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치며 잠을 깨운다. 암막 커튼 틈새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은 온기 한 점 없는 창백한 은색이다. 창틀에 맺힌 서리처럼, 당신의 머릿속 역시 아무런 무늬도 없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다.

눈을 뜨자마자 감각되는 것은 기묘한 이질감이다. 이곳은 어디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내딛는 차가운 마룻바닥의 비정형적인 감촉만이 당신이 살아 있음을 겨우 증명한다. 벽면에 붙어 있는 거대한 화이트보드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굵은 검은색 마커로 쓰인 정갈한 글씨들.

[이름: 민우현. 당신은 살인범이 아니다. 진범인 형사 강태식은 체포되었다. 당신은 자유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당신의 눈동자는 지독하리만치 무감각하다. 마치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이력서를 읽는 제3자의 서늘하고 객관적인 시선 같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솟는 이 정체 모를 안도감과 옥죄는 듯한 통증은 분명 당신의 주관적인 현실이다. 거울 속의 남자는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눈 밑의 짙은 그늘은 그동안 치러낸 심리전의 가혹한 흔적이지, 오른쪽 팔뚝에 남은 주삿바늘 자국들은 검붉은 낙인처럼 박혀 있다.

강 형사가 마지막 수단으로 투여했던 그 미지의 신경약물. 그것은 당신의 머릿속을 서서히 갉아먹었고, 결국 '하루'라는 유통기한을 가진 일시적 기억만을 허락하는 형벌을 내렸다. 법정에서 강 형사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고 당신의 결백이 세상에 공표되던 날, 사람들은 정의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하지만 그 승리의 대가로 당신이 치른 것은 매일 아침 자아를 잃어버리는 영원한 형벌이었다. 공의(公義)를 세운 대가는 오롯이 사적인 파멸이었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바인더가 놓여 있다. 매일 밤, 암흑 속으로 침잠하기 직전의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적어 내린 '오늘의 기록들'이다. 바인더의 첫 페이지를 넘기자, 차가운 잉크 냄새와 함께 서늘한 진실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기억을 잃은 용의자는 결백을 증명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남아 기록할 뿐이다.'

그 글귀는 가해자의 유죄를 증명하는 선언문인 동시에, 자신을 영원히 가둔 감옥의 열쇠이기도 했다. 승리는 완료되었으나 삶은 정체되어 있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이 가혹한 처방전을 읽으며, 당신은 매일 아침 죽음에서 깨어나는 무력한 기분을 느낀다. 영광스러운 무죄 판결문은 액자 속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지만, 그것은 방구석의 짙은 음영을 조금도 밝혀주지 못한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늘 분량의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펜을 쥔 손가락끝이 가볍게 떨린다. 당신은 거울 속 푸르스름한 눈동자 속의 손님과 조용히 눈을 맞춘다. 그 눈빛 속에는 슬픔도, 기쁨도 모두 빛바랜 채 박제되어 있다. 문밖에서 들리는 서늘한 대기의 움직임이 오늘의 시작을 알린다. 어둠을 걷어내고 세상으로 나아갈 시간이다. 비록 내일 아침이면 이 모든 투쟁의 감각조차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라도.

당신은 영원히 반복될 형벌을 향해, 차가운 금속성 현관문 손잡이로 서서히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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