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윤재경. 세 글자가 눈에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도현은 봉투를 손가방에 다시 넣는 유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좀 맡아도 될까요. 사본은 제가 만들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원본은 어머님이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병원 안에 두면… 없어질 수도 있어요."

여자는 잠시 도현을 보다가 봉투를 다시 꺼내 건넸다. 손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벼웠다.

"없어져요? 병원 서류가?"

"3년 동안 어머님께 차트를 안 내준 이유가 그겁니다."

한지우가 상담실 문을 닫으며 낮게 내뱉었다.

"서도현. 여기서 그 말 하지 마."

*

유족을 보내고, 도현은 원무과 복사기 앞에 섰다. 서류 넉 장을 두 부씩 떴다. 한 부는 유족에게 우편으로. 한 부는 그의 가운 안주머니로. 복사기 유리에 눌린 문서번호가 하얗게 지나갈 때마다, 흉강 안쪽에서 심낭이 조여 오던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능력을 쓴 것도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놓친 환자의 잔류 통증은 유독 오래 새겨진다더니.

그날 밤, 도현은 이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

병원 뒤편, 24시간 편의점 앞 파라솔. 이서린은 이미 와 있었다. 노트북을 펴고, 종이컵 커피를 두 잔 시켜 놓고. 프레스카드는 목에 걸려 있지 않았다. 사복 차림이었고, 눈 밑이 검었다.

"인턴이 밤 열한 시에 기자를 불러내는 건 처음이에요." 이서린이 컵을 밀어 주었다. "그것도 병원 뒤에서. 이거 마셔요. 커피 아니고 그냥 뜨거운 물이에요. 카페인 심장에 안 좋다면서요, 요즘."

도현은 컵을 받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서린의 눈이 그 손을 스쳤다가 돌아왔다.

"증명할 수 있는 거 가져왔어요?" 그녀가 물었다. "지난번에 내가 물었잖아요. 증명 못 하면 소음이라고."

도현은 봉투를 파라솔 위에 올렸다. 서류 넉 장을 부챗살처럼 펼쳤다.

"당신이 3년 전에 파던 사건." 도현이 말했다. "응급센터 원인미상 심정지 사망. 데스크에서 잘렸다던 그거. 문서번호 뭐였습니까."

이서린의 손가락이 노트북 자판 위에서 멈췄다. 잠시 화면을 노려보더니, 폴더를 하나 열었다. 스캔한 종이 사진 한 장. 흐릿한 문서번호. 그녀가 그것을 도현의 서류 옆에 나란히 돌려 놓았다.

두 개의 번호가 파라솔 위에서 마주 보았다. 앞자리가 같았다. 뒷자리 세 개만 달랐다.

"…같은 발급 라인." 이서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같은 부서에서, 연달아 끊은 번호야. 이거 우연 아니에요."

"연구동." 도현이 서류 상단의 로고를 손끝으로 짚었다. "임상연구지원센터. 당신 사건 환자도 여기로 넘어갔죠. 사망하고 나서."

이서린이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파라솔 등이 그녀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내가 파던 환자는 스물아홉이었어요. 건강했고, 새벽에 응급실 왔다가 아침에 죽었어. 사인은 심근경색. 그런데 이상했지. 스물아홉이 관상동맥 다 막힐 만큼 살았겠어요? 나는 그 심초음파 기록을 달라고 했는데, 없대. 처음부터 안 찍었대."

도현의 손끝이 컵을 감쌌다. 종이 너머로 온기가 번졌다.

"제 환자는 심근경색이 아니었습니다." 도현이 말했다. "심낭 압전이었어요. 심장을 싼 주머니에 물이 차서 눌려 죽은 겁니다. 심초음파만 찍었으면 5분 만에 보였을 거고, 바늘로 물만 빼면 살았어요. 그런데 심초음파 오더 흔적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아예 안 찍은 게 아니라, 찍으려던 기록을 지운 거죠."

이서린이 침을 삼켰다.

"둘 다… 심장. 둘 다 심초음파. 둘 다 안 찍었다고 처리되고, 둘 다 연구동으로 넘어갔어."

"그리고 둘 다 사인이 다르게 적혔죠." 도현이 서류 한 장을 뒤집었다. 사망진단서 사본. '급성 심근경색'. "제 환자는 심낭 압전인데 심근경색으로 적혔습니다. 당신 환자도 심근경색이었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둘 다, 검사 안 해도 넘어가는 병명으로 끝났을까요."

*

이서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커피, 아니 뜨거운 물이 식어 갔다. 그녀가 노트북을 도현 쪽으로 돌렸다. 표 하나가 떠 있었다. 연도별 사망률 통계. 성심의료원 흉부외과.

"내가 잘린 이유가 이거예요." 그녀가 화면을 톡톡 쳤다. "이 병원 흉부외과 수술 사망률이 전국 평균보다 낮아. 몇 년째. 그래서 의료 브랜드가 되고, 정부 지원 받고, 논문 나와. 나는 이게 진짜인 줄 알았어요. 근데 취재하다 보니까, 죽은 환자가 통계에 안 잡히는 경우가 있더라고. 수술방에서 죽으면 흉부외과 실패. 근데 응급센터에서 죽으면?"

"응급센터 사망." 도현이 받았다. "흉부외과 통계엔 안 잡히죠."

"바로 그거." 이서린의 눈이 번뜩였다. "수술 잘못돼서 응급실로 내려온 환자가 응급실에서 죽으면, 그건 흉부외과 실패가 아니라 응급의학과 사망으로 잡혀. 심장 문제로 넘긴다? 그럼 심근경색 급사. 처음부터 못 살릴 환자였다는 거지. 아무도 책임 안 져."

도현의 흉강 안쪽이 얼얼해졌다. 이번엔 기억이 아니었다. 전생의 자신이었다. 그도 이렇게 처리됐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 셋이 사후에 죽었고, 그 통계가 그의 이름 아래로 몰렸다. 조작된 사망 통계. 실패를 서열 낮은 자에게 몰아넣는 시스템. 그는 그 시스템의 마지막 칸에 이름이 적힌 채 무너졌던 것이다.

"…실패는 아래로 흐릅니다." 도현이 낮게 말했다. "집도의는 명예만 가지고, 죽은 건 응급실이 뒤집어써요. 인턴이, 레지던트가, 아래에서 서명한 사람이. 통계는 예뻐지고요."

"당신, 인턴 맞아요?" 이서린이 도현을 정면으로 봤다. "이걸 어떻게 알아. 나 3년 걸렸어. 데스크에서 잘리고, 소스 다 끊기고, 그러고 나서야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전생에 나는 그 통계의 마지막 희생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제 환자를 만졌으니까요." 도현이 겨우 말했다. "손으로 병을 봅니다. 그 환자가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진단이 틀리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 틀립니다."

이서린이 커피컵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도현을 뜯어봤다. 기자의 눈이었다. 거짓말을 재는 눈.

"…믿을게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 지금까지 만난 의사들, 다 자기가 옳다고만 했어요. 근데 다 도망갔어. 증거 대라니까 다 입 다물었지. 당신은… 처음이야. 증명하겠다고 종이를 들고 온 사람은."

파라솔 위의 부챗살 같은 서류가 밤바람에 살짝 들썩였다. 도현이 그것을 손으로 눌렀다.

조각들이 맞아 들어갔다. 3년 전 심낭 압전 남자. 이서린의 스물아홉 청년. 조작된 사망 통계. 실패를 아래로 흘려보내는 시스템. 그리고 그 정점에 앉아, 폐기 차트의 연구동 이관을 승인한 이름 석 자. 윤재경.

전생의 도현은 이 그림을 죽는 순간까지 보지 못했다. 지금 그는 살아서 보고 있었다.

*

"문제가 있어요." 이서린이 노트북을 닫았다. "이 종이들, 조작을 의심하게는 해도 조작을 증명하진 못해. 사인이 틀렸다? 당신 진단이 옳았다는 걸 먼저 증명해야 하잖아. 심초음파 오더가 지워졌다? 지운 흔적은 있어도, 지운 사람이 누군지 원본 로그가 있어야 해."

"원본 로그." 도현이 되뇌었다. "차트 수정 이력. 누가, 언제, 무엇을 지웠는지."

"그건 종이엔 안 남아. 시스템에만 남지. 전자의무기록 서버."

도현은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머릿속에서 성심의료원의 층이 하나씩 올라갔다. 3층 응급센터. 7층 흉부외과 성역. 그리고—

"12층." 도현이 말했다. "심사위원회 회의실. 데이터 관리 서버가 거기 있습니다. 인사, 징계, 언론 대응, 임상 통계… 다 거기서 조율돼요. 차트 수정 로그의 원본이 남는다면, 지워지지 않은 진짜 이력이 남는다면, 거기입니다."

이서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긴 나 못 들어가. 프레스카드로는 로비까지가 끝이에요."

"저도 못 들어갑니다. 인턴 출입증은 3층까지." 도현이 서류를 봉투에 넣었다.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12층 서버는 병원 전체 EMR이랑 연동돼 있어요. 응급센터 단말에서도 접근 권한만 있으면 로그 조회가 됩니다. 문제는 그 권한이 과장급 이상이라는 거죠."

"윤재경 급."

"아니면 그 밑에서 실무를 처리하는 사람." 도현의 눈이 서늘해졌다. "차트를 실제로 지운 손. 박태오."

*

박태오.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3년 전 케이스를 인계받아 '내가 본다'며 가져간 손, 서명란을 자기 이름만 남기고 조작한 손, 도현을 창고로 불러 '호기심 많으면 오래 못 버틴다'고 경고한 손이 겹쳐졌다. 지금 도현은 그 자의 감시 표적이었다. 열람 기록이 발각된 순간부터.

"그 사람이 지웠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이서린이 물었다.

"3년 전 그 남자 차트, 첫 진료 서명은 한지우였어요. 그런데 중간에 인계됐고, 최종 서명은 박태오 단독. 심초음파 오더 흔적이 지워진 시점이 딱 인계 이후입니다." 도현이 말했다. "그 사람은 실무자예요. 명분은 위에 있고, 손은 아래에 있어요. 박태오가 서버에 접근할 권한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 권한을 우리가 어떻게—"

"쉿."

도현이 손을 들었다. 파라솔 밖, 편의점 유리에 흰 그림자가 하나 지나갔다. 도현은 서류 봉투를 가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심장이 박자를 놓쳤다. 한 박자. 두 박자 연속. 발끝이 저렸다.

그림자가 파라솔 안으로 들어왔다.

"밤에 편의점 커피가 그렇게 맛있냐."

강민석이었다. 마취과 가운을 벗은 사복 차림, 손엔 캔커피 두 개. 그가 하나를 도현 앞에 툭 내려놓았다. 도현의 컵을 슬쩍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뜨거운 물 마시고 있네. 손 떨려서 커피 못 마시는 거 티 내면서 커피 마시러 나온 척은." 강민석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너 지금 맥박 몇이야. 여기서 봐도 목 정맥이 튀는데."

이서린이 경계하며 노트북을 끌어안았다.

"이분은…"

"마취과 강민석." 그가 도현 대신 답했다. "이 친구가 손으로 뭘 하는지 아직 모르지만, 하고 나면 심장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만 아는 사람. 그쪽은 기자죠? 저 서류, 나도 아까 원무과 복사기 앞에서 봤어. 문서번호 눈에 익더라고. 우리 병원 사망 케이스 심의할 때 마취과가 서명 몇 번 하거든."

도현이 굳었다.

"강 선생님, 이건—"

"위험한 거지. 알아." 강민석이 캔을 땄다. "그러니까 내가 낀다는 거야. 너 지금 12층 서버 이야기 하고 있었지? 방금 유리 너머로 입 모양 다 봤어. 인턴이랑 기자가 12층 이야기 하고 있으면, 그건 둘 다 잘리거나 매장당하는 시나리오밖에 없어."

"그래서 말리러 오신 겁니까."

강민석이 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도현의 떨리는 손을, 창백한 입술을, 목의 정맥을 훑었다. 마취과 10년차의 눈. 통증을 다루는 자의 눈.

"아니." 그가 말했다. "너 혼자 두면 죽을 거 같아서. 지난번처럼 능력인지 저주인지 그거 쓰고 응급실 바닥에 쓰러지겠지. 그러다 진짜로 심장 멎으면, 진실이고 뭐고 없어. 나는 네가 하려는 게 뭔지 아직도 몰라. 근데 하나는 확실해. 너 이대로 가면 그 진실 보기 전에 뒈진다. 그러니까 내가 따라간다는 거야. 살아서 거기까지 데려가려고."

파라솔 위 정적. 이서린이 도현을 봤다가, 강민석을 봤다가, 다시 도현을 봤다.

"…셋이네요." 이서린이 마침내 말했다. "종이 든 인턴, 잘린 기자, 그리고 심장 붙잡는 마취과."

"이상한 조합이지." 강민석이 캔을 들어 올렸다. "근데 카르텔 상대하는데 정상적인 조합이 어딨어."

도현은 세 사람의 그림자가 파라솔 등 아래 겹치는 것을 봤다. 전생엔 혼자였다. 혼자 옳았고, 혼자 밀어붙였고, 혼자 무너졌다. 이번엔—

가운 안의 봉투가 심장 위에서 눌렸다.

*

새벽 두 시. 강민석이 먼저 자리를 떴고, 이서린은 서류 사진을 다 찍은 뒤 노트북을 닫았다.

"박태오 서버 권한, 나 쪽에서도 파 볼게요."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은 병원 안에서 접근 루트 찾아요. 근데 서도현."

"네."

"확신만으로 밀어붙이지 마요." 이서린이 프레스카드 대신 명함을 다시 건넸다. "당신 진단은 안 틀린다며. 근데 시스템은 진단으로 안 움직여. 로그로 움직여. 종이로. 서명으로. 그거 없이 12층 올라가면, 당신 3년 전 그 남자처럼 돼."

도현은 명함을 받았다. 이서린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날이 밝기 전, 도현은 응급센터로 돌아왔다. 야간 근무를 대체할 겸, 12층 접근 단서를 찾을 겸. 스테이션 단말 앞에 앉아 EMR 권한 체계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과장급 열람 권한, 위임 계정, 임시 부여 이력… 눈이 화면을 훑는 사이, 흉강의 잔류 통증이 조금씩 물러가는 게 느껴졌다. 어제 유족을 만난 뒤로 능력을 쓰지 않았다. 회복은 오직 시간뿐이니까.

그때였다.

응급센터 자동문이 열리고, 구급대원의 무전이 벽을 때렸다.

"버스 전복! 청담대로! 다수 부상, 최소 여덟 명, 지금 들어갑니다!"

정민아가 스테이션에서 튀어나왔다. 이동 침대가 연달아 밀려들었다. 피, 비명, 찢어진 옷. 한 침대, 두 침대, 세 침대. 도현의 눈앞으로 부상자들이 쏟아졌다.

"인턴! 서도현! 5번 베드 잡아, 활력징후 안 잡혀!"

도현은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손이 환자의 팔목으로 향했다. 맨손. 살갗이 닿는 순간, 흉강이 찢어지듯 갈라졌다—긴장성 기흉. 다음 침대. 손이 닿자 두개가 쪼개졌다—경막외 출혈. 또 다음. 복강이 불타올랐다—간 파열, 내출혈.

한 명. 두 명. 세 명. 도현의 심장이 박자를 놓치기 시작했다. 한 박자. 두 박자. 시야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졌다. 발한이 등을 적셨다. 어제 겨우 물러갔던 잔류 통증이, 새로 앓은 세 사람의 고통 위로 겹쳐 쌓여 올랐다.

"서도현!" 정민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너 얼굴 왜 그래—"

도현의 손이 네 번째 침대로 뻗어 갔다. 뻗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에서 죽어 가는 환자를 보면 멈추지 못하는 그 손이. 살갗에 닿기 직전, 손끝이 굳었다. 심장이 세 박자를 연달아 흘렸다.

임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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