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이 커피 캔을 내려놓기도 전에, 도현의 가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원내 호출. 발신처는 7층. 흉부외과 의국.
"불려 가?" 강민석이 눈썹을 들었다. "인턴이 7층에서 콜 받는 건 처음 보네."
"별거 아닙니다." 도현은 폐기 차트를 원래 자리에 밀어 넣었다. 손끝이 종이 결에 스쳤다. 3년 전 심낭이 조여 죽은 남자의 흔적. 그 종이를 두고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7층 복도 끝,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에서 박태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흉부외과 전임의. 회귀 전, 도현의 사망통계를 조작하고 원본 진료기록을 지운 손. 아직 그 손은 도현을 알지 못한다.
"서도현 인턴." 박태오는 도현이 들어서자 문을 직접 닫았다. 웃는 낯이었다. "야간에 부지런하더라. 응급센터 폐기 차트를 다 뒤지고 있다며."
"열람 기록이 남습니까." 도현이 되물었다.
"남지." 박태오가 벽에 기댔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알았고. 자, 인턴 첫 주에 뭘 그렇게 궁금해해. 폐기 차트는 폐기된 이유가 있어서 폐기되는 거야. 이해가 안 가나?"
"3년 전 사망 건이던데요."
"그래. 옛날 얘기지. 이미 종결된 케이스." 박태오가 도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향수 냄새가 났다. "호기심 많은 애들 여럿 봤어. 논문 쓴다고, 학회 낸다고, 옛날 차트 뒤지다가. 근데 말이야, 서 인턴."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호기심이 많으면 오래 못 버텨. 병원이라는 데가. 무슨 말인지 알지?"
도현은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이 얼굴을 15년 뒤에 다시 본다. 심사위원회 밀실에서, 자신을 매장하는 서명 위에서. 지금은 아직 전임의 나부랭이일 뿐인 이 남자가.
"알겠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종결된 케이스, 명심하겠습니다."
박태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똑똑하네."
도현은 방을 나오며 속으로 정정했다. 종결된 게 아니야. 네가 종결시킨 거지. 그리고 종결에는 반드시 서류가 남는다. 지운 흔적조차도 흔적이다.
*
박태오는 차트를 뒤지지 말라고 했다. 차트를 뒤지지 말라고만 했다.
이튿날 낮, 도현은 원무과 창구에 서 있었다. 손에는 정식 서식. '진료기록 열람 및 사본 발급 신청서'. 신청 주체 칸에 환자 본인 또는 유족. 도현은 그 줄을 오래 들여다봤다.
폐기 차트를 인턴이 다시 열면 열람 기록이 남고 박태오가 안다. 하지만 유족이 신청하면 얘기가 다르다. 유족은 법적으로 사망한 가족의 진료기록을 열람할 권리가 있다. 병원은 거부할 명분이 없다. 그 신청서가 접수되면, 박태오가 지운 그 차트는 시스템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복사되어 유족의 손에 건네진다. 규칙 안에서 규칙을 역이용하는 것. 회귀 전 도현이 몰라서 무너진 방법.
문제는 유족을 찾는 일이었다. 사망 진단서 사본에 남은 이름과 관계. 배우자. 연락처는 3년 전 것.
"그거 인턴이 왜 봐요."
목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원무과 안쪽 데스크에서 나오던 여자. 응급의학과 로고가 박힌 명찰. 3년차 레지던트. 한지우.
도현의 손가락이 신청서 위에서 멈췄다.
한지우. 이 얼굴을 다시 본다. 15년 뒤가 아니라, 회귀 전 이 시점으로부터 몇 년 뒤. 심사위원회가 도현에게 누명을 씌우던 날, 도현 편에 서 달라던 부탁 앞에서 눈을 피하고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던 사람. 도현을 궁지로 미는 진술서에.
지금 이 여자는 아직 그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 배신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도현의 미래에서만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한지우는 스물아홉의 레지던트일 뿐, 아무 죄가 없다.
그걸 아는데도, 목구멍이 조였다.
"…3년 전 사망 케이스 유족 연락처를 찾고 있습니다." 도현은 겨우 목소리를 골랐다. "학술 목적으로."
"학술?" 한지우가 팔짱을 꼈다. 냉소가 입가에 걸렸다. "인턴 첫 주에 3년 전 폐기 케이스로 학술을 한다고. 참신하네." 그녀가 도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그 애송이지. 대동맥 박리 잡았다는. 응급센터에서 소문 자자한."
"소문이 빠르네요."
"좁아서 그래, 여기가." 한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그런 애가 왜 폐기 차트에 목을 매. 실력 있으면 살아있는 환자나 보지."
도현은 대답 대신 그녀를 봤다. 냉소적인 척, 다 아는 척. 하지만 회귀 전 도현이 봤던 그 눈빛. 환자가 죽어갈 때 누구보다 먼저 침대로 뛰어들던 사람. 그 손이 왜 진술서 위에서 떨렸는지, 그때는 몰랐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살아있는 환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죽은 환자를 봅니다." 도현이 말했다. "3년 전 이 환자, 심근경색으로 죽었다고 기록돼 있어요. 그런데 활력 징후가 심근경색이랑 안 맞습니다. 기이맥, 목정맥 팽대, 심음 감약. 이건 심낭 압전이에요. 심초음파 한 번이면 잡혔을 겁니다."
한지우의 냉소가 사라졌다.
"…심초음파는?"
"오더에서 지워졌어요." 도현이 신청서를 내밀어 보였다. "누가 지웠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지운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유족을 찾습니다. 유족이 신청하면 원본이 나옵니다."
한지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청서를 응시하는 눈이 흔들렸다. 도현은 알았다. 이 여자는 이미 뭔가를 안다. 병원 안에 지워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걸 알면서 입을 다물어온 사람의 표정이었다.
*
"3년 전이면… 나 그때 1년차였어."
한지우가 데스크에 앉아 낡은 콜 대장을 뒤졌다. 응급센터에는 전자기록이 놓치는 아날로그 흔적이 남는다. 당직 로그, 콜 대장, 인계 노트.
"찾았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이 케이스 맞지? 흉통 내원, 심근경색 의증. 당직은…" 손가락이 멈췄다. "…나였네."
도현은 그녀의 옆얼굴을 봤다.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빠졌다.
"내가 첫 진료 봤어. 근데 인계하고 올라갔거든. 위에서 케이스 가져갔어.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나는 몰라." 한지우가 콜 대장을 덮었다. "그때 인계받은 상급자가… 박태오 선생이었어."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박 선생님이 뭐라 그랬는데." 도현이 물었다.
"별말 없었어. '이건 내가 본다'고." 한지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 케이스 서명란에… 내 이름이 빠지고 박 선생 이름만 있더라. 처음엔 좋았지. 사망 케이스 책임 안 져도 되니까. 1년차한테는 그게 크거든."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와서 이상하네. 그때는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도현은 침묵했다. 회귀 전에도 이 여자는 이랬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조금씩 위에 빚을 졌다. 그 빚이 쌓여서, 몇 년 뒤 도현을 미는 진술서에 이름을 적게 만들었다. 서명하지 않으면 잘린다는 협박 앞에서.
지금이라면. 그 첫 단추를 다시 채울 수 있다면.
*
유족 연락처를 찾는 데는 한지우의 도움이 필요했다. 3년 전 응급센터 사회복지팀 인계 노트에 배우자의 이름과 새 연락처가 있었다. 문제는 그 노트가 응급센터 3년차 이상만 열람 가능한 캐비닛에 있다는 것.
"열쇠 있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한지우가 캐비닛 앞에서 망설였다. 손이 열쇠고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거… 열람하려면 상급자 서명 필요해." 그녀가 말했다. "정식 절차는 그래. 김 과장님 사인 받아야 해."
"과장님한테 이유를 뭐라고 하실 거예요."
한지우의 손이 멈췄다. 도현은 그녀의 얼굴에서 익숙한 것을 봤다. 회귀 전 진술서 앞에서 봤던 그 표정. 옳은 걸 알면서, 위에 물어봐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얼굴. 조직의 압력에 먼저 몸을 낮추는 습관.
"…서명 받고 하면 늦어." 한지우가 중얼거렸다. "박 선생 귀에 들어갈 거야. 그러면 노트도 사라지겠지." 그녀가 도현을 봤다. "너 진심이야? 이거 진짜 파겠다고?"
"환자가 살 수 있었는데 죽었어요." 도현이 말했다. "그리고 그걸 아무도 다시 안 봤어요. 3년 동안."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선생님이 첫 진료 봤잖아요. 인계만 안 했어도 초음파 오더 지워지지 않았을 거예요.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근데 지금 여기서 캐비닛을 안 열면, 그때는 선생님 잘못이 됩니다."
한지우의 눈이 흔들렸다. 오래.
그리고 열쇠를 돌렸다.
"…이거 나중에 문제 되면, 네가 다 뒤집어써." 그녀가 노트를 꺼내며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인턴이 우겨서 열었다고 할 거야."
"그러세요." 도현이 웃었다. "제가 애송이라 뭘 모르고 열었다고 하세요."
한지우가 도현을 흘긋 봤다. 낯선 것을 보는 눈이었다.
*
배우자의 이름은 서류에 남아 있었다. 새 연락처. 도현이 전화를 걸었을 때, 노년의 여자 목소리가 받았다.
성심의료원 응급센터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3년 전 남편분의 진료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고 했을 때, 수화기 너머는 한참 조용했다.
"…이제 와서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날,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줬어요." 여자가 말했다. "멀쩡히 걸어 들어간 사람이었어요. 가슴이 좀 답답하다고. 근데 몇 시간 만에… 죽었다고. 심장마비라고. 나이도 젊었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안 해줬어요. 차트를 달라니까 나중에 오라고, 나중에 오라고. 그러다 지쳐서…" 여자의 숨소리가 떨렸다. "선생님이 정말 다시 봐 주시는 거예요?"
도현의 손이 수화기를 꽉 쥐었다. 능력을 쓴 것도 아닌데, 흉강 어딘가에서 심낭이 조여 오는 그 압박이 되살아났다. 살릴 수 있었으나 놓친 환자. 3년 전, 이 여자의 남편.
"네." 도현이 말했다. "다시 봅니다. 끝까지."
*
여자는 사흘 뒤 병원으로 왔다. 응급센터 상담실. 한지우가 문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유족 열람 신청서에 서명이 채워졌다. 이제 병원은 3년 전 그 차트의 원본을 복사해 내줘야 한다. 규칙에 따라. 박태오가 손댈 수 없는 방식으로.
여자는 서명을 마치고 낡은 손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린 듯 가방을 열었다.
"이거… 그때 남편 물건 정리하다가 나온 건데." 여자가 봉투를 꺼냈다. 누렇게 바랜 서류 봉투. "병원에서 받은 것 같은데, 나는 봐도 뭔지를 몰라서요.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어요."
도현이 봉투를 받았다. 오래 눌린 종이의 냄새. 봉투를 열자 안에서 서류 몇 장이 나왔다.
맨 위 장의 상단, 로고.
성심의료원 로고. 하지만 응급센터도, 흉부외과도 아니었다. '임상연구지원센터'. 병원 밖 연구동. 조작된 데이터와 폐기된 진료기록이 보관되는 곳.
그리고 그 아래, 도현의 눈이 멈췄다.
이서린이 3년 전 취재하다 데스크에서 잘렸다던 사건. 그녀가 아직 파일로 보관 중이라던, 응급센터 원인미상 심정지 사망 건. 도현은 그 사건의 세부를 몰랐다. 이서린이 흘린 조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봉투 속 서류의 문서번호와 날짜가, 도현의 기억 속 이서린의 조각과 겹쳐 들었다.
같은 로고. 같은 시기. 같은 연구동.
한지우가 도현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보다가 얼굴이 굳었다.
"…서도현." 그녀의 목소리가 낮았다. "이거 왜 유족이 가지고 있어. 이건 병원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문서잖아."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류 하단에 찍힌 서명 도장을 봤기 때문이다. 승인자 칸. 잉크가 번진 이름 석 자.
윤재경.
3년 전, 심낭이 조여 죽은 남자의 차트가 연구동으로 넘어갔다. 승인한 사람은 흉부외과 과장. 지운 사람은 박태오. 첫 진료를 본 사람은 지금 자기 옆에 선 한지우.
도현의 손끝이 떨렸다. 이번엔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