘한 쇳내와 함께 전율할 만한 살기가 피부를 찔렀다.
“사악한 이단의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군. 방금 황태자 전하께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네 위선적인 미소 뒤에 숨겨진 추악한 마력을 내 직접 확인하겠다.”
검날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세레나의 목줄기를 겨누는 일촉즉발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요란한 시스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금속의 촉감에 세레나의 척추가 바짝 긴장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목동맥이 끊어질 터였다. 전생에서 마감 직전 기획안을 통째로 날려 먹었을 때보다 더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세레나는 베테랑 K-직장인이었다. 진상 고객이 이성을 잃고 뺨을 때리려 들 때일수록, 목소리는 더 차분하고 상냥하게 내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탁하게 꺼졌다. 초점 없는 투명한 안광과 함께, 입꼬리가 기계 장치처럼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집행관님. 야간 순찰 업무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늦은 시간까지 제국의 치안 유지를 위해 초과 근무를 하고 계시는군요.”
하인리히의 붉은 눈동자가 가볍게 좁혀졌다.
보통의 영애들이라면 검날이 목에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거나 눈물을 흘려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방금 전까지 황태자와 밀회를 나누던 악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영혼이 아예 다른 세계로 출근해 버린 듯한 눈빛이었다.
“……두렵지 않은 건가? 이 검이 네 목덜미를 가르고 들어갈 수도 있다.”
“어머나, 고객님…… 아니, 집행관님. 공무 수행 중이신 분의 정당한 집행에 제가 어찌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다만, 제가 이단이라는 명확한 법적 증거와 상부의 공식 청구서, 그리고 결재 서류가 구비되어 있는지 먼저 확인해 주신다면 기꺼이 이 목을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세레나는 오히려 목을 조금 더 검날 쪽으로 바짝 밀착시켰다.
어차피 이단 집행관들은 명분 없이 귀족 영애를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은 사방이 아카데미의 이목으로 가득한 무도회 당일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허세를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에 닿아 있었다.
칼날이 살을 살짝 눌러 붉은 핏방울이 아주 미세하게 맺혔음에도, 세레나의 가식적인 미소는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 밑바닥에는 세상 모든 풍파를 통달한 듯한, 쓸쓸하면서도 초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가?’
하인리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세레나 에버하르트는 가문의 권력을 믿고 날뛰는 안하무인의 악녀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마치 세상에 그 어떤 미련도 남겨두지 않은 채 언제든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는 순교자 같았다. 황태자를 향해 지었던 그 다정한 미소조차, 실은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겹겹이 쌓아 올린 눈물겨운 방어벽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뇌리를 스쳤다.
하인리히의 단단한 손아귀에서 검자루가 미세하게 떨렸다.
[띠링!] [공략 대상: 하인리히 폰 아델하이트의 감정 상태를 분석합니다.] [강박적인 의구심 밑바닥에서 피어난 기묘한 동정심과 집착이 수치화됩니다.] [부채 수치: 80,000 Gold 상당] [자산을 즉시 흡수하시겠습니까? (Y/N)]
‘어라? 이 사람도 돈을 주네?’
세레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남주인공들은 아주 훌륭한 자본가들이었다. 목에 칼날 한 번 대어 주었다고 8만 골드라니, 전생의 야근 수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고효율 고소득 알바였다.
세레나는 지체 없이 머릿속으로 ‘Y’를 눌렀다.
[보유 자산: 38만 Gold]
하인리히는 칼날을 거두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가식적인 미소는 뭐지?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에버하르트 영애, 네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해도 네 눈빛에 서린 그 깊은 슬픔까지 숨길 수는 없다.”
“예? 슬픔이요?”
야근에 찌든 직장인의 안구 건조증을 슬픔으로 해석하다니, 이 사내의 문학적 상상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세레나는 기가 막혔지만, 비즈니스 파트너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기에 한층 더 애처롭고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집행관님께서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것 또한 제 미덕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제 어둠이 집행관님의 고결한 정의에 누를 끼쳤다면 사과드립니다. 부디 저 같은 미천한 존재는 잊으시고, 제국의 밝은 미래만을 수호해 주시옵소서.”
“세레나…… 너는 대체…….”
하인리히가 짓씹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사명감과 정체 모를 소유욕이 복잡하게 뒤엉켜 들끓었다.
이 여자의 위선 뒤에 숨겨진 그 진짜 얼굴을, 오직 자신만이 끄집어내어 구원하고 싶다는 왜곡된 충동이 그의 이성을 흔들었다.
하지만 세레나에게는 지금 퇴근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슬쩍 검날에서 목을 뒤로 빼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오늘 야근도 화이팅하시길 바라며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이 조금 으슬으슬한 것이, 퇴근…… 아니, 휴식이 필요한 듯해서요.”
“기다려라! 아직 내 심문은 끝나지 않았다!”
하인리히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세레나의 머릿속을 깰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위용오옹—!] [※ 경고: 급격한 자산 증식으로 인해 ‘호감도 불균형’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감정 부채 보유량 대비 탕감 활동이 전무합니다. 운명 보정력이 즉시 작동합니다.] [페널티 등급: 중(中) - ‘급성 마력 열병 및 신체 기능 일시 정지’가 청구됩니다.]
‘잠깐, 뭐라고?! 벌써?!’
세레나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며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커헉……!”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선혈이 툭, 투둑 떨어져 내렸다.
세레나는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보며 경악했다. 38만 골드의 대가가 고작 각혈이라니, 이 빌어먹을 장부의 이자율은 사채업자보다 더 사악했다.
“세레나?!”
하인리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쓰러지는 세레나의 어깨를 급히 붙잡아 안았다. 그의 손 끝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칼날을 겨누던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절박한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독인가? 아니면 마력이 폭주하는 건가! 정신 차려라, 에버하르트!”
그때, 테라스 모퉁이 너머에서 급박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냐!”
무도회장 쪽에서 세레나를 쫓아온 황태자 킬리안의 목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정원 입구 쪽에서는 세레나를 이단으로 몰기 위해 덫을 놓으려던 의붓동생 엘리제의 목소리까지 겹쳐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가 있는 곳에 왜 집행관님이…… 어머나! 피, 피가……!”
세레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혀를 찼다.
‘아니, 퇴근길이 왜 이렇게 험난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세레나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살기를 뿜어내는 집행관 하인리히,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황태자 킬리안과 사색이 된 엘리제까지.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충돌하는 순간, 세레나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