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물이 고인 진흙 바닥에서 쇠비린내가 풍겼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차가웠으나, 등 뒤를 짓누르는 포졸들의 가죽신 굽은 뼈가 아릴 정도로 무거웠다. 목덜미에 닿아 있는 시퍼런 칼날이 가늘게 떨릴 때마다 살죽이 쓸려 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군기시(軍器寺) 작역 노비 태오를 처하라!"

야장소 마당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감시루 위에서 붉은 철릭을 입은 군기시 판관 이명신이 판결문을 내던졌다. 바람을 탄 한지가 사방으로 찢겨 흩어졌다.

그의 발치에는 박살 난 조량포(趙亮砲)의 포신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불과 반 시진 전, 세자 향(珦)이 참관하는 가운데 거행된 시사(試射)에서 포신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화약을 장전하던 사수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의 잔해였다.

"조량포를 주조함에 있어 야금의 법도를 어기고 쇳물을 부실하게 다루어 조종조의 신기를 망치고 종묘에 누를 끼쳤으니, 이는 단순한 과실이 아니라 사직을 위태롭게 한 대역(大逆)의 죄다!"

이명신의 목소리는 추상 같았으나, 그의 눈빛은 기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포신이 터진 진짜 원인은 훈구파의 거두 김윤철 일파가 군기시에 납품한 황(S) 투성이의 불량 사철과 규격에 맞지 않는 조잡한 목탄 때문이었다. 야장소의 노비들은 그저 위에서 내려준 썩은 원료를 녹여 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높으신 분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을 제물이 필요했고, 그 칼끝은 가장 낮고 힘없는 군기시 노비 태오에게 향했다.

'이대로 목이 잘릴 순 없다.'

태오는 차디찬 진흙 바닥에 이마를 처박은 채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톱 밑으로 모래알이 파고들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국방과학연구소의 화포 제강 책임연구원으로 평생을 바쳤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겨우 조선 시대의 노비 몸뚱이에 빙의해 눈을 뜬 지 사흘째였다. 이 허망한 개죽음은 공학적 계산에 맞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갈라진 조량포의 파편을 향해 고정되었다.

파단면의 결정이 조잡하고 거칠었다. 탄소 함량이 비정상적으로 높고 냉각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백주철(White Cast Iron) 상태로 굳어버린 탓이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처럼 깨져나간 전형적인 취성 파괴였다.

'설계도가 필요하다.'

생존을 향한 갈망이 뇌리를 때린 순간, 척추를 타고 올라온 강렬한 전류가 전신을 관통했다.

아악!

태오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이 수천 개의 송곳으로 동시에 찔리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안구가 뒤집히고 사지가 잘게 떨렸다. 뇌막 깊은 곳에서 붉은 안개가 걷히며, 15세기 서유럽에서 태동하던 청동 대포의 정밀 주공법과 고열 제강 가마의 3차원 입체 도면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시공간을 초월해 미래와 타국의 물리적 기술을 인출하는 '역사적 설계도 침탈'의 권능이었다.

[1450년대 프랑스 아르비외(Arvieu) 공방의 청동포 주조 공정 및 청동 합금비: 구리 88%, 주석 12%] [도가니식 고온 간접 제련법의 가마 내부 기류 순환 설계도]

초록색 광선으로 짜인 격자무늬 도면들이 우뇌를 강타했다. 뇌신경 세포가 과부하로 타들어 가는 감각에 태오는 숨을 쉬지 못하고 상체를 뒤틀었다. 코끝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져 진흙을 적셨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으나, 이 도면들의 구성을 당장 조선의 조잡한 흙가마와 석탄 불순물 제어법으로 환원해내지 못하면 진짜 목이 잘린다.

"무엇 하느냐! 즉시 망나니로 하여금 저놈의 목을 베어 군기시 문루에 걸어라!"

이명신이 소리치며 손을 휘둘렀다. 망나니가 입에 머금었던 탁주를 칼날에 뿜어내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때, 야장소 구석에서 불그스레한 얼굴의 거구 하나가 포졸들의 제지를 뚫고 앞으로 기어 나왔다. 군기시의 우두머리 대장장이이자 태오를 거두어 주었던 야장 석두였다.

"나리! 살려주십시오! 태오 이놈은 그저 제 지시대로 흐르는 쇳물을 거푸집에 부었을 뿐입니다요! 주물 구멍을 뚫고 흙을 바른 것은 저인데, 어찌 이 어린놈에게 모든 죄를 씌우려 하십니까!"

석두의 굵은 눈물이 빗물과 섞여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는 이마에 피가 맺히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 무지몽매한 야장 놈이 어디서 감히 형장(刑場)을 어지럽히느냐! 저놈도 함께 묶어라!"

이명신의 호통에 포졸들이 창날을 들이밀었다. 석두의 우직한 어깨가 창날에 눌려 꺾였다.

태오는 피가 차오르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었다. 머릿속의 마비 증세를 악물고 누르며, 차갑고 명징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오직 법리적 인과관계만을 따지는 공학자의 목소리였다.

"판관 나리."

사방이 일순 조용해졌다. 죽음을 앞둔 노비의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또렷했기 때문이다. 이명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네놈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려는구나."

태오는 목을 짓누르는 칼날을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이명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선 국조(國朝)의 법률적 기틀이 된 경제육전(經濟六典) 공전(工典) 야장조(冶匠條)를 기억하십니까."

이명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일개 사노비도 아닌 군기시의 관노비 놈의 입에서 국가의 성문법전인 경제육전의 자구(字구)가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네, 네놈이 어찌 육전을 논한단 말이냐?"

"경제육전 속록(續錄) 형전(刑典) 결옥조(決獄條)에 이르기를, '관유(官有)의 기예를 다루는 장인과 노비가 공정의 하자를 스스로 밝히고, 국가에 이로운 새 법을 증명하고자 청할 때는, 감독 관청은 즉시 행형(行刑)을 멈추고 사흘에서 닷새의 기한을 주어 그 실효를 검증케 하라' 하였습니다. 이를 거부하고 사사로이 형을 집행하는 자는 장(杖) 일백 대와 유(流) 삼천리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현대 연구원 시절, 조선 시대 무기 제조법의 규제와 법률적 한계를 논문으로 쓰기 위해 세종조의 법전들을 샅샅이 외웠던 지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 무도한 놈이 어디서 유언비어를 지어내어 조정을 기만하느냐!"

이명신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싼 사헌부 감찰과 군기시의 다른 관원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조선은 철저한 법치와 대명률, 그리고 경제육전을 뼈대로 움직이는 관료 사회였다. 수많은 눈이 보는 앞에서 노비가 법조문을 직접 인용해 구명을 청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목을 벤다면, 훗날 사헌부의 탄핵을 피할 길이 없었다.

"사실이옵니다, 판관 나리."

조용히 지켜보던 사헌부 소속의 젊은 지평 하나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경제육전의 하급 장인 구명 조항은 태종조에 확립되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국법입니다. 만일 이 노비가 새로운 제강법으로 조량포의 결함을 보완하겠다고 청한다면, 기한을 주고 역검(役檢)을 행하는 것이 법도에 부합하옵니다."

이명신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군기시의 기술 독점권을 쥐고 흔드는 김윤철 대감의 사주를 받아 이 일을 서둘러 덮으려 했다. 그러나 법전의 자구를 들이밀며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노비와 사헌부의 눈초리 앞에서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좋다."

이명신이 이빨을 갈며 태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법대로 해주마. 허면 네놈에게 며칠의 기한을 주어야 쇳물을 제대로 다스려 신형 포를 주조하겠느냐? 설마 대포 한 문을 만드는 데 몇 달을 달라고 하진 않겠지?"

그것은 함정이었다. 대포 주조에는 거푸집 제작과 건조, 주조, 냉각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기한을 짧게 주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태오의 계산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나흘입니다."

"무엇이라? 나흘?"

이명신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야장 석두마저 경악하여 태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태오야! 미쳤느냐! 대포를 나흘 만에 어찌 만든단 말이냐! 거푸집 진흙을 말리는 데만 이레가 걸리거늘!"

태오는 석두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이명신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나흘이면 충분합니다. 나흘 안에 조선의 썩은 사철에서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고, 서양의 합금 기술을 능가하는 고순도 청동과 고온 정련탄을 만들어내겠습니다. 만일 약조한 기한 내에 조량포를 다시 주조하여 백 보 밖의 석벽을 관통하지 못한다면, 그 즉시 제 목을 베어 저 마당 구석에 던지셔도 이의가 없습니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태오의 눈빛에는 광기가 아닌, 극도로 냉철한 공학적 확신이 서려 있었다.

이명신은 입꼬리를 뒤틀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기한은 정확히 나흘이다. 나흘 뒤 이 자리에 세자 저하를 다시 모시고 시사를 거행할 것이다. 그때도 포신이 터지거나 석벽을 뚫지 못한다면, 네놈뿐만 아니라 야장소의 모든 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

"그렇게 하십시오."

태오가 결박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지가 저릿하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그의 발걸음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포졸들이 물러나고, 야장소 마당에는 굵어지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석두를 비롯한 열댓 명의 야장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태오가 그저 죽음을 나흘 연장하기 위해 미친 소리를 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태오야... 이제 어찌할 셈이냐? 정녕 나흘 만에 대포를 만든단 말이냐?"

석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오는 대답 대신 마당 한구석에 쌓여 있는 진흙 더미로 걸어갔다. 그리고 빗물에 젖은 진흙을 한 움큼 쥐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끈적한 흙탕물이 흘러내렸다.

어설픈 현대식 화학식이나 치트키는 통하지 않는다. 조선의 열악한 야장소에서 미래의 합금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장인들과 함께 진흙을 이겨 가마를 만들고 석탄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정밀한 공정부터 시작해야 했다.

"가마를 새로 지어야 합니다."

태오가 진흙을 바닥에 던지며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석두 아재는 야장소에 가두어 둔 목탄 중 손가락 굵기만 한 것들을 골라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황토와 고운 모래, 그리고 말똥(馬糞)을 긁어모으십시오. 당장 오늘 밤 안으로 야장소 뒤편에 높이 다섯 자짜리 토가마(土窯)를 구축할 것입니다."

야장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똥과 흙으로 가마를 짓는다는 것은 조선의 그 어떤 야금 서적에도 나오지 않는 기괴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모래의 이산화규소(SiO2)와 말똥의 섬유질을 배합해 고온에서도 균열이 가지 않는 초고온 도가니 가마를 만들기 위한 태오의 정밀한 조선식 번안 기술이었다.

태오가 거대한 진흙 기둥의 중심 뼈대를 세우기 위해 통나무를 진흙 구덩이에 꽂아 넣는 순간, 군기시 담장 너머 어두운 그늘 속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매서운 눈동자 하나가 가늘어졌다.

비단 자락을 살짝 움켜쥔 손길. 상단의 큰손이자 조정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예영이었다. 그녀는 태오의 거칠고 기이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법을 무기로 판관의 칼날을 멈추다니... 저놈은 필시 미쳤거나, 아니면 이 조선의 쇠붙이 지도를 통째로 뒤흔들 괴물이로구나."

그리고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 속으로, 조선의 군사적 운명을 바꿀 거대한 토가마의 불꽃이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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