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현장을 가득 채우던 스태프들의 뜨거운 박수 소리가 귓가에서 일순간에 멀어졌다.
징—! 징—!
바지 주머니 속에서 심장박동처럼 울려 대는 진동. 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 위로 피처럼 붉은 경고창이 사정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머릿속 ‘연기 잔고 원장’의 가상 인터페이스가 망막을 강제로 찢고 들어와 붉은 경고등을 쏘아댔다.
[경고: 계약 대상자 ‘은소율’의 리스크 수치 폭등!] [위험도: 95% (사회적 타살 직전)]
화면을 쓸어내리자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한 헤드라인들이 도현의 눈동자에 차갑게 박혔다.
- [단독] 배우 은소율, 재벌 3세 스폰서십 및 신종 마약 파티 참석 의혹. - 스타더스트 측 “은소율의 사생활 통제 불능 상태… 함묵증은 수사 회피용 꼼수였나?”
“형,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방금 전까지 최고의 호흡을 맞추며 희열에 차 있던 강태오가 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현은 태오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태오야, 세트 정리되는 대로 바로 병원으로 가 있어. 한여름이랑 연락 끊기지 않게 단단히 묶어두고.”
“어? 형! 갑자기 어디 가는데!”
태오의 외침을 뒤로한 채, 도현은 대본 리딩실 안쪽 복도를 향해 폭풍처럼 질주했다. 머릿속 원장의 붉은 숫자가 95.1%, 95.2%로 소수점 단위까지 쪼개지며 실시간으로 치솟고 있었다. 백현석이 쳐놓은 덫의 톱니바퀴가 은소율의 목뼈를 부러뜨리기 위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
쿠르릉, 쾅!
하늘이 찢어질 듯한 뇌성이 강남경찰서 앞마당을 내리쳤다. 밤을 꼬박 새운 폭우가 아스팔트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새벽 3시 42분. 경찰서 유리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은소율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채 젖어 있는 머리칼, 초점 없는 눈동자, 그리고 핏기가 완전히 가셔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입술. 밤샘 조사를 받고 나온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경찰서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대여섯 명의 황색 언론 기자들이 우산을 집어 던진 채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플래시 불빛이 폭우를 뚫고 은소율의 얼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은소율 씨! 마약 투약 혐의 인정하십니까?” “침묵하시는 건 사실상 스폰서 루머를 인정하시는 건가요?” “입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함묵증이라는 게 정말 연기였습니까?”
질문이 아니라 칼날이었다. 은소율은 빗물에 젖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짓이기듯 막아섰다. 손톱이 살 속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목구멍이 납으로 가득 찬 것처럼 무거웠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공황 발작이 그녀의 폐부를 짓눌렀다.
그때, 거친 엔진음과 함께 검은색 대형 세단 한 대가 인도 턱을 불법으로 타고 넘으며 기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끼이익—!
물보라가 기자들의 바짓가랑이를 사정없이 적셨다. 기자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주춤하는 사이, 세단의 뒷좌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지독하리만큼 단단했다.
은소율이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차 시트 안쪽에서, 기괴할 정도로 형형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서도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소율은 홀린 듯 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타자마자 문이 쾅 닫혔고, 세단은 굉음을 내며 빗길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뒤편에서 기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카메라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붉은 테일램프는 빗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
차 안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와이퍼가 앞 유리를 긁는 소리만이 둔탁하게 울렸다.
은소율은 뒷좌석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가 맞부딪히는 딱딱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현은 그런 소율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의 ‘연기 잔고 원장’을 기동했다.
스륵.
눈앞에 오직 도현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푸른 장부가 펼쳐졌다.
[계약 대상자: 은소율 (상태: 극심한 공황, 선택적 함묵증, 사회적 타살 진행 중)] [보유 리스크: ‘스폰서 및 마약 공모 누명’ - 위험도 96%] [현재 가용 채권 잔액: 8,500 포인트]
도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백현석이 널 어떻게 요리할지 뻔히 알면서도 제 발로 호랑이 굴에 기어 들어간 이유가 뭐야.”
소율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대답하려 목에 힘을 주었지만, 켁켁거리는 쇳소리만 새어 나올 뿐 단 한 마디의 단어도 뱉지 못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새의 날개짓처럼, 그녀의 손가락 끝만 허공을 긁어댔다.
“말 안 해도 알아. 스타더스트가 기획한 덫에 네가 마약 공여자로 지목된 쓰레기 같은 새끼를 직접 만나러 갔겠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도현의 목소리에는 자비가 없었다. 가차 없이 현실을 발가벗겨 드러냈다.
“그 결과가 이거야. 넌 지금 마약 중독자에, 재벌의 노리개로 낙인찍혔어. 내일 아침이면 네가 찍은 모든 광고는 위약금 청구서로 돌아올 거고, 네가 출연하기로 했던 작품들은 전부 캐스팅 취소 통보를 보낼 거다. 백현석은 널 완벽하게 매장할 준비를 끝냈어.”
은소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머리를 감싸 쥐며 시트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절망이 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도현이 소율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려 강제로 눈을 맞추게 했다. 도현의 손가락 끝에 소율의 젖은 살결과 미세한 경련이 그대로 전해졌다.
“지옥에서 기어 나오고 싶다면, 네 허접한 자존심부터 버려.”
도현의 형형한 눈동자가 소율의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옭아맸다.
“내가 네 부채를 전부 사들이겠다.”
“……!”
“네가 짊어진 가짜 마약 혐의, 스폰서 오명, 그리고 네 목을 조르고 있는 그 지독한 함묵증의 대가까지. 몽땅 내 원장으로 병합 상계한다. 그러니까 넌 내밀어 준 손이나 잡아.”
도현은 허공에 손을 뻗어 장부의 계약서를 갱신했다.
[특수 조건 가동: 은소율의 법적 및 사회적 부채 일괄 인수] [인수율: 100%] [경고: 인수 시 대상자의 모든 트라우마와 실어증 리스크가 계약자 서도현에게 영구 잔존물로 누적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 순간이었다.
장부의 가장 깊은 구석, 회귀 직후 한여름과의 계약 체결 당시에는 회색빛으로 얼어붙어 있던 비활성화 아이콘 하나가 요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특수 연계 옵션 감지!] [‘싱크 공명 (Sync-Resonance)’ 옵션이 활성화 조건(복수의 계약 대상자 리스크 동시 보유 및 상호 합의)을 충족하였습니다.]
도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회귀 전에도 본 적 없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싱크 공명 (Sync-Resonance): 계약자가 인수한 대상자들의 연기적 재능과 감정의 파동을 하나로 결속합니다. 공명 발동 시, 현장의 모든 배우들이 서로의 호흡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증폭시키는 최고 단계의 ‘인터랙티브 앙상블’이 구현됩니다.]
도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거였다. 혼자 잘나가는 1인극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백현석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요한 진짜 무기.
“서명해, 은소율.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도현이 소율의 손을 잡아 허공의 반투명한 계약서 위로 이끌었다. 소율은 도현의 눈빛 속에 담긴 압도적인 확신과, 기이할 정도의 광기에 압도당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도현의 손등 위를 지그시 눌렀다.
[계약 체결 완료.] [은소율의 리스크 100% 인수 성공.] [‘싱크 공명’ 옵션 정식 개방.] [계약자의 정신 영역에 ‘실어증 및 극심한 불안 장애’ 잔존물 누적 시작.]
웅—!
도현의 뇌리를 강타하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목구멍이 일순간 턱 막히는 갑갑함이 찾아왔다. 말을 하려고 해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 지독한 공포. 은소율이 매일 밤 겪었을 그 지옥 같은 절망감이 도현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왔다.
도현은 어금니를 사정없이 깨물며 그 통증을 정면으로 받아내어 억눌렀다. 스스로를 좀먹는 완벽한 연기를 향한 강박증이, 역설적으로 그 고통을 통제하는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은소율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
소율이 가슴을 움켜쥐며 들이쉬던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동공이 굳건하게 고정되었다. 전신을 지배하던 비참한 도피성의 기운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안도가 아니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자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 직전의, 불멸의 복수귀 같은 집념 어린 눈빛이었다.
“서…… 도현 씨.”
완벽하게 돌아온 목소리. 맑고 청아하지만,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약속대로 나를 써요. 백현석의 목줄을 끊어버릴 수 있다면, 기꺼이 당신의 가장 날카로운 사냥개가 되어 줄 테니까.”
***
도현은 즉시 원장의 타임라인 추적 기능을 가동했다.
눈앞에 가상의 타임라인 그래프가 촘촘히 얽히며 은소율에게 마약을 건넸다고 주장하는 가짜 공여자의 정보가 텍스트로 치솟았다.
[가짜 공여자 신원 추적 완료] - 이름: 이진수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로드매니저 3년 차) - 특이사항: 3일 전 강남의 한 불법 유흥업소에서 백현석의 개인 계좌로부터 차명으로 1억 원 송금받은 정황 포착.
도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역시 백현석이야. 자기 밑에서 일하는 수하를 마약 공여자로 둔갑시켜서 널 엮어 넣었군.”
소율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진수…… 그 인간이 날 호텔로 불러냈어요. 대본 리딩 건으로 급히 전달할 서류가 있다면서. 차에 타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났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이미 경찰들이 들이닥친 뒤였죠.”
“흔한 셋업 범죄지. 하지만 백현석이 간과한 게 하나 있어.”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들이 설계한 판이 완벽할수록, 아주 작은 틈 하나로 전체가 무너진다는 걸 모른다는 거지.”
도현은 주머니 속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구형 폴더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과거 회귀 전, 스타더스트의 외압에 시달리던 SBC 방송국의 한 전임 스태프가 남겨두었던 결정적 단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SBC 제3대본 리딩실 감독석 하단 책상 보관함…….’
그곳 구석진 틈새에 스타더스트의 외압 가이드라인과 정관계 로비 리스트가 수록된 기밀 USB가 끼여 들어가 있을 터였다. 도현은 그 USB의 존재를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기자회견 당일, 방송국 내부를 장악하고 백현석의 숨통을 끊어버릴 최후의 카드가 될 것이었다.
또한, 도현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사냥개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타더스트의 뒤를 봐주며 은소율의 마약 루머를 최초로 선동해 퍼뜨린 삼류 황색 언론의 주필, 김태준 기자.
‘김태준. 네놈이 리딩실 취재진 틈바구니에서 나를 보며 비웃던 그 더러운 낯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원장의 탐지 능력을 활용해 조만간 김태준의 차명 계좌 거래 명세까지 모조리 털어낼 생각이었다. 준비는 차근차근, 그러나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은소율의 스마트폰 화면이 요란하게 켜졌다. 스타더스트 공식 홈페이지와 언론사 연합망을 통해 기습적인 공지가 내려왔다.
- [긴급 공지]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백현석 대표, 내일 오전 10시 ‘은소율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 및 영구 퇴출’ 생방송 기자회견 개최 예정.
소율의 얼굴이 다시금 굳어졌다.
“백현석이 움직였어요. 내일 오전 10시…… 저를 완전히 매장하고 기획사의 도덕성을 챙기려는 기습 기자회견이에요. 제가 참석하지 못하도록 이미 제 거처 주변에는 사설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어요. 절 철저히 고립시키겠다는 뜻이죠.”
백현석다운 악랄하고 신속한 일 처리였다. 여론이 은소율을 향해 돌을 던지는 지금, 생방송으로 그녀의 퇴출을 공식화해 확인사살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걸렸다.
도현이 소율의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겨주며, 나직하지만 뼈를 깎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
“그 회견장, 백현석이 독무대로 쓰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도현의 눈빛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내일 오전 10시. 백현석이 차려놓은 그 화려한 생방송 무대에, 우리가 대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