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척추를 타고 올라온 한여름의 공포심이 가슴뼈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기도가 좁아지며 비린 숨이 목구멍 끝에서 턱턱 걸렸다. 이것은 도현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연기 잔고 원장을 통해 강제로 동기화된, 한여름이라는 인간이 평생을 안고 살아온 지독한 과호흡과 급성 공황의 잔재였다.

머릿속이 핑핑 돌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 경고: 리스크 인수 싱크율 45% 돌파.] [대상자 ‘한여름’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영구 잔존물로 누적됩니다.]

눈앞에 명조체로 차갑게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도현의 망막을 찔렀다. 잔고 원장의 푸른 빛줄기 너머, 우측 하단 구석에 비활성화된 상태로 붉게 깜빡이는 글자가 보였다.

['싱크 공명(Sync-Resonance)' - 잠금 상태 (조건 미충족)]

지금은 저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도현은 어금니를 짓씹었다. 송곳니가 잇몸을 파고들어 짠 피 맛이 혀끝을 적셨다. 그 비릿한 감각이 겨우 도현의 흐려지던 정신줄을 붙잡아 세웠다.

“야, 서도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뭘 한 거야!”

송 실장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며 도현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도현의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쁘게 헐떡이던 한여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도현의 셔츠 깃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톱이 하얗게 질릴 정도의 악력이었다.

“하아…… 흑, 흐으……”

한여름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던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서서히 도현의 서늘한 눈빛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절벽 끝에서 유일한 밧줄을 발견한 짐승 같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여름아! 정신이 들어? 야, 구급차 불러!”

송 실장이 소리쳤지만, 한여름은 그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한 채 도현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호흡은 기적처럼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도현이 그녀의 공포 절반을 자신의 영혼으로 받아내어 짊어진 덕분이었다.

도현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질식감을 억누르며, 한여름의 귀에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앉아. 그리고 대본만 봐.”

한여름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그녀는 도현의 눈동자에 서린 기괴할 정도의 형형한 안광을 마주하고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대본 표지를 넘겼다.

“어수선하군. 정리들 안 합니까?”

리딩실 헤드 테이블 상석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SBC 수목 미니시리즈 <차가운 도시의 밤>의 연출을 맡은 임 감독이었다. 그는 뿔테 안경 너머로 찌푸린 눈을 한 채,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옆에는 대본을 꽉 움켜쥔 정 작가가 신경질적으로 볼펜을 딸깍거리고 있었다.

“한여름 씨, 대본 리딩 진행할 수 있겠어? 시작도 안 했는데 쓰러질 정도로 몸 관리가 안 된다면, 지금이라도 캐스팅 재고해야 해. 우리 일주일 뒤에 첫 촬영이야.”

임 감독의 냉혹한 경고에 리딩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스타더스트의 송 실장이 급히 허리를 굽히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감독님! 당연히 가능합니다. 여름이가 요즘 스케줄이 좀 겹쳐서 일시적으로 빈혈이 온 모양입니다. 야, 여름아. 얼른 대답 안 드리고 뭐 해?”

한여름은 마른침을 삼키며 임 감독을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좋아. 그럼 더는 시간 지체하지 말고 바로 리딩 시작합시다. 신 15부터 들어갑니다.”

임 감독이 대본을 탁 덮으며 신호를 보냈다.

도현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가슴속을 지옥처럼 긁어대며 타오르는 우울감과 불안증이 뇌하수체를 사정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따끔거렸지만, 도현은 이 자해적인 고통을 오히려 연기의 연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회귀 전, 가스라이팅 속에서 스스로를 좀먹으며 연기했던 그 지독한 감각이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있었다.

“신 15. 한강 둔치.”

SBC 보조 작가가 격앙된 목소리로 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번 씬은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비밀을 쥔 형사 ‘강우’와, 거대 기업의 비리를 은폐하려는 하수인 ‘석태’가 대립하는 장면이었다. ‘석태’ 역은 스타더스트가 막대한 자본과 외압으로 밀어 넣은 신인 배우, 박민우의 배역이었다. 대본상 도현이 맡은 ‘강우’에게 박민우가 모욕을 주며 압박하는 중요한 감정 씬이었다.

박민우가 목을 가볍게 풀더니, 삐딱한 자세로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 끝에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리딩실 구석에 앉은 무명 신인인 도현을 완전히 무시하는 눈빛이었다.

“야. 강우.”

박민우가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네가 여기서 아무리 날뛰어 봤자, 윗선에서는 네 목줄 하나 끊는 거 일도 아니야. 그냥 기어. 그게 네가 살길이니까.”

국어책을 읽는 듯한 건조한 톤이었다. 억양은 평평했고, 목소리에는 어떠한 인물의 고뇌나 위압감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대본에 적힌 글자를 입 밖으로 뱉어내는 것에 급급한 발연기였다. 그저 스타더스트라는 거대 기획사의 백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임하는 성의 없는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임 감독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으나, 뒤에 버티고 선 송 실장의 눈치를 보며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도현은 박민우의 그 어리숙한 대사 처리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보통의 배우라면 상대의 성의 없는 발연기에 감정이 죽어버려 자신의 페이스까지 잃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달랐다. 한여름에게서 인수한 극대화된 감수성이 장부 버프 형태로 도현의 가슴속에서 우렁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연기 잔고 원장’의 수치가 도현의 시야를 메웠다.

[보유 재능: ‘한여름의 잔혹한 감수성’ 활성화.] [인터랙티브 리액션 배율: 250% 적용.]

도현의 눈빛이 기괴할 정도로 형형하게 변했다. 그는 대본을 보지 않았다. 오직 박민우의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도현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기도를 타고 들어오는 거친 호흡음이 리딩실의 건조한 마이크를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

도현은 곧바로 대사를 치지 않았다. 단 3초간의 정적.

하지만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도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고, 그의 주먹 쥔 손등에 푸른 힘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와, 그 분노를 억누르는 형사의 처절한 인내심이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반응만으로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리딩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에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박민우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도현의 살기 어린 안광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도현의 입술이 열렸다.

“윗선?”

낮고,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듯한 슬픔과,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맹수의 집요함이 실려 있었다.

“그 윗선이 누구를 말하는 건데. 내 동료들 목숨을 파리로 아는 그 대단하신 분들?”

도현은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숙였다. 박민우와의 거리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과 1미터 남짓. 도현의 시선이 박민우의 목덜미를 꿰뚫을 듯이 꽂혔다.

“너, 그 사람들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도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지며 비릿한 실소를 흘렸다.

“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버릴 꼬리가 누군지 알아? 바로 너야, 이 개자식아.”

“……!”

박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대본에 적힌 지문은 단순한 ‘분노하며 대꾸한다’였다. 하지만 도현은 단순한 미형 연기를 펼치지 않았다. 상대방의 어설픈 연기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그의 호흡 자체를 낚아채고 뒤흔드는 즉흥 ‘인터랙티브 리액션’을 폭발시킨 것이다.

박민우는 다음 대사를 쳐야 했다. 그의 대본에는 ‘비웃으며 받아친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박민우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도현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과, 한여름의 공포심에서 비롯된 그 기괴할 정도의 감정 덩어리가 그의 목구멍을 꽉 막아버렸다.

“어…… 그러니까, 네가…….”

박민우의 목소리가 꼴사납게 갈라졌다. 그는 대본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지만, 이미 하얗게 머릿속이 비어버린 상태였다. 손가락이 덜덜 떨리며 대본 페이지를 갈팡질팡 헤맸다.

“어, 어……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완벽하게 대사를 절었다.

리딩실 내부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 속에서, 박민우의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비참할 정도로 초라하게 울려 퍼졌다.

임 감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대본이 아닌, 서도현이라는 무명 배우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 작가는 들고 있던 볼펜의 딸깍거림을 멈춘 채, 입을 벌리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박민우의 무너진 호흡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파고들었다.

“대답해.”

도현이 낮게 읊조렸다. 대본에는 없는 애드리브였다. 하지만 극의 흐름상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타이밍의 대사였다.

“네 주인이 누구냐고 묻잖아.”

박민우는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의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끽,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완벽한 패배였다. 신인 배우의 호흡을 날카로운 연기 리액션만으로 완전히 짓눌러 발가벗겨 버린 것이다.

[※ 연기 잔고 원장 변동 알림] - 대상자 ‘박민우’의 연기 호흡 완벽 제압. - 현장 점유율: 78% 돌파. - 획득 마일리지: +1,200p

도현의 머릿속에 울리는 시스템의 수치적 증명과 동시에, 테이블 저편에 배석해 있던 보조 작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전율이 일어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대본 여백에 볼펜을 꾹꾹 눌러쓰기 시작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대본 여백에는 이번 작품의 캐스팅 후보 중 가장 구석에 밀려나 있던 이름이 가장 큰 폰트로 메모되었다.

[강우 役 - 서도현 (★독보적, 감정선 장악력 최고)]

송 실장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공을 들여 메인 조연으로 꽂아 넣은 박민우가, 이름도 없던 서도현이라는 신인에게 리딩실 한가운데에서 영혼까지 털려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송 실장이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콰아앙-!

SBC 제3대본 리딩실의 무거운 뒷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혔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리딩실 내부의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칼같이 차려입은 덩치 큰 보디가드 세 명이 먼저 안으로 걸어 들어와 좌우로 늘어섰다. 그리고 그들의 삼엄한 호위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뒤로 넘긴 포마드 헤어, 입가에 걸린 자애롭고 온화한 미소. 그러나 그 미소 뒤로 감출 수 없는 독사 같은 안광을 빛내는 남자.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회귀 전 도현의 삶을 송두리째 파멸로 몰고 갔던 만악의 근원.

백현석이었다.

백현석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리딩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소리가 규칙적이고 위압적으로 울려 퍼졌다.

“아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임 감독님. 우리 신인들이 오랜만의 리딩이라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서 격려차 들렀습니다.”

백현석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리딩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그는 당황해하는 임 감독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이블 구석에 앉아 있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것은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싸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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