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붕 처마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별안간 아득해진다.

백무린이 청명진의 꺾이지 않는 완강한 골격에 천천히 눈을 떴다. 손때 묻은 나무 국자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번져 나갔다. 빗방울이 허공에서 멈춘 듯한 착각이 드는 찰나, 그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객잔의 문턱을 넘어 섰다. 벼랑 아래 가파르게 자리 잡은 만화객잔의 앞마당으로 빗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장도를 비롯한 종남파 검수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그들의 어깨를 내리누르던 그 무형의 기도가, 저 남루한 삼베옷을 걸친 점소이의 발걸음 하나에 맞추어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장도의 목구멍에서 밭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검 자루를 쥔 손아귀에 핏줄이 터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낙뢰처럼 내리꽂히는 기세에 눌려 무릎을 꿇은 치욕보다, 눈앞의 사내가 풍기는 정체불명의 심연이 더 두려웠던 까닭이다.

백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빗속에 쓰러져 진흙을 삼키고 있는 청명진에게 머물러 있었다.

소년의 온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종남파의 검날에 찢긴 상처마다 붉은 선혈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의 손가락은 부러진 목검의 자루를 놓지 않은 채 움켜쥐고 있었다. 뼈대 속 깊이 박힌 그 고집스러운 도심(道心)이 백무린의 심장 가장자리를 건드렸다.

순간, 백무린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잠자던 심마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을 향한 연민이 싹트는 순간 오감이 멀어지고 진기가 뒤틀리는 불치(不治)의 형벌. 눈앞의 풍경이 두 갈래로 번지며 빗줄기가 기괴한 궤적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백무린은 어금니를 사려 물며 단전의 요동을 억누르고 냉혹한 이성을 끌어올렸다.

"만화객잔의 뜰에서는 사사로운 살생을 금한다 일렀거늘."

백무린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볍고 천박한 무림의 구어가 아닌, 대도의 이치를 담은 묵직한 서술이었다.

"이곳은 도(道)를 닦는 화산의 자락. 무도한 철붙이들로 산천의 영기를 더럽히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장도는 이가 시릴 정도의 굴욕감에 눈을 부릅떴다. 일개 변방 객잔의 점소이에게 기세로 눌려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종남파의 자존심에 용납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는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려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허장성세 부리지 마라! 일개 약쟁이 점소이 주제에 어디서 대도를 논하느냐! 죽여라! 저놈의 목을 쳐서 객잔의 대문에 걸어라!"

장도의 고함에 주춤거리던 종남파 검수 세 명이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쇄도했다. 그들의 검 끝에서 푸르스름한 검기가 뿜어 나와 장우(長雨)를 갈랐다.

종남파의 절예 중 하나인 '태을사상검(太乙四象劍)'의 초식이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빗줄기를 가르고 쏘아져 들어오는 검광은 실로 매섭고 화려했다. 검이 그리는 궤적마다 빗방울이 기화하여 자욱한 백색 안개를 만들어냈다.

"어리석구나."

백무린의 나직한 탄식이 빗속에 흩어졌다.

그는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검을 뽑지도 않았고, 기도를 폭발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오른손에 쥔, 때 절은 나무 국자를 가볍게 들어 올렸을 뿐이다.

첫 번째 검수가 백무린의 목덜미를 겨냥해 청풍(淸風)의 기세를 담아 검을 찔러왔다.

탁.

가벼운 마찰음이 일었다. 백무린이 국자의 둥근 머리 부분을 툭 까닥이자, 검수의 검 끝이 기묘한 각도로 꺾이며 허공을 허무하게 갈랐다. 검의 흐름을 지배하는 '인(引)'의 묘리였다. 자신의 검 초식이 어디로 흘러갔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검수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뜬 순간, 국자 자루가 그의 손목 관절을 정확히 타격했다.

콰드득!

"아악!"

손목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종남파의 보검이 진흙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좌우에서 쇄도하던 다른 두 검수의 검날이 백무린의 옆구리와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들의 검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했으나, 백무린의 눈에는 그저 조잡한 낙서에 불과했다.

백무린은 국자를 쥔 손목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칠언절구의 운율을 타듯, 부드럽고도 신속한 원(圓)의 궤적이 허공에 그려졌다. 국자 끝이 두 자루의 검날 측면을 차례로 스쳤다.

쩌어억!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객잔 마당을 가득 채웠다. 종남파의 검수들이 자랑하던 예리한 강철 검이, 단 한 번의 국자질에 수십 개의 조각으로 박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부서진 검 조각들이 빗줄기를 뚫고 지붕 기와와 바닥에 박혔다.

"이, 이게 무슨……!"

장도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종남파의 화려한 태을검로가, 단지 밥을 풀 때나 쓰는 나무 국자 하나의 움직임에 낱낱이 해체되고 부서졌다. 그것은 무학의 격(格)이 다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절대적인 격상 반격이었다.

백무린은 마지막 남은 장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진흙을 밟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사방의 빗소리가 잦아드는 듯한 기이한 정적이 일었다.

"종남의 검은 화려하나 뼈대가 없고, 기세는 드높으나 도(道)가 얕다. 남의 문파 영맥을 탐하기 전에 스스로의 내실을 닦았어야지."

"으아아악! 죽어라!"

장도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본명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 끝에 종남파의 정종 진기가 응집되며 날카로운 검강(劍罡)이 맺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공력을 쏟아부어 백무린의 미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익!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고막을 찔렀다. 그러나 백무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국자 자루 끝으로 장도가 내지른 검강의 중심을 꾹 눌렀을 뿐이다.

파스스스.

장도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검강이, 거품이 터지듯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커흑!"

장도는 단전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백무린이 내민 나무 국자 자루는 어느새 장도의 이마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국자 끝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장도의 전신 혈도를 옥죄었다.

"돌아가 전해라."

백무린의 목소리에는 살기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만물을 내려다보는 태산과 같은 고요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화산의 문턱을 다시 넘는 자는, 검이 아니라 목숨을 두고 가게 될 것이다."

국자 자루가 장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퍽!

"꺼져라."

그 가벼운 일격에 장도의 신형이 객잔 마당 바깥의 진흙 구덩이로 사정없이 날아가 처박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장도는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신음했다. 부하 검수들은 이미 혼비백산하여 부러진 검 자루를 쥔 채 장도를 부축해 빗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명문 정파의 기개는 온데간데없는, 그저 쫓기는 들개 무리에 불과했다.

사방에 다시 빗소리만이 가득 찼다.

백무린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심마가 또다시…….'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시각이 왜곡되었다. 빗줄기가 붉은 핏빛으로 번져 보이고, 사물의 윤곽이 수십 개로 쪼개져 흔들렸다. 정을 주지 말아야 하거늘, 청명진의 처절한 투지에 마음을 흔들린 대가였다. 백무린은 입안에 고이는 비릿한 혈담을 억지로 삼키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진흙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어가는 청명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린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청명진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끝을 통해 청명진의 맥을 짚는 순간, 백무린의 미간이 거칠게 찌푸려졌다.

청명진의 단전 안에서는 백무린이 설계해 흘려보낸 화산의 정종 진기가 요동치며 막힌 기혈을 뚫어내고 있었다. 기연의 씨앗이 발아하여 소년의 뼈대와 혈맥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소년은 화산의 잃어버린 자하신공을 복원할 천재로 거듭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청명진의 단전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음영 속에서, 기괴하고 사악한 기운이 숨을 쉬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차갑고도 날카로운, 얼음처럼 시린 마기(魔氣)였다.

'이것은…….'

백무린의 뇌리에 한 사내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천마신교의 책사이자 극독의 사마(邪魔)를 부리는 자, 사패천(沙覇天).

과거의 인연이 머릿속을 스치며 이 지독한 마기의 정체를 가리켰다. 사패천이 과거 청명진의 가문에 은밀히 심어놓았던 검은 마교의 씨앗, 즉 마태(魔胎)였다. 청명진이 무공을 익히고 강해질수록 단전 속의 마태 역시 함께 성장하여, 결국에는 소년의 영혼과 육신을 잠식해 마교의 완벽한 꼭두각시로 타락시킬 파멸의 쐐기였다.

백무린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마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하는 '겁경무량'의 인과를 더욱 깊이 엮어야만 했다. 타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야 하는 숭고하고도 잔혹한 굴레.

백무린은 청명진의 손목을 놓아주며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가 짊어져야 할 업보의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워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때, 진흙 바닥에 누워 있던 청명진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서서히 눈을 떴다.

"으, 윽……."

소년의 시선이 흐릿하게 흔들리다 이내 눈앞에 서 있는 백무린에게 멈추어 섰다.

청명진은 비몽사몽간에 보았다.

남루한 삼베옷을 입고 나무 국자를 쥔 사내의 등 뒤로,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검의 형상이 오버랩되는 것을. 그것은 만인을 도륙하고 천하를 평정했던 절대자의 기도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신(武神)의 잔영이었다.

눈앞의 점소이는 단순한 은거 기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도의 정점에 이른 전설적인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청명진의 눈에 서린 서슬 퍼런 독기가 흐려지고, 대신 깊은 갈망과 경외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화산을 일으켜 세우고 사형제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본능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청명진은 으스러진 무릎의 통증을 악물고 참아내며, 진흙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철벅.

빗물이 고인 바닥에 소년의 무릎이 닿으며 흙탕물이 튀었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매화검을 들어 올려 진흙 바닥 한가운데에 올곧게 꽂아 넣었다. 빗줄기가 검날을 타고 흘러내려 대지를 적셨다.

백무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살고 싶다면 당장 이 객잔을 떠나라. 화산의 망나니가 누울 자리는 여기 없다."

그러나 청명진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진흙 바닥에 깊숙이 처박았다.

쿵!

이마가 단단한 땅에 부딪히며 피와 진흙이 섞여 흘러내렸다. 소년의 목소리에는 가슴을 찢는 듯한 절박함과 꺾이지 않는 아집이 서려 있었다.

"화산파의 마지막 제자 청명진, 눈앞의 대협께 평생의 배움을 청합니다!"

세차게 쏟아지는 자우(滋雨) 속에서, 소년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백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는 이미 완전히 흐려져 청명진의 형체조차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가슴속 심마가 폭주하며 혈도가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제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태의 저주와 천벌의 무게가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빗속에 홀로 곧게 서 있는 매화검과, 그 아래 머리를 조아린 소년의 뼈대는 너무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무린은 천천히 나무 국자를 거두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이 인과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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