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리안이 결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봉인이 발밑 회로를 틀어막자 다음 화염이 손끝에서 흩어졌다. 심판의 손이 올라갔다.

"승자, 카일 도렌시아."

관중석에서 소리가 터졌다. 카일은 리안을 내려다봤다. 그 얼굴에 분한 기색보다 당혹이 짙었다. 봐주지 말라더니, 정작 봐주지 않은 방식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카일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봉인을 풀어주는 손짓만 하고 돌아섰다.

그 앞에 로젤린 아스타드가 서 있었다.

우아하게 접힌 부채 대신, 손에는 얇은 양피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눈높이까지 들어 팔랑, 흔들었다.

"축하해. 첫 라운드 정도야 뭐."

"용건."

"다음 상대는 네가 절대 못 이길 조건으로 짜뒀어." 로젤린의 입꼬리가 자로 잰 듯 올라갔다. "대진표 편성 권한, 내가 이번 서열전 진행위원이거든.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고."

카일은 그 양피지를 봤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조건이. 관중석의 소음이 멀어졌다.

"'차폐 결계장, 시야 삼분의 일 제한, 상대 두 명, 카일 단독.'" 로젤린이 낭독하듯 읽었다. "이인 대 일. 게다가 상대는 은신에 능한 그림자 계열 형제야. 안개 속에서 뒤를 잡히면 넌 아무것도 못 하고 탈락이지."

"규정 위반 아닌가."

"규정 안에 있는 조합이야. 진행위원 재량 항목." 그녀는 양피지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너, 입학식에서 삼백 명 구했다며. 그 재능, 안개 속에서도 통하나 보고 싶어졌어."

카일은 그 눈을 오래 봤다. 견제. 하지만 개인적 원한의 색이 너무 짙었다. 로젤린 아스타드가 왜 이토록 자신을 정확히 겨누는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카일이 등을 돌렸다.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

두 번째 라운드는 사흘 뒤였다.

그 사흘 동안 카일은 차폐 결계의 구조를 팠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결계학 기본서를 뒤졌고, 그림자 계열 마법의 발동 잔향을 복기했다. 안개 결계는 시야만 가리는 게 아니라 소리와 마력 파동까지 뭉갠다. 상대는 둘. 은신, 그리고 협공. 백 년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이 조건에서 순수 실력만으로 이길 확률은 반을 넘지 못했다.

결계장 문 앞에서 그는 손등을 봤다. 봉인을 되감을 때 생긴 붉은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열지 마.'

그렇게 되뇌었다. 세라피나의 얼굴이 스쳤다. 사람 같지 않다고 했던 그 말. 물러설 줄 안다며 조금 누그러졌던 눈. 벽화 속 무릎 꿇은 얼굴. 그 전부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서고를 여는 순간, 그 줄 위에서 한 칸 전진한다는 걸 그는 알았다.

문이 열렸다.

안개가 결계장 전체를 삼키고 있었다. 세 걸음 앞이 뿌옜다. 발밑의 돌바닥 감촉조차 흐릿하게 뭉개졌다. 심판의 목소리가 안개 어딘가에서 울렸다.

"개시."

*

첫 일격은 왼쪽 어깨 뒤에서 왔다.

카일은 몸을 틀었지만, 그림자 화살이 옷을 찢고 지나갔다. 두 번째가 곧바로 오른쪽에서. 형제는 서로 대각으로 움직이며 그를 가운데 두고 조여왔다. 소리도 마력 파동도 안개에 먹혀, 방향을 잡을 단서가 없었다.

세 번째 화살이 허벅지를 스쳤다. 피가 배어 나왔다.

'이대로는 진다.'

계산이 끝났다. 순수 실력으로는, 이 안개 안에서 두 은신자를 상대로 반응만으로 버틸 수 없다. 한 번, 딱 한 번만—.

정신 깊은 곳의 책이 스스로 펼쳐졌다. 카일은 막지 않았다.

책장이 넘어갔다. 오 초 뒤의 장면. 왼쪽 형—키가 큰 쪽이 결계장 북동 기둥 뒤에 숨어 다음 화살을 재고, 오른쪽 동생은 남쪽 벽 균열에 붙어 협공 신호를 기다린다. 두 위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복 지점. 좌표까지.

그리고 대가가 왔다.

가슴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도려내졌다. 소리도 통증도 없었다. 다만 방금까지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것—적의 화살이 스칠 때마다 온몸을 조이던 그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피 흐르는 허벅지가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긴장. 두려움.

전투 중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그것이, 통째로 빠져나갔다.

카일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잃었는지 알았다. 3화에서 붙들었던 것. 남은 인간성의 증거라 불렀던 그 두려움. 그것이 이제 없었다. 안개 속에서 그의 사고는 얼음처럼 매끄럽게 정렬됐다. 상대의 위치는 안다. 좌표대로 반격하면 끝이다. 계산에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북동 기둥을 향해 몸을 던졌다. 손끝에 봉인 회로를 그리며.

기둥 뒤에.

아무도 없었다.

카일은 멈췄다. 좌표에 도달했는데, 큰 형은 거기 없었다. 화살을 재던 그 실루엣이, 그 위치가—텅 비어 있었다.

'…어긋났다.'

책이 보여준 장면과 현실이 달랐다. 오 초 뒤를 정확히 봤다고 확신했는데, 그 확신이 통째로 빗나갔다.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정확히 예언과 반대 방향에서, 그림자 화살 두 발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형제는 북동과 남쪽이 아니라, 둘 다 그의 뒤—서쪽 회랑에 있었다.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면, 이 순간 몸이 먼저 얼어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어붙을 감정이 없었다. 그래서 카일의 사고는 오히려 냉정하게 굴러갔다.

'서고가 틀렸다. 그럼 서고를 버린다.'

그는 예언을 지웠다. 대신 눈앞의 것만 봤다. 화살 두 발이 날아든 궤적—그 궤적이 시작된 지점의 각도. 안개가 소리를 먹어도, 화살이 안개를 가르며 만든 미세한 밀도 차이가 있었다. 카일은 백 년간 수천 번 봤던 그림자 마법의 발동 순간을 떠올렸다. 은신자는 화살을 쏜 직후 반드시 반 보 위치를 옮긴다. 발사 반동을 죽이기 위해서.

지금이었다.

카일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발밑 돌바닥 전체에 봉인 회로를 넓게 깔았다. 4급 봉인을 되감던 그 기술을, 이번엔 좁은 대상 하나가 아니라 결계장 서쪽 절반의 마력 흐름 전체에 걸었다. 은신 마법은 마력으로 그림자를 두르는 기술이다. 그 마력의 흐름을 통째로 얼리면—.

안개 속에서 두 개의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은신이 강제로 풀린 형제가, 서쪽 회랑 벽에 등을 붙인 채 드러났다. 카일이 예언에서 본 위치와 정반대. 그러나 이제 그는 예언을 보고 있지 않았다. 눈앞의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뒤에 있었구나." 카일이 조용히 말했다.

큰 형이 급히 화살을 재려 했지만, 봉인이 발밑 회로를 막아 마력이 흩어졌다. 리안 때와 같았다. 다른 점은, 이번엔 상대가 둘이었고 카일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

동생이 단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카일은 반 보 물러섰다. 단검이 지나갈 자리를 계산하고, 그 손목의 회로를 짚어 봉인했다. 단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큰 형이 그 틈에 접근했다. 카일은 그 발디딤을 봤다—예언이 아니라, 눈으로. 왼발이 먼저 나갔다. 그는 상대의 중심이 실린 왼쪽으로 파고들어, 소매를 잡아 방향을 비틀었다.

두 형제가 서로에게 엉켰다.

카일은 그 위에 마지막 봉인을 얹었다. 두 사람을 묶는 붉은 선 진. 지하 금서고 경비진에서 봤던 그것의 응용이었다.

안개가 걷혔다.

결계장 바닥에 두 형제가 나란히 묶여 있었다. 카일은 그 가운데 서 있었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의 표정에는 승리도 안도도 없었다.

"승자, 카일 도렌시아."

관중석이 다시 터졌다. 이번엔 아까보다 컸다. 이인 대 일, 시야 제한, 안개 속에서의 압승. 로젤린이 짠 절대 못 이긴다는 조건을 정면으로 뒤엎은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웃지 않았다. 웃을 기쁨도, 이겨서 놓여난다는 안도도, 이제 그의 안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방금 이인 협공을 안개 속에서 상대하고도, 심장은 여전히 느리고 고르게 뛰었다.

'서고가 틀렸다.'

그 사실이 승리보다 무거웠다. 오 초 뒤를 봤는데, 그 위치가 통째로 빗나갔다. 회귀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그 규칙이, 이제 그를 겨눴다. 열람할수록 정보는 왜곡되고, 확신할수록 오차가 커진다.

'다음번엔 얼마나 어긋날까.'

그는 이제 서고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감정을 대가로 지불하고도, 얻은 정보가 거짓일 수 있다. 최악의 거래였다. 대가는 확실히 빠져나가고, 이익은 불확실하다.

*

결계장 밖 통로에서 세라피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가 횃불 빛에 흔들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카일이 나오자 몸을 세웠다.

"이겼네."

"봤으면 알잖아."

"봤어." 세라피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카일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그의 허벅지 상처를 스쳤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안개 속에서 화살 세 발 맞았어. 허벅지 찢어졌고. 그런데 넌 한 번도 안 움찔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살이 뒤에서 날아오는데, 사람이 어떻게 안 놀라?"

"놀랄 여유가 없었어."

"거짓말." 세라피나가 잘라 말했다. "여유 없는 거랑 안 놀라는 거는 달라. 여유 없는 사람은 손이 떨려. 넌 안 떨렸어. 마지막에 걔네 둘 묶을 때, 넌… 벌레 밟는 사람처럼 굴었어."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봉인을 얹던 순간, 그의 안에는 승부의 열기도, 상대를 제압하는 긴박함도 없었다. 두 사람을 정확한 좌표에 배치하고 묶는, 작업 하나였다.

"입학식 날엔 삼백 명 구하고도 안 기뻐했지. 오늘은 둘을 안개 속에서 잡고도 안 무서워했고." 세라피나가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의심 많은 그 눈에, 오늘은 의심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너 점점… 그때처럼 변하고 있어."

"그때?"

"몰라. 그냥, 그렇게 느껴져." 그녀가 팔짱을 다시 꼈다. 스스로도 자기 말에 놀란 표정이었다. "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어디선가 본 얼굴 같았어. 그리고 그 얼굴이… 무섭게 변하고 있어. 뭘 이길 때마다, 사람이 한 겹씩 벗겨지는 것처럼."

카일의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그녀는 몰랐다. 전생을. 자신이 세라피나를 방패로 세워 죽게 만든 것을. 그런데도 그녀의 감각은 진실을 향해 있었다. 이길 때마다 한 겹씩 벗겨진다. 정확히 그랬다. 오늘, 두려움 한 겹이 벗겨졌다.

"세라." 그가 입을 열었다. 진짜 대답을 하려 했다. 2화에서 그녀가 예고했던, 다음엔 진짜 대답을 듣겠다던 그 대답을.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길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잃는다고? 그건 도구로 쓰는 것보다 더 무거운 고백이었다.

"됐어." 세라피나가 먼저 물러섰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근데 이건 기억해. 난 도구로 안 쓰인다고 했지만—" 그녀가 돌아서다 멈췄다. "네가 너 자신을 도구로 쓰는 것도, 옆에서 보기 힘들어."

그녀가 통로 저편으로 걸어갔다. 붉은 머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일은 그 자리에 남았다. 손등의 붉은 자국을 내려다봤다. 남은 감정이 무엇인지 헤아려봤다. 기쁨—없다. 두려움—오늘 없어졌다. 슬픔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 어딘가가 여전히 조이는 걸 느꼈다. 아직 있었다. 그 하나가 남아 있는 한, 벽화 속 얼굴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그는 돌아서 걸었다. 승리했지만, 이긴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그때, 통로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급하게 달려왔다.

"카일!"

다미안이었다.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얬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다정하던 눈매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그는 카일의 팔을 붙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찾았어, 계속 찾았어. 너한테…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진정해. 무슨—"

"나," 다미안이 침을 삼켰다.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다. 눅눅한 양피지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나 오늘 밤 그 계약, 하기로 했어."

카일의 시간이 멈췄다.

"자정에. 지하에서 만나자고 했어. 대가는 하나만 달래. 내가 제일 안 쓰는 거 하나만." 다미안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재능이 없어, 카일. 나 여기서 못 버텨. 근데… 근데 왜 너한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말리라고 하는 건지, 허락받으려는 건지."

카일은 그 얼굴을 봤다. 전생에 자신을 잠식자에게 팔아넘긴 그 얼굴이, 지금은 스스로 팔려 가려 하고 있었다. 그를 막을 것인가. 아니면—그의 선택을 존중할 것인가. 자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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