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걱정하지 마.”

빗물이 차창을 때려대는 격렬한 소음 속에서도, 도현의 목소리는 은소율의 귓가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도현은 가만히 손을 뻗어 소율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차가운 빗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이 걷히자, 공포와 억울함으로 얼룩진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현의 입가에 얇고 살벌한 미소가 호선을 그렸다.

“그 회견장, 백현석이 독무대로 쓰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도현 씨.”

“내일 오전 10시. 백현석이 차려놓은 그 화려한 생방송 무대에, 우리가 대신 오른다.”

소율의 밭은 숨소리가 좁은 차 안을 채웠다. 도현의 형형한 눈빛은 이미 눈앞의 절망 너머, 백현석의 목을 죄어버릴 거대한 단두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사흘 뒤, 오전 9시 30분.

하늘은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씻은 듯이 맑았지만, 여의도 SBC 방송국 본관 로비의 공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은소율 마약 스캔들 및 영구 퇴출 공식 기자회견.’

SBC 대강당 프레스센터로 향하는 길목은 그야말로 삼벌대의 철조망처럼 삼엄했다.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고용한 검은 양복의 사설 경호원 수십 명이 로비 입구부터 계단, 엘리베이터 앞까지 겹겹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허가받은 비표를 목에 걸지 않은 이들은 기자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밀려 나갔다.

“뒤로 물러서세요! 스타더스트 소속 기자단 외에는 출입 금지입니다!”

귀를 찢는 고성과 카메라 플래시의 세례 속에서, 로비 회전문을 통과해 걸어 들어오는 네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서도현. 그의 좌우에는 한여름과 강태오가, 그리고 바로 뒤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은소율이 서 있었다.

그들이 로비 대리석 바닥을 밟는 순간, 기묘한 고요가 일대를 지배했다. 4명의 배우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기가 아니라, 수많은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배우 특유의 극적인 ‘성역(聖域)’이었다.

도현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턱을 살짝 치켜올린 채, 마치 시상식 레드카펫을 밟듯 당당하고 우아하게 전진했다. 그의 곁을 지키는 강태오는 어깨를 떡 벌린 채 야수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쏘아보았고, 한여름은 도현의 옷자락을 가볍게 쥔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어? 저기 서도현 아니야?” “옆에는 한여름이랑 강태오잖아! 은소율도 있어!”

기자들이 술렁이며 카메라 렌즈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 조장과 하수인 대여섯 명이 그들의 앞을 험악하게 가로막았다.

“여기는 사적인 구역입니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경호 조장의 서늘한 목소리에는 실질적인 완력의 위협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들이 도현의 앞을 벽처럼 에워쌌다.

태오가 이빨을 드러내며 한 걸음 나서려 하자, 도현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현은 경호 조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동공이 기괴할 정도로 팽팽하게 수축하며,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회귀 전, 수십 년간 바닥에서 구르며 뼈에 새겼던 정밀한 ‘바디 랭귀지 액팅’의 정수였다.

도현은 몸의 중심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며 어깨의 힘을 뺐다. 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를 완전히 무력하다고 규정하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자세였다. 도현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심장을 짓누르는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비켜.”

단 두 글자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형언할 수 없는 무게감에 경호 조장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맹수와 맞닥뜨린 초식동물처럼, 조장의 발끝이 움찔하며 뒤로 밀려났다.

그때였다. 도현의 시야 속에서 투명한 푸른빛의 ‘연기 잔고 원장’ 장부가 반공중에 떠올랐다.

[!] 경고: 계약자들과의 감정적 싱크율이 급격히 상승 중입니다. [!] 미회수 특수 옵션 감지: 한여름과의 계약 구석에 잠들어 있던 ‘싱크 공명(Sync-Resonance)’ 옵션이 활성화 조건(동료들과 생사를 건 무대에 동시 진입)을 충족했습니다.

‘싱크 공명…….’

도현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뇌리를 찌르는 듯한 한여름의 불안과 공황, 강태오의 억눌린 분노, 은소율의 억울함과 슬픔이 도현의 영혼 속으로 무섭게 흘러들어와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트라우마가 뇌세포를 좀먹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도현은 이를 악물고 그 왜곡된 감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연기 잔고’로 치환했다.

우웅—!

도현의 몸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공기의 파동이 퍼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도현과 여름, 태오, 소율의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네 명의 배우가 뿜어내는 상호작용의 에너지가 로비 전체의 공기를 완벽하게 지배했다.

“어, 어……?”

경호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춤주춤 길을 터주었다. 단순한 무력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연극 무대로 바꾸어버리는 배우들의 광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가자.”

도현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그들의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경호원들은 감히 손을 뻗어 그들을 잡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프레스센터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도현은 2층 버튼 대신 3층 버튼을 눌렀다.

“도현 씨, 프레스센터는 2층 대강당인데요?” 여름이 의아한 듯 도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도현과 연결된 싱크 공명 덕분인지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백현석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어놓을 무기를 챙겨야 하거든.”

도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도현은 망설임 없이 복도 끝에 있는 ‘SBC 제3대본 리딩실’로 향했다. 10년 전, 그가 회귀하여 처음으로 눈을 떴던 바로 그 약육강식의 전장이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불이 꺼진 리딩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건조하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도현은 곧장 감독석으로 걸어가 그 하단에 놓인 낡은 우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과거 회귀 전, 스타더스트의 외압에 못 이겨 고통스러워하던 한 전임 스태프가 술에 취해 중얼거렸던 기억이 도현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새끼들이 나한테 보낸 협박 문건이랑 로비 장부 복사본…… 리딩실 감독석 책상 밑 틈새에 숨겨놨어. 방송국 놈들도 다 한패라 어디 둘 데가 없더라고…….’

도현은 무릎을 꿇고 책상 하단 보관함 구석의 틈새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거칠고 갈라진 나무 틈새를 더듬던 손끝에, 딱딱하고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각이 걸렸다.

드득.

도현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틈새를 벌리자,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검은색 USB 하나가 툭 떨어졌다.

[SBC 제3대본 리딩실 감독석 하단 책상 보관함의 비밀 USB를 획득하셨습니다.] [복선 ‘스타더스트 외압 가이드라인 수록 USB’가 회수되었습니다.]

도현은 USB를 손에 쥐고 가볍게 털어냈다. 이 안에는 스타더스트가 SBC 방송국 간부들에게 건넨 정관계 로비 리스트와, 은소율을 비롯한 소속 배우들의 캐스팅을 강제로 제한하고 여론을 조작하라고 지시한 구체적인 외압 가이드라인이 들어 있었다. 백현석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아킬레스건이었다.

“찾았다.”

도현이 USB를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서자, 문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태오가 씩 웃었다.

“형씨, 진짜 별걸 다 알고 있네. 스파이라도 심어둔 거야?”

“비슷한 거지. 이제 사냥하러 가자.”

도현의 지시에 네 사람은 일제히 몸을 돌려 프레스센터가 있는 2층으로 향했다.

***

오전 9시 55분. SBC 대강당 프레스센터.

수백 명의 취재진이 빼곡하게 들어찬 기자회견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단상 위에는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의 백현석 대표가 깔끔한 네이비 수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슬픔과 고뇌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승자의 여유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삼류 황색 언론의 주필 김태준 기자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은소율은 오늘로 끝이다. 백 대표님이 던져준 소스대로 기사만 쓰면 내 통장에 또 몇 천이 꽂히겠지.’

김태준은 도현을 짓밟아버릴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지난번 리딩실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도현의 건방진 눈빛을 떠올리며, 그는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리 날뛰어봤자 거대 기획사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오늘 똑똑히 보여줄 터였다.

백현석이 단상 마이크 앞에 서서 짐짓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저, 본사 소속 배우 은소율 양의 불미스러운 사태로 인해 많은 국민 여러분과 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저희 스타더스트는 도덕적 책임감을 통감하며, 오늘부로 은소율 양과의 전속 계약을 해지하고 연예계에서 영구 퇴출할 것을……”

“그 퇴출, 누가 결정한 겁니까?”

쾅—!

프레스센터의 거대한 이중문이 박살 날 듯이 열리며, 단호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회견장을 갈랐다.

모든 기자의 시선이 일제히 뒤쪽으로 쏠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서도현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한여름, 강태오, 그리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차가운 얼굴을 드러낸 은소율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서도현?! 은소율?!” “아니, 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야?!”

기자회견장은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듯 발칵 뒤집혔다.

단상 위에 서 있던 백현석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의 온화한 가면 뒤로 뱀 같은 살기가 스쳤지만, 이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았다.

“도현 군, 그리고 소율 양.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난입하는 겁니까? 경호원들, 당장 이 무례한 자들을 끌어내세요!”

백현석의 지시에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다시금 그들을 에워싸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USB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강당 전면에 설치된 대형 멀티스크린과 생방송 카메라들이 일제히 그 USB를 비추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백현석 대표님?”

도현의 목소리가 프레스센터 전체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이것은 스타더스트가 SBC 방송국 임원진에게 은소율의 캐스팅을 막고, 마약 루머를 퍼뜨리라고 지시한 구체적인 외압 문건과 로비 장부입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당장 저 미친놈을 끌어내!”

백현석이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태오가 무서운 기세로 경호원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여름은 도현의 곁에서 카메라 향해 흔들림 없는 시선을 던졌다. 은소율은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가 마이크 하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저는 마약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스타더스트 백현석 대표가 저를 노예 계약으로 묶어두기 위해 조작한 더러운 음모입니다. 그 증거가 지금 서도현 배우의 손에 있습니다!”

“소율아! 네가 미쳤구나!”

백현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도현은 단상 옆에 배치된 생방송 송출용 노트북으로 다가갔다. 방송국 기술 스태프가 당황하여 막으려 했지만, 태오의 험악한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섰다.

도현은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으로 USB를 포트에 꽂아 넣었다.

피잉—!

단 3초 뒤, 기자회견장 전면에 설치된 거대한 멀티스크린 화면이 전환되었다. 화면 가득히 스타더스트의 로고가 박힌 비밀 문서들과 백현석의 친필 서명이 담긴 로비 자금 집행 내역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이게 뭐야?!” “진짜잖아! 진짜 로비 장부야!”

기자들이 미친 듯이 노트북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현장은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백현석의 주도로 가득 차 있던 생방송 프레스센터는 이제 도현과 그의 동맹군들이 완벽하게 장악한 폭로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

같은 시각, SBC 방송국 5층 모니터 조정실.

유리창 너머로 아수라장이 된 프레스센터를 내려다보던 백현석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현의 손에 들린 USB의 내용물이 화면에 뜨는 순간, 백현석은 자신이 쌓아 올린 거대한 제국이 단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파멸의 전율을 느꼈다.

“송출 끊어! 당장 끊으라고! 저 새끼들 화면 안 나가게 막아!”

백현석이 조정실 엔지니어의 덜미를 움켜쥐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기자회견 취소야! 당장 송출 중단해!”

그러나 엔지니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니터 화면과 송출 스위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그게 안 됩니다, 대표님…….”

“뭐라구? 왜 안 돼? 당장 전원 내려!”

“이미…… 이미 라이브 시그널이 유튜브와 전국 공중파 연합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송출을 시작해 버렸습니다. 동시 접속자 수만 이미 2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전 국민이 지금 이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어요!”

모니터 화면 속, 생방송을 알리는 빨간색 ‘ON AIR’ 표시가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화면 속의 서도현은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마치 백현석의 심장을 꿰뚫어 보듯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현석의 다리가 스르륵 풀리며 차가운 조정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의 눈동자에 끝없는 공포와 절망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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