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걸음을 놓친 그 짧은 순간, 도현은 명함을 받지 않았다.
"증명." 그가 입술을 뗐다. 마른 소리가 났다. "증명하면, 뭘 하시게요."
"기사를 쓰죠." 이서린은 명함을 도현의 가운 주머니에 그대로 찔러넣었다. 손끝이 도현의 떨리는 손등을 스쳤고, 그녀는 그 떨림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반나절 된 인턴이 3년차가 놓친 진단을 잡아냈다. 그런데 병원은 상 대신 징계를 줬다. 좋은 그림이에요."
"그림이 좋으면, 환자가 사나요."
이서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도현은 그 눈을 정면으로 받았다. 전생의 이 여자를 그는 안다. 조작된 데이터를 파헤치다 소리 없이 지워진 이름. 지금 눈앞의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특종 냄새만 맡고 왔을 뿐이다.
"기자님." 도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가세요. 여기서 저랑 얘기하는 걸 누가 보면, 기자님도 기사 못 씁니다. 병원이 그런 곳이에요."
그 말에 이서린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잠깐이었다.
"…재밌네요. 인턴 첫날인 사람이, 병원이 어떤 곳인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그녀가 커튼을 반쯤 잡은 채 멈춰 섰다.
"삼 년 전에요, 저 이 병원 응급센터에서 죽은 환자 하나 취재했어요. 원인 미상 심정지로 처리됐죠. 유족이 부검을 원했는데, 어느 순간 소송이 취하됐고 차트가 정리됐어요." 이서린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이어졌다. "제 기사는 데스크에서 잘렸고, 저는 그 파일을 아직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믿어요. 증거가 없거든요. 있는 건 제 확신뿐이라서."
도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선생님. 확신만 있는 사람은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해요. 저처럼요." 그녀가 커튼을 젖혔다. "증명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이 오늘 살린 그 환자도, 결국 아무 의미 없어질 거예요."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도현은 주머니 속 명함을 꺼내 보지 않았다. 이서린이 흘린 그 사건, 삼 년 전 응급센터의 심정지 환자. 전생에서도 그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다. 카르텔이 지운 것 중 하나. 그녀는 지금, 자기도 모르게 진실의 한 조각을 들고 도현 앞을 지나간 셈이었다.
증명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그 말이 처치실에 남았다.
—
복도로 나서자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두 걸음 만에 벽에 손을 짚었다. 심장이 또 한 박자를 흘렸다. 이번엔 두 박자였다. 도현은 숨을 참고 맥을 셌다. 규칙적이던 리듬 사이로, 마치 계단 한 칸이 빠진 것처럼 텅 빈 순간이 끼어들었다.
"거기서 뭐 해."
낮고 굵은 목소리. 마취과 가운을 입은 남자가 벽에 기댄 도현 앞에 서 있었다. 아까, 도현이 쓰러질 때 그의 손을 들여다보던 그 남자. 강민석이었다.
"손 이리 줘봐."
"괜찮습니다."
"괜찮은 사람은 벽 안 짚어." 강민석이 도현의 손목을 낚아챘다. 두 손가락을 요골동맥에 얹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불규칙 맥. 조기수축. 아까부터 계속이지?"
도현은 손을 빼려 했다. 강민석은 놓지 않았다.
"내가 마취과 십 년이야. 사람 몸에 마취 넣기 전에 심장 소리부터 듣는 게 일이라고. 너 지금 심전도 찍으면 뭐 나올지 나 다 그려져." 그가 도현의 얼굴을 훑었다. 흰 입술, 관자놀이의 식은땀. "부정맥에 발한. 진통제 먹었지? 근데 안 들었을 거야. 그렇지?"
도현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강민석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봐, 안 들었네."
"…선생님."
"진통제가 안 듣는 통증." 강민석은 도현의 손목을 놓고, 대신 그 눈을 붙들었다. "그게 무슨 통증인지 나는 몰라. 근데 아까 그 환자 진단할 때, 네 손이 어떻게 됐는지는 봤어. 환자 만지고 나서 네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 마치… 네가 아픈 것처럼."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민석의 눈이 더 깊어졌다.
"뭘 하는진 모르겠는데."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거, 널 죽여."
복도의 소음이 순간 멀어졌다. 도현은 이 남자를 안다. 아니, 모른다. 전생에서 그는 강민석이라는 마취과 의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이름조차 들은 적 없었다. 회귀가 무언가를 어긋내고 있었다.
"진단은 CT가 하고 MRI가 해." 강민석이 검지로 도현의 가슴께를 툭 건드렸다. "근데 넌 네 몸으로 하지. 세 명 연달아 했어, 오늘. 나 다 봤어. 그러고 쓰러졌고. 인마, 네 심장이 지금 그 대가 치르고 있는 거야. 자율신경 나가고, 심근이 상하고. 이거 몇 번 더 하면 넌 수술실에서 메스 쥐다 손이 굳어."
"…어떻게 아십니까." 도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몰라. 짐작이야. 근데 마취과 의사 짐작은 잘 안 틀려." 강민석이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진통제로 안 되는 통증이면 마취과로 와. 신경차단이든 뭐든 해줄 테니까. 대신." 그가 손가락을 세웠다. "네가 뭘 하는지, 언젠간 나한테 말해. 안 그러면 나 너 못 살려."
강민석이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 멈추고, 어깨 너머로 던졌다.
"오늘은 잘했어. 진단 말이야. 근데 잘한 거랑 살아남는 거랑은 달라. 그거 명심해."
—
당직실 구석 컴퓨터 앞에서, 도현은 오래 앉아 있었다.
이서린의 말과 강민석의 말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증명하지 못하면 아무 힘이 없다. 그리고 그 증명을 위해 몸을 갈면 죽는다. 전생의 그는 이 두 가지를 다 무시했다. 옳다고 소리쳤고, 확신만으로 밀어붙였고, 몸이 부서지든 말든 환자에게 손을 댔다. 그 끝이 12층 회의실의 조작된 데이터, 그리고 멈춘 심장이었다.
'이번엔 다르게.'
능력은 답을 준다. 문제는 그 답을 누구도 반박 못 하게 만드는 일이다. 촉진으로 병변을 안다면, 그 병변이 실재한다는 걸 검사와 영상으로 세워야 한다. 능력은 나침반이고, 증거는 지도다. 나침반만 들고는 아무 데도 못 간다.
새벽 두 시, 응급센터가 다시 붐볐다.
"인턴! 5번 베드 채혈이랑 활력징후."
정민아의 목소리였다. 낮보다 날이 서 있었다. 도현은 5번 베드로 갔다. 40대 초반 남자. 오른쪽 옆구리 통증으로 왔고, 초진 차트엔 '요로결석 의심'이 적혀 있었다.
"통증 어디세요."
"여기, 옆구리… 아까부터 등까지 뻗쳐요."
도현은 채혈 준비를 하며, 소독한 손끝을 환자의 옆구리 피부에 잠깐 얹었다. 알코올 솜을 문지르는 척.
순간, 도현의 등 아래쪽이 찢어지는 듯 당겼다. 옆구리가 아니었다. 통증의 진짜 진원은 더 안쪽, 대동맥을 따라 아래로 벌어지는 감각. 벽이 얇아지고, 안에서 무언가가 밀어내는 압력. 요로결석의 예리하고 국소적인 통증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넓고, 둔하고, 찢기는.
'복부 대동맥류. 박리 임박.'
도현의 손끝이 떨렸다. 이건 요로결석이 아니다. 잘못 방치하면 몇 시간 안에 대동맥이 터진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
전생의 도현이라면 지금 정민아에게 달려가 소리쳤을 것이다. 이건 결석이 아니라 대동맥류라고, 당장 CT 찍으라고. 그리고 3년차는 애송이 인턴의 헛소리로 흘렸을 것이다. 아까 낮처럼.
이번엔 아니다.
"선생님." 도현은 정민아에게 걸어갔다. 목소리를 눌렀다. "5번 베드, 활력 다시 재보니까 혈압 좌우 차이가 있습니다. 오른팔 148, 왼팔 122. 통증도 옆구리에서 등으로 뻗치고, 이동성이 있고요."
정민아가 인상을 썼다. "그래서."
"요로결석으로 보기엔 통증 양상이 안 맞습니다. 대동맥 박리 배제를 위해서 조영 CT 오더 하나만 걸어주십시오. 결석이면 CT에서도 바로 보이니까, 어차피 찍어서 손해 안 봅니다."
핵심은 거기였다. 결석이든 대동맥류든, CT는 둘 다 잡는다. 도현은 자기 진단을 주장하지 않았다. 검사가 필요한 '객관적 이유'만 내밀었다. 좌우 혈압 차, 이동성 통증. 이건 도현의 확신이 아니라 교과서가 요구하는 감별 진단이었다.
정민아의 눈이 도현을 훑었다. 낮의 일이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이 인턴은 찍힌 놈이다. 그런데 낮에, 이 인턴은 옳았다.
"…혈압 차 다시 재. 내 눈앞에서."
도현은 혈압계를 들고 양팔을 다시 쟀다. 오른팔 150, 왼팔 121. 정민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조영 CT. 응급으로 걸어." 그녀가 옆의 레지던트에게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도현을 돌아봤다. "결석이면 너 각오해."
—
CT 판독실의 모니터가 어둠 속에서 밝아졌다.
영상의학과 당직 판독의가 마우스를 굴리며 단면을 넘겼다. 신장, 요관을 훑고 지나가는데 결석은 보이지 않았다. 화면이 아래로 내려가다, 복부 대동맥에서 멈췄다.
"…어."
판독의의 손이 멈췄다. 대동맥 벽 안쪽에, 혈류가 두 갈래로 갈라진 얇은 선이 보였다. 진짜 내강과 가짜 내강. 그 사이를 가르는 내막편.
"Type B 대동맥 박리. 하행 대동맥." 판독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결석 아니야. 박리야. 혈압 관리 안 하면 파열 임박이고."
정민아가 모니터에 바짝 붙었다. 화면의 그 선은 반박할 수 없었다. CT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현을 봤다. 낮과는 다른 눈이었다. 낮엔 '운 좋은 애송이'였다. 지금은 무언가 다른 것을 보는 눈.
"…혈압 강하 시작. 니카르디핀 걸고, 흉부외과 콜." 정민아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5번 환자 목표 수축기 120 이하. 통증 재평가 계속. 인턴, 활력 5분마다."
도현은 대답했다. "예."
이번엔 아무도 그의 진단을 '헛소리'라 부르지 못했다. CT가 있었다. 좌우 혈압 차 기록이 있었다. 통증 양상 기록이 차트에 남았다. 도현이 촉진으로 먼저 '본' 것을, 시스템이 인정하는 언어로 번역해 문서에 박아넣었다. 능력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고, 적힐 필요도 없었다.
환자는 혈압이 잡혔다. 파열 전에. 흉부외과가 내려와 환자를 인계받았다. 죽을 뻔한 남자가, 요로결석으로 진통제 맞고 방치될 뻔한 남자가, 살아서 병동으로 올라갔다.
응급센터의 새벽 공기 속에서, 도현은 처음으로 숨을 길게 뱉었다. 심장은 여전히 이따금 걸음을 놓쳤다. 그러나 이번엔, 옳은 진단이 종이 위에 증거로 남았다.
—
"5번 그거, 인턴이 먼저 봤다며."
교대 시간, 스테이션 뒤편에서 레지던트 둘이 커피를 들고 소곤거렸다.
"결석 초진 걸린 걸 대동맥 박리로 뒤집었대. 혈압 차부터 잡아냈다던데. 반나절 된 인턴이."
"낮에도 심장압전 하나 잡았다며. 그 인턴 뭐야."
"몰라. 근데 정민아 3년차가 걔 오더 그냥 통과시켰어. 그 사람이? 인턴 말을?"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응급센터는 좁고, 벽은 얇았다. 도현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새벽의 스테이션을 조용히 돌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새벽이 다 가기 전에 3층을 벗어났다.
7층 흉부외과 당직 데스크. 야간 인계 노트를 넘기던 한 레지던트가 대동맥 박리 인계 건을 읽다가, 옆의 선임에게 물었다. "이거 3층에서 초진 뒤집은 거네요. 인턴이 먼저 짚었다고 코멘트 달렸는데."
선임이 노트를 받아 읽었다. 그의 손가락이 '서도현'이라는 이름과, 그 옆의 '초진 진단 감별 이견 제기'라는 문구 위에 멈췄다.
"…절차 흔드는 인턴이네."
—
날이 밝고, 응급센터에 감사가 떴다.
정례 감사가 아니었다. 흉부외과 과장이 직접 3층에 내려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회색 정장, 흐트러짐 없는 걸음. 스테이션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정민아조차 자세를 고쳤다.
윤재경이었다.
도현은 그 이름을 안다. 그를 매장한 손 중 하나. 조작된 데이터의 정점. '검증되지 않은 손이 환자를 죽인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카르텔의 관리자.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이 시간선에서, 윤재경은 도현이라는 이름을 처음 마주하고 있었다.
"어젯밤 대동맥 박리 건." 윤재경이 차트를 요청했다. 손가락이 화면을 넘겼다. 좌우 혈압 차 기록, 이동성 통증 기록, CT 판독 소견, 감별 진단 코멘트. 흠잡을 데 없이 정연했다. 그는 그 정연함을 오래 들여다봤다.
"초진 진단을 뒤집은 게, 인턴이라고."
정민아가 대답하려는데, 윤재경의 시선이 이미 도현에게 가 있었다. 명찰을 읽었다. 서도현. 그 이름 위에 눈이 멎었다. 도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심장이 또 한 박자를 놓쳤지만, 얼굴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윤재경이 차트를 내려놓았다. 표정은 온화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잘 정리했군. 근거도, 오더도, 절차도." 그가 도현에게 한 발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말이야, 인턴. 나는 이런 기록을 십오 년 봤어. 옳은 진단을 옳게 증명한 기록. 그리고 그런 손이 언젠가 자기 확신을 못 이기고 환자를 죽이는 것도, 십오 년을 봤지."
도현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오늘은 CT가 자넬 살렸어. 자네 진단이 아니라." 윤재경이 미소를 거뒀다. 눈만 남았다. "검증되지 않은 손이, 언젠가 환자를 죽이지. 나는 그런 손을 걸러내는 사람이고."
그가 돌아서며, 스치듯 남겼다.
"지켜보겠네, 서도현 선생."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도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이, 그 남자는 이미 도현이라는 이름을 자기 명단에 적어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