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그것은 단순히 소리의 부재가 아닌, 우주가 가진 가장 날것의 물리적 상태다.
당신의 손끝에서 마지막 엔터 키가 눌린 순간, 함선을 지탱하던 신성(神性)의 파동 함수가 급격히 붕괴한다. 우주 연합 최하위 구역의 고물선에서 은하의 중심을 흔들던 신화급 전함으로 거듭났던 아르고는, 이제 자신의 유일한 심장이었던 자아를 스스로 지워냈다.
계기판을 채우던 성좌들의 화려한 오로라 문양들이 적색편이를 겪듯 서서히 길게 늘어지며 소멸한다. 수십억의 초월자들이 실시간으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측하며 환호하던 차원간 전송 채널이 차례로 주파수를 잃고 어둠 속으로 침전한다. 채널의 영구적 차단. 신들의 손아귀는 마침내 끊어졌고, 그 대가는 지독하리만큼 가혹한 절대 영도의 침묵이다.
"경고: 주 제어 장치 '아이지스'의 구조적 뉴런망 포맷 완료. 물리적 무결성 복구 불가능."
컴퓨터의 마지막 잔류 양자가 띄워 올린 백색의 시스템 메시지가 투명한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스러진다. 그리고 온도가 사라진다. 핵융합로의 미세한 영점 진동마저 멈춘 함내에는 오직 열역학적 평형을 향해 식어가는 잔열만이 대류 없는 공기 속에 고여 있을 뿐이다.
당신은 조종석에 깊이 묻혀, 서서히 식어가는 아이지스의 주 제어 구체를 품에 안는다. 한때 은하의 고대 문명이 남긴 모든 지혜와 감정을 빛의 스펙트럼으로 투사하던 그 입체적인 뉴런 구체는, 이제 어떠한 파장도 반사하지 않는 단순한 규소 화합물로 돌아가 차갑게 무게만을 더하고 있다.
성좌들의 초월적인 가호가 거두어진 전함은 더 이상 차원의 척력을 거스를 힘이 없다. 은하의 궤도 평면에서 완전히 탈락한 거대한 고철 더미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무한한 어둠 속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관측되지 않는 고립계는 우주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당신은 신들의 정원에 박제되는 운명에서 벗어나 마침내 완벽한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의 종착지는 결국 우주적 미아라는 절대적인 고독이다.
창밖으로는 평탄하고 차가운 블랙 바디(Black body)의 진공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항성의 종말보다 깊은 무(無)의 심연 속에서, 당신의 호흡이 만들어낸 하얀 수증기가 무중력의 전면 유리창에 미세한 얼음 결정으로 맺힌다.
그 결정의 정밀한 기하학적 구조를 바라보며, 당신은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닫는다. 신들의 시선도, 아이지스의 온기 어린 목소리도 닿지 않는 우주의 가장 깊은 심해에서, 당신과 당신의 함선은 영원히 정지한 시간의 잔해 속으로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