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복도 안쪽에서 검붉은 안개가 흘러나와 세드릭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는 그것을 밟고 서 있었다. 손을 내리자 창밖 결계장의 소용돌이가 한 뼘 더 낮아졌고, 수백 명의 어린 재능들이 무릎을 꿇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늘 이 자리의 모든 감정을, 내가 거두겠다."

카일은 그 말을 듣고도 심장이 뛰지 않았다. 세라의 손이 소매를 잡아당기는 감각만 손끝에 남았다. 그는 세드릭의 텅 빈 얼굴을 마주 보았다. 벽화 중앙의 얼굴. 병을 바치던 자. 전생의 자신이 죽어가며 지었던 표정을 산 채로 완성해가는 사내.

"결승은 사흘 뒤야."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이지?"

"질문이 틀렸어." 세드릭은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완성 직전인 그릇에 마지막 한 통을 붓는 데 날짜는 중요하지 않아. 필요한 만큼 흔들리는 감정이 한자리에 모였고, 나는 그걸 봤을 뿐이야."

카일의 손이 품속 명부를 눌렀다. 그리고 다른 손이 수첩을 꺼냈다. 삼 주 전, 지하 금서고에서 발광석 불빛에 젖은 벽화를 베낀 수첩. 세 줄의 문장과, 병을 바치는 인물상.

세라가 옆에서 그의 손끝을 봤다. "그거…"

"조용히 해봐." 카일은 수첩을 폈다. 벽화 셋째 줄. 감정을 지불해본 자의 정신만 통과시킨다던 봉인 문장. 그가 그 문장을 소리 없이 읽어 내리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눈앞에서 한 줄로 꿰였다.

벽화의 첫째 줄은 '그릇'을 말하고 있었다. 둘째 줄은 '거두는 손'. 셋째 줄은 '밑바닥'—백 년간 감정을 담아온 저장고의 밑을 잠근 열쇠였다. 병을 바치는 인물상 아래에는 해독하지 못했던 문장 하나가 더 있었다. '흔들리는 것을 걷어낸 자리에 완전이 온다.'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세드릭의 뒤로 소용돌이치는 대마법진의 형태가, 벽화 속 그림과 정확히 겹쳤다.

"이제 알겠어." 카일의 목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네가 만든 건 새로운 마법이 아니야. 백 년 된 그릇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뿐이지."

세드릭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값을 매기던 눈에 처음으로 초점이 생겼다.

"넌 감정을 병에 담아 모아왔어. 이 학원 지하가 그 저장고고, 서열전은 백 년째 이어진 수확이야. 흔들리는 재능들을 한자리에 몰아넣고, 절박하게 만들고, 이기고 싶어 미치게 만든 다음 통째로 거둔다. 그렇게 모은 감정을 전부 걷어낸 자리에—흔들리지 않는 절대자가 선다. 그게 네 대마법이지."

"틀린 데가 없군." 세드릭이 손을 내렸다. "그래서?"

"그래서 이걸 저 아이들이 들어야 한다는 거야."

카일이 몸을 돌렸다. 복도 끝, 결계장으로 이어지는 아치문 너머로 무릎 꿇은 학생들이 보였다. 그 안에 리안의 붉은 머리가 있었다. 다미안이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들어라!" 카일이 소리쳤다. 목이 찢어지도록. "지금 너희 가슴을 파고드는 이 안개는 저주가 아니야. 계약이야! 아르카나 탑 제3연구부, 세드릭 발몬트가 백 년째 이 학원에서 감정을 거두고 있다. 서열전은 시험이 아니라 사냥터였어!"

무릎 꿇은 학생들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핏기 없는 얼굴로.

"증거를 대!" 리안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카일, 네 말은 늘… 늘 너무 잘 짜여 있어서 못 믿겠단 말이야!"

전형적인 리안이었다. 죽어가면서도 카일에게 지지 않으려는 눈.

"증거." 카일이 명부를 꺼내 높이 들었다. 양피지가 새벽바람에 펄럭였다. "스물세 명의 이름, 나이, 등급, 그리고 표적 감정. 진행위원회에서 아르카나 탑 제3연구부로, 다시 세드릭 발몬트로 이어지는 계통도. 정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지만—" 그가 세드릭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방금 자기 입으로 인정했어. '틀린 데가 없다'고."

세드릭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복도를 얼어붙게 했다.

"그리고 이건." 카일이 수첩을 펼쳐 들었다. "학원 지하 금서고 벽화. 백 년 전에 새겨진 거야. 감정을 병에 담아 형체 없는 자에게 바치는 그림. 이 안에 오늘의 설계도가 다 들어 있어. 너희가 흘리는 그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 백 년 동안 몇 명이 이렇게 빨려 나갔는지."

리안이 명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열여섯 살, C급, 표적 감정—'인정받고 싶은 갈망'.

"…내가 여기 있어." 리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세라 이름도 있어." 카일이 낮게 말했다. "다미안도. 나도."

세라가 명부를 낚아채 훑었다. 맨 아래, 카일의 이름 옆에 적힌 글자를 읽고 그녀의 손이 멈췄다. '관찰 대상. 서명 없이 지불 중.'

"이게 무슨 뜻이야." 세라가 물었다.

"나중에." 카일은 그녀에게서 명부를 돌려받지 않았다. 이번엔 빼앗지 않았다. "네가 들고 있어. 증인이 되어줘."

세드릭이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한 발. 안개가 그의 발밑에서 갈라졌다.

"연설은 끝났나."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없었다. "네가 뭘 폭로하든 결과는 바뀌지 않아. 저 아이들은 이미 흔들리고 있고, 흔들리는 것은 불완전이야. 두려움에 떨고, 그리움에 아파하고, 이기고 싶어 미치는—그 전부가 결함이지. 나는 그 결함을 걷어내 완전에 도달한다. 이게 뭐가 잘못이지?"

"잘못이 아니라 거짓말이야." 카일이 마주 걸었다. "감정을 걷어낸 끝에 완전이 온다고? 나는 그 끝을 봤어."

"봤다고."

"봤어. 내가 거기까지 갔으니까."

복도의 공기가 멎었다. 세라가 카일을 봤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나는 열다섯에 이 학원에 들어와서, 감정을 팔아 힘을 얻었어." 카일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릴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기쁨을 팔고, 두려움을 팔고, 사람을 향한 그리움까지 팔았지. 그때마다 강해졌어. 대륙 최강이 됐어. 아무도 나를 이기지 못했어. 그런데—" 그가 세드릭의 텅 빈 눈을 마주 봤다. "그 끝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아무도 곁에 두지 못한 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방 하나에서 혼자 무너져 죽었어. 배신당한 것도 아니고, 적에게 진 것도 아니야. 감정을 다 팔아서 사람을 전부 밀어낸 끝에 스스로 자멸한 거야."

"…카일." 세라가 속삭였다.

"그게 네가 도달한다는 완전이야, 세드릭." 카일은 손등을 들어 보였다. 붉은 자국 위에 감긴 매듭실. "감정을 걷어낸 절대자는 흔들리지 않아. 맞아. 그런데 흔들리지 않는 건 죽은 것도 마찬가지거든. 넌 지금 산 채로 그 방에 들어가고 있는 거야. 내가 죽어간 그 방에."

세드릭이 처음으로 멈춰 섰다. 텅 빈 얼굴에 아주 얕은 균열 같은 것이 스쳤다. 값을 매기는 눈이 아니라, 자신이 매겨질까 봐 경계하는 눈.

"흥미로운 헛소리군." 그가 뱉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무너지지 않아. 너는 봉인할 줄 몰랐고, 나는 안다."

"틀렸어." 카일이 웃지 않았다. 웃을 감정도 없었다. "너야말로 봉인할 줄 몰라. 그냥 계속 부어 넣을 뿐이지."

무릎 꿇었던 리안이 벽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섰다.

"…나 안 팔아." 리안이 씩씩거렸다. "내 갈망 따위, 네가 거두게 안 둬. 이건 내 거야. 내가 카일 저 재수 없는 자식을 이기고 싶은 것도 내 거고, 가문 기대에 짓눌린 것도 내 거야. 전부 내가 가지고 갈 거야."

다미안이 그 옆에 섰다. 쪽지를 스스로 찢었던 손이었다.

"나는 재능이 없어." 다미안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겁이 났고, 그래서 팔 뻔했어. 근데 저 사람이 준다는 완전이라는 거—그거 겁쟁이가 겁을 버리는 게 아니라, 겁을 느낄 자기를 버리는 거잖아. 나는 겁쟁이인 채로 남을래."

세라가 명부를 품에 넣고 카일 곁으로 왔다. 반걸음 앞이 아니라, 나란히.

"카일." 그녀가 그를 봤다. 오래 봤다. "너 방금 다 말했어. 감정 팔았다고. 혼자 죽었다고. 나한테 진짜 대답을 준 건 이게 처음이야."

"세라, 나는 아직—"

"알아. 너 나한테 아무것도 안 느끼지. 어제 말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넌 느끼지 못하면서도 나를 안 밀어냈어. 이번엔. 그거면 돼." 그녀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이번엔 네 뒤에서 지켜보지 않아. 옆에서 같이 싸울 거야. 도구로도, 감시 대상으로도 아니고—동료로."

카일은 그 말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움도, 기쁨도 팔아치운 뒤였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 말을 지키고 싶었다. 느낄 수 없어도 알 수는 있었다. 이게 전생에 잃었던 것이라는 걸.

"고마워." 그가 말했다. 짧게. "네 명부, 절대 놓지 마."

세드릭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복도 밖 결계장의 소용돌이가 그를 따라 부풀었다. 무릎 꿇은 학생들의 가슴에서 실 같은 빛이 뽑혀 나와 안개 속으로 감겨 들어갔다. 리안이 이를 악물고 버텼고, 다미안이 무릎을 짚었다.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연대는 감동적이군." 세드릭의 목소리가 안개를 타고 울렸다. "하지만 감정을 나눠 가진다고 강해지진 않아. 오히려 더 큰 그릇이 되어줄 뿐이지. 고맙다, 카일. 네가 저들을 한자리에 붙들어줬어."

카일은 손등의 매듭실을 봤다. 위기가 코앞으로 밀려오자, 봉인 안쪽에서 익숙한 유혹이 스멀거렸다. 서고를 열어라. 미래를 봐라. 세드릭의 다음 수를, 최적의 반격을 계산해라. 감정 하나만 더 지불하면—

그는 매듭실을 손톱으로 눌러 조였다.

안 돼. 여기서 열면 나는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간다. 이길지도 몰라. 그런데 이겨서 뭘 해. 이겨서 또 혼자 죽으려고?

"카일?" 세라가 그의 손등을 봤다. 붉은 자국이 화상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안 열어." 카일이 이를 악물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미래는 안 봐. 이번엔 내 눈으로만 싸운다."

그는 지팡이 대신 맨손을 들었다. 봉인술의 기초 결. 삼 주 전 금서고에서 경비진을 속였던 그 손짓. 화려하지도 압도적이지도 않은, 열다섯 살이 쓸 수 있는 마법.

세드릭이 그 손을 보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에도 물기가 없었다.

"봉인했군." 그가 카일의 손등을 정확히 짚어 말했다. "네 미래를 읽는 힘. 스스로 못질했어. 그 매듭실—어리석은 짓이야."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봐." 세드릭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결계장의 안개가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처럼 솟아올랐다. 학생들의 감정이 통째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안개는 형체를 갖춰갔다—사람의 형상도, 짐승의 형상도 아닌, 흔들리지 않는 검은 기둥. 완성 직전의 대마법.

"너는 미래를 못 읽어. 지금 이 순간, 내가 다음에 뭘 할지 넌 몰라. 네 눈, 네 판단, 네 열다섯 살짜리 손—그게 전부지." 세드릭의 텅 빈 얼굴이 카일을 정면으로 겨눴다. "나는 백 년치 감정을 거둔 완전한 존재야.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아. 너는 서고를 봉인했지? 그럼 미래를 못 읽는 지금—"

검은 기둥이 하늘을 찢으며 완성됐다. 결계장 위의 새벽이 사라지고, 학원 전체가 그 그림자 아래 잠겼다. 세라가 카일의 팔을 붙들었고, 리안과 다미안이 등을 맞대고 섰다.

세드릭이 손을 뻗어 그 검은 기둥의 끝을 카일에게로 겨눴다.

"—나를 이길 확률은 0이야."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카일과 네 사람을 향해, 백 년치 감정으로 벼려진 대마법이 통째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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