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落花)는 소리가 없다.
적막한 어둠이 내려앉은 화산(華山) 자락, 가파른 절벽 밑에 매달리듯 자리한 만화객잔(滿花客棧)의 처마 끝으로 탁한 빗방울이 낙하한다. 부서진 기와 틈새를 타고 흐르는 빗물은 이끼 낀 뜨락의 흙바닥을 검게 적실 뿐, 아무런 메아리도 남기지 않는다.
탁자 위에는 반쯤 비어 버린 죽엽청 병이 뒹굴고 있다. 때 절은 무명옷을 걸친 사내, 백무린은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잔에 남은 찌꺼기를 응시한다. 그의 손끝은 거칠고 투박하여 영락없는 삼류 객잔의 점소이에 불과하나, 잔잔하게 흔들리는 술 표면에는 미세한 진동조차 일지 않는다. 바람이 문풍지를 찢을 듯 불어닥쳐도 그의 주위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다.
"화산(華山)의 영기(靈氣)가 완전히 꺾였다더군."
객잔 구석, 땟물 흐르는 모피를 걸친 마차꾼 하나가 화로에 손을 녹이며 나직하게 침을 뱉는다. 그 건너편에 앉은 곰방대를 문 늙은 상인이 연기를 내뿜으며 맞장구를 친다.
"꺾인 지가 어디 하루 이틀인가. 마교와의 대전 이후로 맥이 끊겼지. 이제는 인근 종남파(終南派)가 화산의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든다더군. 지맥이 오염되어 매화나무가 죄다 말라 죽어가는데, 무슨 수로 버티겠나."
"쯧쯧, 한때는 천하제일의 정종무학이라 불리던 문파가 이제는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라니. 듣자 하니 대도제자라는 녀석 하나만 남아서 문파를 지키겠다고 발악을 한다는데, 그 꼴이 참으로 가관이라더군."
사내들의 거친 대화가 눅눅한 공기를 타고 백무린의 귓가에 닿는다.
무린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독주가 위장을 뜨겁게 지졌으나, 가슴속 깊은 곳에 묏자리처럼 가라앉은 응어리는 식지 않는다. 화산. 그 이름 두 글자가 머릿속에 일렁일 때마다, 과거 그가 중원을 피로 물들이며 쌓았던 살업(殺業)의 기억들이 망령처럼 고개를 든다.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오만으로 수많은 영웅의 목을 베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피의 대가로 얻은 것은 영광이 아닌, 심장을 갉아먹는 심마(心魔)와 오감이 마비되어 가는 저주뿐이다.
만화객잔의 마당 한구석에 서 있는 앙상한 매화나무는 잎사귀 하나 피우지 못한 채 썩어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무린 자신의 명줄이자, 몰락해 가는 화산의 자화상과도 같았다.
"어이, 점소이! 여기 술 한 병 더 가져오게나!"
마차꾼의 외침에 무린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걸음에는 무게가 없다. 바닥의 먼지조차 일지 않는 가벼운 소보(素步). 그러나 세인의 눈에는 그저 기운 없는 병자의 걸음걸이로 비칠 뿐이다.
"알겠소."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주방으로 향하는 찰나, 객잔의 두꺼운 목조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한다.
쿠우웅!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들이닥친 것은 피비린내였다.
"이곳에 숨었구나, 화산의 개새끼야."
가죽 장화를 신은 사내들이 어둠을 뚫고 객잔 안으로 난입한다. 청색 무복에 검은 가죽띠를 두른 이들, 종남파의 삼류 검수들이었다. 그들의 검날은 이미 차가운 빗물과 푸르스름한 뇌기(雷氣)로 젖어 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객잔 문간에 쓰러진 한 소년에게로 향했다.
청명진(靑明振).
화산파의 마지막 후기지수이자, 몰락한 문파의 자존심을 홀로 짊어진 독종. 그의 백색 무복은 이미 흙먼지와 붉은 선혈로 얼룩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오른팔은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고, 가슴팍에는 예리한 검날에 찢긴 자상이 깊게 패어 끊임없이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청명진은 부러진 목검을 왼손에 쥔 채,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탁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종남파 무사들을 꿰뚫어 볼 듯이 이글거리는 도심(道心)이 그 눈동자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화산의 지맥은... 너희 같은 도적놈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
청명진의 입술 사이로 걸쭉한 피가 흘러내렸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힘이 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종남파의 선두에 선 기수, 장도(張濤)가 비열한 소리로 웃어재꼈다.
"하하하! 도심이라니, 가당치도 않구나. 이미 네놈들의 자하신공은 실전되었고, 검법의 정수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거늘. 기껏해야 삼류 목검 하나 들고 대도를 논하느냐? 무릎을 꿇고 지적도를 바친다면 이 목숨만은 살려주마."
장도의 발이 청명진의 상처 입은 어깨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콰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객잔의 고요를 깨뜨렸다. 청명진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흙바닥에 얼굴이 처박히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과 섞여 진흙탕을 이루었다.
그러나 비명은 없었다. 청명진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킨 채, 진흙을 움켜쥐며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손가락 손톱이 뒤집어져 피가 솟구쳐도, 그의 시선은 오직 장도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화산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것은 아집이 아니었다. 멸문해 가는 가문을 홀로 버텨내기 위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채찍질해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처절한 도성이었다.
목로주점 구석에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백무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겁고 무거운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의 뼈대는 굳건하구나.'
동요였다. 수십 년간 죽은 듯 고요했던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타인을 향한 연민과, 꺾이지 않는 고결함에 대한 경외가 그의 내면을 흔들었다.
동시에, 백무린의 안구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오감마비의 심마. 감정이 일렁이는 순간 신체가 무너져 내리는 불치의 형벌이 작동한 것이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며 사물의 윤곽이 일그러졌다. 이명(耳鳴)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고, 단전의 진기가 폭주하여 전신의 혈도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피를 무린은 억지로 삼켰다.
'오냐, 천도(天道)가 나를 가둔다 한들.'
그는 눈을 감았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오직 그의 영혼만이 볼 수 있는 인과의 실타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겁경무량(劫境無量).**
우주의 인과율을 강제로 비틀어 타인의 운명을 투시하고 기연을 주입하는 신화적 비기. 무린의 뇌해 속에서 청명진의 무학적 한계와 운명선이 계산되기 시작했다.
[대상: 청명진] [골격: 천생검골(天生劍骨) - 극양(極陽)의 자질이나 경락이 막혀 있음] [운명: 금일 화산의 지맥 수호 실패 후 사망] [개입 강도: 극대(極大)]
무린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청명진의 가혹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적중하는 기연'을 설계하는 순간, 그 대가로 무린의 수명이 수년은 깎여 나갈 터였다. 전신의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심마가 뇌겁(雷氣)의 형상으로 그의 등 뒤를 압박했다.
그러나 무린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진기와 인과를 나누어 청명진의 막힌 경락을 뚫고, 실전된 화산의 진정한 심법을 그의 뇌리에 직접 역설계하여 주입하는 인과적 간섭을 감행했다.
'아이야, 네 도심이 정녕 부러지지 않는다면, 내 너에게 천하를 담을 그릇을 쥐여주마.'
쿠릉!
객잔 하늘 위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거대한 뇌성이 울렸다. 무린의 남은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며, 그의 내면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장도가 청명진의 부러진 목검을 짓밟으며 비웃음을 극대화했다.
"끝까지 눈을 부라리는구나. 그 쓸모없는 눈깔을 뽑아주마!"
장도의 검이 청명진의 안구를 향해 낙하하려던 찰나였다.
탁.
백무린이 들고 있던 나무 국자를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 아주 작은 소리가, 폭풍우 치는 밤하늘의 뇌성보다도 더 무겁게 객잔 안을 지배했다.
순간, 대기가 얼어붙었다.
객잔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습한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처럼 내려앉았다. 장도의 검 끝이 청명진의 눈앞 오 선지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장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그의 어깨 위로 수만 근의 바위가 내려앉은 듯한 가공할 위압감이 쏟아져 내렸다. 사방의 산천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무형의 기도(氣度). 그것은 일개 무인이 뿜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천지를 개벽하는 신(神)의 영역에 닿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위압이었다.
"커헉!"
옆에 서 있던 종남파 검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단단한 목판이 그들의 무릎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쩍쩍 갈라져 나갔다. 그들은 단 한 자루의 검도 보지 못했고, 단 한 줄기의 진기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공간을 지배하는 기세만으로 그들의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있었다.
장도는 이마에서 폭포수 같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목뼈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 끝에, 먼지투성이 무명옷을 입고 손때 묻은 국자를 쥔 채 서 있는 백무린의 실루엣이 걸렸다.
무린의 두 눈은 깊은 심연처럼 고요했으나, 그 안에는 만인을 도륙했던 천하제일인의 기광(氣光)이 서려 있었다.
"만화객잔에서는."
무린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칠언절구의 가락처럼 운율이 실린 고요하고도 중후한 음성이었다.
"피를 흘리는 것을 금한다."
그 한마디에 장도는 가슴을 쥐어짜며 선혈을 토해냈다.
푸훕!
바닥에 쓰러진 종남파 무인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무린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무린은 점소이가 아닌, 심연에서 걸어 나온 무신(武神) 그 자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박제되어 버렸다.
무린은 쓰러진 청명진을 내려다보았다.
청명진의 단전 깊은 곳에서, 무린이 심어 넣은 기연의 씨앗이 요동치며 막힌 혈도를 뚫어내고 있었다. 소년의 몸을 감싸고 있던 탁한 피가 기화하며 푸르스름한 매화의 향기가 미세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청명진의 단전 안쪽, 아주 깊은 음영 속에 무린조차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검은 씨앗 하나가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사악하고도 차가운 마교(魔敎)의 기운. 그것은 사패천이 심어둔 파멸의 씨앗이었다.
무린의 시각 왜곡이 한층 더 심해졌다. 심마의 대가로 사물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도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린은 손때 묻은 국자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객잔의 문턱을 넘어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더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