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규칙적이고 위압적으로 울려 퍼졌다.
SBC 제3대본 리딩실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걸어 들어온 남자는 단정하게 뒤로 넘긴 포마드 헤어 아래로 자애롭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 뒤로 감출 수 없는 독사 같은 안광을 빛내는 남자.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회귀 전 서도현의 삶을 송두리째 파멸로 몰고 갔던 백현석이었다.
“아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임 감독님. 우리 신인들이 오랜만의 리딩이라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서 격려차 들렀습니다.”
백현석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좌우로 늘어선 세 명의 경호원이 리딩실의 출구를 단단히 봉쇄하듯 막아섰다.
순식간에 리딩실 안의 온도가 급강하했다. 송 실장은 흙빛이던 얼굴색을 겨우 추스르며 백현석의 뒤로 헐레벌떡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고, 도현에게 영혼까지 털려 넋이 나가 있던 박민우는 구세주를 만난 듯 허리를빳빳이 세웠다.
도현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오른손의 손톱을 손바닥 살 속으로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와 뇌를 때렸다.
두근, 두근.
귓가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회귀 전, 저 부드러운 미소 뒤에서 자신을 쓰레기처럼 가스라이팅하며 ‘너는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발연기 천재일 뿐이야’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긁었다. 전신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도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에 기괴할 정도로 형형한 푸른 안광이 서서히 차올랐다.
백현석이 임 감독의 어깨를 친근하게 짚으며 부드럽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임 감독님, 대본을 잠깐 봤는데 말입니다. 우리 민우가 맡은 ‘강우’ 역은 감정의 진폭이 아주 크고 섬세한 캐릭터잖아요? 기획사 차원에서도 이번 작품에 사활을 걸고 전폭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으려 하는데…….”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테이블 구석의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눈길에는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과, 감히 내 영역에서 짖어대는 하찮은 존재를 향한 실소가 담겨 있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족보도 없는 신인이 리딩실 분위기를 이렇게 흐려놓아서야 원. 임 감독님, 작품의 격을 생각하셔야죠. 아무리 캐스팅이 난항이라도 이런 검증되지 않은 아이를 링 위에 올리면, 현장이 피곤해집니다. 안 그렇습니까?”
노골적인 외압이었다. 대주주이자 스타더스트라는 거대 공룡의 수장이 뱉은 말은 감독에게 단순한 조언이 아닌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임 감독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존심 강한 중견 연출가인 그조차도 대형 기획사 대표의 직접적인 압박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 수밖에 없었다.
백현석은 도현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과거 도현의 영혼을 갉아먹던 그 특유의 다정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다.
“도현아. 네가 연기 욕심이 있는 건 알겠는데, 아직 업계 생리를 몰라서 그래. 네가 여기서 이렇게 억지를 쓴다고 해서 대중이 널 알아줄 것 같니? 주제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몸만 상하는 법이란다. 얼른 짐 싸서 나가렴. 감독님들 시간 뺏지 말고.”
그의 손이 도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볍지만 무거운 낙인처럼 짓누르는 손길.
[※ 경고: 대상 ‘백현석’의 언어적 억압으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 수치 상승.] [※ 연기 잔고 원장 작동 상태 점검…….] - '싱크 공명 (Sync-Resonance)' 특수 연계 옵션: 비활성화 (조건 미충족: 동료 강태오와의 깊은 정서적 교감 필요)
도현의 귓가에 시스템 음이 경고하듯 울렸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비틀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망치지 않는다.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 그 지옥 같은 과거로 회귀하는 꼴이 될 뿐이었다.
“주제라…….”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쓸며 기괴한 마찰음을 냈다. 도현의 시선이 백현석의 눈동자에 정면으로 내리꽂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서슬 퍼렇고 날카로웠던지, 백현석을 호위하던 보디가드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설 정도였다.
“백 대표님.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그 ‘주제’라는 게 뭔지, 제가 직접 연기로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백현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제 앞에서 허리를 깳빳이 세우고 대꾸하는 신인은 지난 10년간 단 한 명도 없었다.
도현은 대본을 거칠게 낚아챘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서 거대한 시나리오 콘티가 실시간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 [SCENE #24. 제3대본 리딩실 - 내부 (현재)] - 인물: 강우 (서도현 분), 포식자 (백현석 분) - 카메라: 도현의 타오르는 눈동자 타이트 바스트 샷에서 시작해, 점차 백현석의 오만한 얼굴을 로우 앵글로 포착. - 지시: 강우는 자신을 옥죄는 보이지 않는 사슬을 온몸의 근육을 뒤틀어 찢어발기듯, 절규가 아닌 억눌린 피울음으로 대사를 뱉는다. --------------------------------------------------
도현이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종이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리딩실의 침묵을 깨웠다. 도현의 호흡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백현석의 억압에 떨던 신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빛이 극중 인물 ‘강우’의 분노와 슬픔으로 완전히 전이되었다. 그것은 대기업의 횡포에 모든 것을 잃고 노예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청년의 영혼 그 자체였다.
“...이 대본의 24페이지를 보십시오, 백 대표님.”
도현의 목소리가 리딩실 사방의 벽을 울리며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내 몸뚱이를 사 가면서, 내 영혼까지 덤으로 달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내가 흘리는 피 맛이 그렇게 달콤합니까? 당신들이 지어 보이는 그 자애로운 미소 뒤에 숨겨진 송곳니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대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임 감독과 작가진은 숨을 들이켰다.
도현의 목소리는 단순히 대본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현석이 소속 배우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가스라이팅하고, 약점을 잡아 파멸로 이끌던 그 추악한 계약 방식을 실시간으로 저격하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도현은 백현석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리딩실의 공기가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당신은 나한테 말했지. 나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길거리의 개처럼 굶어 죽어갈 때 손을 내밀어 준 게 누구냐고.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
도현이 백현석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에 돋아난 핏대가 터질 듯이 요동쳤다. 백현석의 미소가 완전히 굳어버렸다.
“‘날 개로 만든 건 바로 당신이야. 그리고 그 개가 사슬을 끊는 날, 가장 먼저 물어뜯을 목덜미 역시…… 당신의 목덜미가 될 거니까.’”
마지막 대사를 뱉어내는 순간, 도현은 손을 뻗어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던 백현석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탁-!
건조하고 날카로운 타격음이 리딩실을 강타했다.
리딩실 안의 그 누구도 숨을 쉬지 못했다. 백현석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롭던 가면이 완전히 조각나 흘러내렸다. 신인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자신을 정확히 관통하는 서슬 푸른 살기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컷……!”
임 감독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손은 이미 대본을 쥔 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완벽해. 완벽한 강우야.”
임 감독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작가진 역시 펜을 쥔 손을 멈추고 넋을 잃은 표정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스타더스트의 외압에 눈치를 보던 감독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거대 기획사의 자본력보다 앞선 순간이었다.
“백 대표님. 죄송하지만 이번 배역은 제가 결정합니다.”
임 감독이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책상 위의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박민우 군의 연기도 좋았지만, 방금 서도현 군이 보여준 연기는 이 대본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강우 역은 서도현으로 가겠습니다. 이건 연출가로서의 제 타협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쾅-!
임 감독이 서도현의 이름이 적힌 공식 배역 확정서 위에 붉은색 결재 도장을 거칠게 찍어 눌렀다.
[※ 연기 잔고 원장 알림] - SBC 신작 드라마 주연급 조연 ‘강우’ 役 공식 탈환 완료. - 대상 ‘백현석’의 외압 방어 성공 및 현장 지배력 95% 달성. - 획득 마일리지: +3,000p (누적 마일리지: 4,200p) - 최초의 미시 보상: 배역 확정서 획득 성공.
머릿속에 울리는 시스템의 쾌청한 종소리와 함께, 도현은 테이블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 임 감독이 서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스태프의 가방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 툭 떨어져, 감독석 하단 책상 보관함의 벌어진 틈새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도현의 뛰어난 감각이 그것을 포착했다. 그것은 전임 스태프가 실수로 떨어뜨린 소형 USB였다.
‘저건…….’
도현의 뇌리에 회귀 전 기억이 스쳤다. 스타더스트가 방송사 내부 스태프들을 매수하고 외압을 행사할 때 사용했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리스트가 담긴 결정적 증거 USB.
그것이 지금 제3대본 리딩실 구석, 아무도 보지 못하는 서랍 고정 틈새 사이에 완벽하게 끼여 들어간 것이다.
도현은 표정을 숨기며 슬며시 발끝으로 그 틈새를 가려두었다. 나중에 백현석을 완벽하게 무너뜨릴 때 쓸 무기가 바로 저기 숨겨져 있었다.
백현석의 얼굴은 분노로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일개 신인 찌끄레기에게 이토록 처참하게 연기력으로 짓눌리고, 감독에게 거절당하는 굴욕을 맛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임 감독님. 후회하실 겁니다.”
백현석이 이를 갈며 차갑게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현을 쏘아보았다.
그는 도현에게 다가와 귓가에 대고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재밌네, 서도현. 아주 영악한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왔어. 하지만 명심해라. 그 건방진 목이 언제까지 빳빳하게 서 있을 수 있을지, 내가 똑똑히 지켜봐 주마. 촬영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넌 지옥을 보게 될 거야.”
백현석이 몸을 돌려 리딩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송 실장과 박민우가 그 뒤를 헐레벌떡 쫓아갔다.
도현은 멀어져 가는 백현석의 넓은 등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눈앞에 다시 한번 연기 잔고 원장의 흐릿한 청색 창이 떠올랐다. 도현은 마음속으로 원장의 붉은 인장을 들어 백현석의 이름 위에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 특수 기능 작동: ‘파멸 예약 낙인 (Doom Brand)’] - 대상: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백현석’ - 상태: 낙인 부여 완료. 대상의 몰락 시나리오가 원장에 기록됩니다. - 잔여 시간: 몰락까지 앞으로 31일.
도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과연 누구일까.
도현은 손에 쥔 배역 확정서를 꽉 움켜쥐었다. 종이의빳빳한 감각이 손바닥의 핏자국과 섞여 묘한 전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겨우 첫걸음이었다. 백현석이 만든 거대하고 추악한 왕국을 연기력 하나로 가루로 만들어버릴 진짜 복수극이, 이제 막 서막을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