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두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도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켜보겠네, 서도현 선생.

그 목소리가 귓속에서 자꾸 되감겼다. 온화한 얼굴, 서늘한 눈. 15년 전 그날의 윤재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건 하나였다. 그때 윤재경은 도현을 짓밟은 뒤였고, 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도현은 손을 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또 한 박자를 흘리고 두 번째 박동을 서둘러 채웠다. 어제 만진 세 환자의 통증이 아직 흉강 어딘가에 눌어붙어 있었다. 진통제로는 지워지지 않는 것들.

"저 선생 표정 봐라." 정민아가 지나가며 낮게 말했다. 조롱은 아니었다. "과장이 인턴 이름 외운 거, 좋은 일 아니야. 튀지 마. 지금부터가 진짜야."

"압니다." 도현은 짧게 답했다.

정민아가 곁눈으로 그를 훑고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도현은 차트 화면을 껐다. 튀지 말라. 정민아의 말이 옳았다. 전생의 자신은 그 말을 몰라서 무너졌다. 옳은 진단을 옳게 증명하고도, 절차를 흔든 자라는 낙인 하나로 15층 회의실에서 심장이 멈췄다.

이번엔 다르게 간다. 몸을 낮추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규칙 안에서.

문제는 그게 도현의 천성과 정반대라는 것이었다.

*

이후 나흘. 도현은 스스로를 눌렀다.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손을 대지 않고 눈으로 보고, 병력을 묻고, 검사 순서를 정석대로 밟았다. 촉진은 마지막 카드로만 아꼈고, 쓸 때조차 반드시 객관 근거를 먼저 세워 그 뒤에 능력이 짚은 답을 얹었다. 좌우 혈압차, 통증의 이동, 방사 양상. 시스템이 인정하는 언어로만 말했다.

효과는 느리지만 분명했다.

패혈증 초기의 노인을 활력 징후 변화만으로 잡아 항생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흉통을 호소하는 젊은 남자를 심근염으로 감별해 심초음파를 유도했다. 흔한 편두통으로 넘어갈 뻔한 여자를 안구 증상 하나로 붙들어 지주막하출혈을 찾아냈다. 매번 촉진에 기대지 않았다. 아꼈다. 그럼에도 진단은 어긋나지 않았다.

닷새째 아침, 정민아가 커피를 든 채 스테이션 벽에 기댔다.

"너 뭐냐, 진짜."

"뭐가 말입니까."

"인턴이 나흘 동안 오진 하나가 없어. 그것도 애매한 것들만." 정민아가 컵을 흔들었다. "레지던트 3년차인 나도 그중 둘은 놓쳤을 거야. 너 인턴 맞아?"

"운이 좋았습니다."

"운 같은 소리." 정민아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눈빛은 처음보다 부드러웠다. 애송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오더는 계속 나한테 통과시키고 가. 네 이름으로 단독 판단 남기지 말고. 알지? 튀면 밟힌다니까 진짜."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민아가 그를 한 번 더 보고 갔다. 도현은 속으로 셈했다. 한 명. 정민아를 이쪽으로 반쯤 끌어왔다. 신뢰는 이렇게 쌓는 거다. 소문이 아니라 반복으로. 한 번의 기적이 아니라 열 번의 정확함으로.

그렇게 응급센터에서 도현의 이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무게를 얻어갔다.

*

일이 벌어진 건 그날 밤 당직이었다.

새벽 두 시, 환자가 뜸했다. 정민아가 도현에게 잡무를 던졌다. 폐기 예정 종이차트 정리. 응급센터는 3년 전까지 이중으로 기록을 남겼고, 전산 이관이 끝나 오래된 종이본을 스캔 후 파기하는 작업이 남아 있었다. 인턴에게 딱 맞는, 아무도 하기 싫은 일.

도현은 창고 옆 자료실에 앉아 색바랜 차트를 한 장씩 넘겼다. 사망 환자 파일 묶음이었다. 표지에 사인일과 진단명이 적혀 있었다.

손이 멈춘 건 세 번째 묶음, 하단의 한 차트에서였다.

3년 전. 응급센터. 42세 남자. 사인: 급성 심근경색. 담당의 서명란에 흐릿하게 지워진 이름과, 그 위에 다시 쓰인 이름.

박태오.

도현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굳었다.

박태오. 전생에서 도현을 매장한 결정적 손. 데이터 조작의 실무자. 겁이 많고 이기적이라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이든 하는 남자. 아직 이 시간선에서는 마주친 적도 없는 이름이, 3년 전 사망 차트에 박혀 있었다.

도현은 차트를 형광등 아래로 가져갔다.

악화. 심박 정지. 사망 선언.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도현은 경과지를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이번엔 의사가 아니라 사냥꾼의 눈으로. 내원 당시 혈압이 적혀 있었다. 수축기 팔십. 낮았다. 심근경색이라면 있을 수 있는 저혈압. 하지만 그 아래, 간호기록에 짧게 적힌 한 줄이 그의 눈을 붙들었다.

'경정맥 확장 관찰됨.'

도현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훑고 지나갔다.

저혈압, 경정맥 확장. 여기에 심음이 멀게 들렸다는 기록만 더해지면 그건 벡의 삼징(Beck's triad)이다. 심낭에 액체가 차서 심장을 조이는 상태. 심장 눌림증. 회귀 첫날 응급실에서 그가 맨손으로 짚어낸, 바로 그 병이었다.

명치가 아니라 가슴 한복판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능력을 쓴 것도 아닌데, 3년 전 죽은 남자의 마지막 숨이 종이 위에서 그의 폐로 옮겨붙는 착각이 들었다. 산소가 목까지 차오르는데 심장이 쥐어짜여 아무것도 밀어내지 못하는 감각. 도현은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흉골을 눌렀다.

이 남자는 심근경색으로 죽지 않았다. 심낭이 심장을 조여 죽었다. 심초음파 한 번이면 봤을 것이다. 바늘 한 번이면 살았을 것이다. 회귀 첫날 도현이 정민아의 손으로 뽑아낸 그 액체를, 이 남자의 가슴에선 아무도 뽑지 않았다.

그런데 진단은 심근경색으로 확정됐고, 진짜 진단명은 지워졌고, 그걸 확인할 유일한 검사인 심초음파 오더는 삭제됐다. 그리고 서명란엔 지워진 이름 위에 박태오가 얹혀 있었다.

원래 담당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초진을 본 누군가가 심낭을 의심했고, 초음파를 걸었고 — 그 판단이 통째로 지워진 뒤, 박태오라는 이름으로 심근경색이라는 매끈한 결론이 덮였다.

죽은 자에게 잘못을 덧씌우거나, 산 자의 잘못을 지우거나. 둘 중 하나다. 도현은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 얼굴을 하고도 같은 손에서 나오는지 안다. 전생에서 자기 이름 위에 얹혔던 그 결론들을 기억한다.

"뭐 하냐, 아직도."

목소리에 도현은 차트를 접었다. 자료실 문틀에 강민석이 기대서 있었다. 마취과 가운, 손엔 종이컵 두 개. 하나를 도현 앞에 놓았다. 미지근한 믹스커피 냄새가 났다.

"당직 콜 없어서 내려와 봤더니, 인턴이 창고에 처박혀서 유령 나올 얼굴을 하고 있네." 강민석이 도현의 얼굴을 훑었다. "너 또 손 떨어? 능력 썼어?"

"안 썼습니다."

"그럼 그 낯빛은 뭔데."

트를 톡톡 두드렸다. "그 눈으로 남의 죽은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어. 뭘 봤냐."

도현은 커피컵을 내려놓았다. 강민석의 시선이 정직해서, 어설픈 거짓말은 그 자리에서 부러질 것 같았다. 회귀 전, 이런 눈을 마주할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도현은 자기 이름 위에 얹힌 결론을 혼자 짊어지고 무너졌던 밤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무도 맞은편 의자를 끌어다 앉지 않았다.

"3년 전, 여기서 남자 하나가 죽었습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심근경색으로."

"그런데?"

"심근경색으로 죽지 않았어요." 도현은 차트를 펼쳐, 지워진 이름 위에 얹힌 서명란을 강민석 쪽으로 밀었다. "여기, 심초음파 오더가 걸렸다가 삭제된 흔적이 있습니다. 심낭을 의심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 판단이 통째로 지워지고, 다른 이름이 얹혔습니다."

강민석의 눈이 서명란에 오래 머물렀다. 그가 천천히 상체를 뒤로 뺐다. 종이컵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삭제 흔적을… 너 지금 종이만 보고 짚은 거야?"

"오더 코드가 어긋나 있습니다. 사망 확정 시각보다 초음파 오더 취소 시각이 더 빨라요. 살아 있는 환자한테 걸린 검사를, 살아 있는 동안 지운 겁니다." 도현은 손끝으로 그 두 시각을 짚었다. "죽은 뒤에 정리한 게 아니에요. 죽기 전에 지운 거예요."

강민석의 입에서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자료실 문 쪽을 힐끗 돌아보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박태오. 이 이름 알아?"

"압니다."

"어떻게."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아는 것보다 도현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걸, 이 침묵이 말하고 있었다.

"또 이러네." 강민석이 목소리를 눌러 삼켰다. 화가 아니라 두려움에 가까운 소리였다. "너 혼자 파고들 셈이지. 능력으로 짚고, 종이로 파고, 그러다 심장 한 번 더 걸르고. 3층에서 겨우 신뢰 쌓기 시작했는데, 이제 죽은 사람 차트로 카르텔 정점 이름을 캐? 서도현, 이거 폐기 파일이야. 태우면 없어져. 너만 안 봤으면 돼."

"이미 봤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잖아!" 강민석이 낮게 내질렀다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이마를 감쌌다. "…혼자 무너진 적 있는 얼굴이야, 너. 나는 그 얼굴 알아. 마취과에서 그런 얼굴 여럿 재웠어."

도현의 손끝이 차트 위에서 멎었다. 혼자 무너진 적 있는 얼굴. 정확히 그랬다.

도현은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게 목을 지나갔다. 강민석의 눈이 도현이 접어 든 차트로 내려갔다. 사망 파일 묶음. 그리고 도현의 손이 유독 한 장을 놓지 않고 있는 것.

강민석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걷혔다.

"그거 폐기할 거잖아. 스캔하고 태우면 끝인 거."

"…그렇죠."

"그런데 왜 한 장만 붙들고 있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석이 문틀에서 몸을 떼고 안으로 들어와, 도현 맞은편 낡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서도현. 나 너한테 딱 한 가지만 물을게. 지금 그 눈, 나 전에도 본 적 있어. 5번 환자 대동맥 박리 짚을 때. 남들 다 요로결석이라는데 너 혼자 딴 걸 봤을 때." 강민석이 손가락으로 차트를 툭 건드렸다. "너 지금, 또 남들 못 보는 걸 본 거지."

도현의 심장이 한 박자 걸렀다. 이번엔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수정 흔적이 있었다. 원래 검사 오더 목록 일부가 지워지고 새로 타이핑된 라벨이 덧붙어 있었다. 진단명 옆에도 지우개로 문지른 자국. 종이 결이 눌린 곳을 비스듬히 기울여 보니, 아래에 남은 필압의 골이 있었다. 원래 뭐라고 적혔던 흔적.

"…심낭."

도현의 입에서 낮게 새어 나왔다.

원래 진단 초안에 '심낭'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게 지워지고 '급성 심근경색'으로 덮였다.

그리고 검사 목록. 원래 오더에 심초음파가 있었다. 그 줄이 삭제됐고, 대신 심전도와 트로포닌 수치만 남았다. 심전도만으로는 심근경색과 심낭 질환을 완벽히 가르지 못한다. 심초음파를 지운 것이다. 심근경색이라는 결론에 맞춰서.

도현은 사망 경과를 읽었다. 흉통으로 내원, 심전도 ST 변화 의심, 심근경색 의증으로 처치 중 급성 심정지. 표면상 흔한 순서였다. 흠잡을 데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다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현의 눈에는 겹쳐 보이는 게 있었다.

기록된 활력 징후. 빈맥, 저혈압, 그리고 흡기 시 급격히 떨어지는 수축기 혈압 — 기이맥. 목정맥 팽대. 심음 감약. 도현은 이 조합을 자기 몸으로 앓아본 적이 있었다. 회귀 첫날, CPR 침대 곁에서 만졌던 여자. 심낭이 심장을 조여 오던 그 압박. 흉강 전체가 젖은 스펀지에 눌리는 감각.

심장 눌림증. 심낭 압전.

3년 전 이 환자는 심근경색으로 죽은 게 아니었다. 심낭이 심장을 조여 죽었다. 심초음파 한 번이면 잡혔을 것을. 심낭천자 한 번이면 살렸을 것을.

누군가 심초음파 오더를 지웠고, 진단을 심근경색으로 덮었고, 서명을 박태오로 바꿔 달았다.

도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능력을 쓴 것도 아닌데, 3년 전 죽은 남자의 통증이 흉강 어딘가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살릴 수 있었으나 놓친 환자. 능력은 그런 고통을 유독 오래 새긴다고 했다. 이건 도현이 놓친 게 아닌데도.

박태오. 3년 전에도 너는 이렇게 지웠구나.

*

"뭘 그렇게 봐."

목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문틀에 기대선 남자. 마취과 강민석. 야간 콜을 받고 응급센터로 내려오던 길인지 목에 청진기 대신 커피 캔을 들고 있었다.

"인턴이 폐기 차트나 넘기고 있길래 불쌍해서 들여다봤더니." 강민석이 안으로 들어와 도현의 손에 든 차트를 흘긋 봤다. "표정이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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