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속 얼굴이 눈을 떴다.
전생의 카일이 붉은 빛에 젖어, 백 년 묵은 석벽 안에서 그를 마주 보았다. 곰팡이 냄새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카일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봉인 자국이 화상처럼 번들거리는 손등을 바닥에 눌러, 붉은 구속진의 마디 하나를 역으로 되감았다. 발광석이 깜빡였다. 붉은 선 하나가 풀렸다. 그의 발목을 옭던 고리가 느슨해졌다.
"다미안, 왼쪽 마디!" 카일이 소리쳤다. "발광석 위에 손 얹어. 세게 누르지 말고, 그냥 얹어."
다미안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진의 세 번째 마디가 죽었다. 로젤린을 옭던 고리까지 풀리며, 세 사람이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로젤린이 먼저 일어섰다. 손등의 붉은 자국이 아직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카일을 내려다봤다.
"봉인술로 잠식자의 진을 풀다니." 그녀의 목소리는 우아했다. 우아하려고 애쓰는 티가 났다. "재밌네. 너, 미래를 볼 수 있잖아. 그 책 있잖아. 왜 안 열어?"
카일의 손등이 뜨거워졌다. 정신 깊은 곳에서 표지가 손끝에 닿았다. 열면 이 여자의 다음 수를, 감정 거래의 뿌리를, 세드릭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전부—
그는 손을 뗐다.
"안 열어."
"거짓말." 로젤린이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너도 나처럼 잠식자의 개야, 카일 도렌시아. 다만 넌 그걸 모르는 척할 뿐이지. 그 책, 쓸 때마다 뭘 지불하는지 알잖아. 나는 손등에 서명을 새겼고, 너는—" 그녀가 그의 손등을 턱으로 가리켰다. "너는 그 자국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달고 다녀. 우리는 같은 목줄을 찬 개 두 마리야. 목줄을 쥔 손이 같은지 다른지 모를 뿐."
지하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다미안이 벽에 등을 붙인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카일은 일어섰다. 허벅지 상처에서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 통증은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두려움을 지불한 대가로,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 개끼리 얘기 좀 하지."
로젤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넌 진행위원 재량으로 서열전 대진을 짰어. 나를 이인 대 일 안개 결계에 처넣었지. 학원 진행위원한테 그런 권한이 있던가? 없어. 그건 탑에서 인가한 자격이야." 카일은 한 걸음 다가섰다. "몰락한 아스타드 가문의 딸이 어떻게 아르카나 탑의 인가 자격을 받아? 누가 줬어?"
로젤린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아까와 같은 지점에서, 같은 방식으로.
"넌 방금 나한테 화가 나서 잠식자 얘길 다 뱉었어." 카일이 밀어붙였다. "이제 논리로 물어. 명단 조작 권한. 그건 학원장 결재가 아니라 탑 고위 파벌의 직인이 필요한 일이야. 그 파벌이 널 여기 심었어. 널 진행위원 자리에 앉히고, 재능들을 사냥터로 몰아넣게 했어. 세드릭 발몬트도 그 파벌이지?"
"…네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 카일은 웃지 않았다. 웃음은 첫날에 잃었으니까. "그 시스템이 백 년째 굴러가고 있으니까. 벽화가 백 년 전 거잖아."
**
로젤린이 처음으로 침묵했다.
그녀는 벽화를 돌아봤다. 붉은 빛이 서서히 잦아들며, 전생의 카일 얼굴이 다시 석벽 속으로 가라앉았다. 감정을 병에 담아 바치는 무릎 꿇은 인물. 백 년 전 누군가가 이 그림을 새겼고, 그 얼굴은 하필 카일의 것이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로젤린이 낮게 말했다. 조롱이 아니었다. 거의 연민에 가까웠다. "저 얼굴이 왜 네 얼굴인지도 모르지. 넌 그냥 어느 날 그 책을 손에 쥐게 된 거고, 재수 좋게 천재가 됐고—"
"책은 누가 줬어?"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지?"
카일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다미안이 흠칫했다. 그러나 카일의 손이 향한 건 다미안이 아니라, 로젤린의 로브 안주머니에서 삐죽 나온 양피지 모서리였다. 아까 구속진이 풀리며 그녀가 무릎을 찧을 때, 그 충격에 밀려나온 것.
"그건—" 로젤린이 손으로 가슴을 덮었다.
늦었다. 카일의 봉인 마력이 이미 그 양피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종이가 그녀의 로브에서 미끄러져 그의 손바닥으로 날아왔다. 로젤린이 붉은 선을 쏘려 했지만, 손등의 자국이 아직 진을 풀며 소진된 뒤였다. 마력이 응축되다 흩어졌다.
카일은 양피지를 폈다.
명단이었다. 이름 스물세 개. 옆에 나이, 등급, 그리고 감정 항목—'집착', '분노', '애정', '두려움'. 표적으로 삼은 감정이 각자 표시돼 있었다. 다미안 크로프트, 열여섯, 3급, '외로움'. 세라피나 로크웰, 열다섯, 2급, '충성'. 그리고 맨 아래—
카일 도렌시아. 표적 감정 칸은 비어 있었다. 대신 붉은 글씨로 한 줄. *관찰 대상. 서명 없이 지불 중.*
"이게 사냥 명부구나." 카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이건—" 그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 계통도가 그려져 있었다. 학원 진행위원회. 그 위로 화살표. 아르카나 탑 제3연구부. 그 위로 또 화살표, 지워진 이름 하나. 그 옆에 온전히 남은 이름. **세드릭 발몬트.**
"이게 왜 네 주머니에 있어?"
"내 임무 명령서니까." 로젤린이 이를 악물었다. "됐어? 만족해? 나는 아스타드를 재건하려고 저들과 거래했어. 감정 대신 힘을 받았고, 힘 대신 임무를 받았어. 임무는 너였어, 카일 도렌시아. 너를 견제하고, 너를 사냥터에 붙잡아두는 것. 저 명부의 스물세 명이 다 잡히기 전까지."
"내 감정 칸은 왜 비어 있지?"
로젤린이 그를 오래 바라봤다.
"네가 이미 지불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속삭였다. "저들이 너한테 판 게 아니야. 너는 스스로 팔고 있어. 그 책으로. 우리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너는 도장도 없이 매일 조금씩 스스로 갖다 바쳐. 저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종류의 개가 그거야. 목줄 없이도 알아서 무릎 꿇는 개."
침묵이 지하를 채웠다. 다미안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명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세드릭 발몬트." 그가 이름을 곱씹었다. "이자가 파벌의 정점이야?"
"파벌의 정점은 이름이 지워져 있어. 나도 몰라." 로젤린은 벽에 등을 기댔다. 지쳐 보였다. "하지만 세드릭이 곧 완성해. 감정을 모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재능 있는 애들 감정을 스물세 개, 서른 개 모아서 뭘 하려고. 대마법이야.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 마법. 완성되면—" 그녀가 카일을 봤다. "너 같은 게 백 명 있어도 못 막아. 그자는 두려움도, 미련도, 자비도 없어질 테니까. 너처럼."
카일의 가슴 어딘가가 조여들었다. 아직 남아 있는 감정 하나가 반응한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그도 확신하지 못했다.
**
지하에서 나왔을 때는 새벽 세 시였다.
다미안은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로젤린은 지하에 남겠다고 했다—돌아갈 곳이 없다는 듯이. 카일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명부를 손에 넣은 이상, 이제 필요한 건 그녀가 아니라 이 종이 한 장을 어떻게 쓰느냐였다.
폭로해야 한다. 아르카나 탑 제3연구부. 세드릭 발몬트. 감정 거래의 사냥 명부. 학원 진행위원회가 사냥터라는 증거. 이걸 이자벨라에게, 아니 탑의 감사부에 넘기면—
그때 회랑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어디 갔다 와."
세라피나였다. 잠옷 위에 로브만 걸치고,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붉은 머리가 새벽 어스름 속에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일은 걸음을 멈췄다. 명부를 품 안 깊이 밀어 넣었다. 반사적으로.
"과제 자료 찾으러." 그가 말했다.
세라피나의 눈이 그의 허벅지로 내려갔다. 로브 자락에 배어 나온 핏자국.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과제 자료가 널 찔렀어?"
"넘어졌어."
"카일." 그녀가 한 발 다가섰다. "나 지금 되게 참고 있어.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했지. 세 번. 어디 갔다 왔는지, 뭘 하고 왔는지, 왜 피를 흘리는지. 전부 거짓말이야."
카일은 그녀를 봤다. 세라피나 로크웰. 명부에 '충성'이라 적혀 있던 이름. 저들이 그녀에게서 뽑아내려는 감정. 만약 카일이 지금 이 명부를 그녀에게 보여주면—그녀는 위험에 걸어 들어올 것이다. 세드릭의 표적 명단에 이름이 오른 채, 폭로전 한복판으로.
"너까지 위험하게 할 순 없어." 카일이 말했다. 목소리가 담담했다. 너무 담담해서 스스로도 이상했다. "이건 내가 처리할 일이야."
세라피나가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이건 내 일이라고. 넌 몰라도 돼. 알면 위험해져. 그러니까—"
"그러니까 넌 또 나를 빼놨네."
세라피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를 낼 때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해졌다. 그게 더 무서웠다.
"다미안 쪽지 뺏으려던 그날 기억나? 내가 그때 뭐랬어. 사람을 도구 취급 하지 말라고 했지. 근데 넌 지금 반대로 하고 있어. 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내가 뭘 알지 뭘 할지를 네가 정해. 내 선택을 네가 미리 없애버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게 지키는 거야? 그건 그냥 나를 치우는 거야."
"세라—"
"넌 나한테 물어본 적 없어. 위험해도 함께 할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안전한 게 나은지. 한 번도 안 물어봤어." 그녀의 눈이 젖어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너 그거 알아? 넌 사람을 지키는 방식이 꼭—꼭 뭘 정리하는 것 같아. 서류 치우듯이. 이건 위험 요소, 저건 변수, 여긴 두면 안 됨. 나를 그렇게 봐."
카일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반박할 말이 있어야 했다. 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없었다.
"전생에도 이랬던 거 아냐?" 세라피나가 물었다.
카일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뭐?"
"아니, 말이 이상하네." 그녀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나도 모르겠어. 근데 너 볼 때마다 그 말이 목까지 차. 너 이런 사람이었잖아, 하는 말. 예전에도 이렇게 사람을 치웠잖아, 하는 말.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어디서 본 얼굴 같고, 어디서 겪은 일 같고."
그녀는 명부를 향해, 정확히는 카일이 명부를 숨긴 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뭘 숨기는지 안 물을게. 대신 이거 하나만 답해. 지금 그거, 나 없이 혼자 할 거야?"
카일은 답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같이 하자'고. 명부를 꺼내 펼치고, 그녀의 이름이 적힌 칸을 보여주고, 함께 이 사냥터를 부수자고 말할 수 있었다. 입만 열면 됐다.
"…혼자 할 거야." 그가 말했다. "미안."
세라피나는 오래 그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천천히, 무언가를 자기 안에서 접어 치우듯이.
"그래. 알았어." 그녀가 돌아섰다. "다신 안 물을게."
발소리가 멀어졌다. 회랑 끝에서 문이 닫혔다. 카일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명부는 품 안에서 여전히 뜨거웠다. 이걸로 세드릭을 무너뜨릴 수 있다. 잠식자의 사냥터를 폭로할 수 있다. 스물세 명을 구할 수 있다. 계산은 완벽했다. 논리에 빈틈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텅 빈 느낌이 드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방에 돌아온 카일은 촛불을 켜지 않았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손등의 자국을 들여다봤다. 화상처럼 번들거리는 붉은 흉터. 로젤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목줄 없이도 알아서 무릎 꿇는 개.* 그는 오늘 서고를 열지 않았다. 지하에서도, 세라 앞에서도. 그건 이긴 거였다. 그런데 이긴 것 같지 않았다.
세라피나. 그녀가 돌아서던 뒷모습. 조여드는 게 있었다. 지하에서도 느꼈던, 아직 남아 있는 감정 하나. 그게 그녀 때문에 반응한다면—아직 슬픔이 남아 있다면—그럼 괜찮은 거였다. 그건 그가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확인하고 싶었다.
카일은 눈을 감았다. 세라피나를 떠올렸다. 전생의 세라피나.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그를 향해 웃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가 그를 부르던 방식, 그를 믿어주던 순간들. 함께 걸었던 회랑, 함께 봤던 별, 그녀가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카일은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세라피나. 붉은 머리. 직설적인 말투. 화날 때 조용해지는 버릇. 그를 '사람 같지 않다'고 하던 그 눈. 다시 만났을 때 가슴이 조이던 그 감각—
없었다.
기억은 있었다. 사실로서. 정보로서. 세라피나 로크웰, 전생의 동료, 그가 이용했고 잃었던 사람. 이름도, 얼굴도, 사건도 전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떠올렸을 때 가슴을 조이던 것—그리움—그게 사라져 있었다. 병에서 무언가를 따라낸 것처럼. 방금 전까지 있던 것이, 손을 대보니 텅 비어 있었다.
카일의 손이 떨렸다.
언제였지. 오늘. 지하에서 서고를 열지 않았는데. 두려움은 5화에 잃었고, 기쁨은 회귀 첫날 잃었고—그럼 이건. 이 그리움은. 언제 지불한 거지. 나는 오늘 책을 열지 않았는데.
*너는 도장도 없이 매일 조금씩 스스로 갖다 바쳐.*
로젤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카일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벽에 손을 짚었다. 심장이 뛰어야 했다. 이건 경악해야 할 일이었다. 회귀의 목적, 감정을 지키는 것, 세라의 신뢰를 되찾는 것—그 전부의 뿌리인 감정이 지금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그 경악조차, 그는 머리로만 알 뿐이었다.
가슴은 고요했다. 물을 다 따라낸 병처럼.
그는 세라의 이름을 소리 내 불러봤다.
"세라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품속에서 명부가 부스럭거렸다. 스물세 개의 이름. 그중 한 칸에 적힌 '충성'. 그녀에게서 뽑아낼 감정. 카일은 문득 깨달았다—저들이 세라에게서 충성을 뽑아내기 전에, 그가 먼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다 써버린 거였다.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밀어내면서, 그 밀어냄의 순간마다.
방문 밖에서 새벽 종이 울렸다. 다섯 시. 카일은 창밖을 봤다. 세라의 방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도 잠들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 불빛을 오래 바라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채로. 그것이—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처음으로, 무섭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