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밀랍이 손등에서 굳었다. 카일은 그것을 떼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수첩을 노려보았다. 목탄 선이 만든 얼굴은 지워지지 않았다. 무릎 꿇고 병을 든 자. 백 년 전 벽에 새겨진, 다 자란 자기 자신.

'왜 내가 거기 있지.'

이번 생의 그는 아직 열다섯이다. 서고를 각성한 지 며칠. 잠식자의 계약에 손댄 적도 없다. 그런데 백 년 된 벽화가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마치 그가 걸어갈 길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촛불이 사그라들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남아 있던 두려움조차 얼어붙은 자리에서, 그는 오히려 그 두려움을 손으로 눌러 붙들었다.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귓속에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은 딱 한 번만 멈췄으면 됐어.

멈출 수 있다. 벽화가 미래라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카일은 수첩을 덮었다. 세 줄째, 해독 안 된 이름 같은 문장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지금 그것을 알아내려 서고를 열면, 벽화 속 얼굴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뿐이다.

동이 텄다.

*

이틀 뒤, 학원 중앙 게시대 앞은 사람으로 막혀 있었다.

"떴다, 서열전!"

누군가 외치자 신입생들이 몰려들었다. 카일은 뒤쪽에서 게시판을 올려다봤다. 붉은 봉인지 위에 금박으로 새긴 공고문. 신입 전원 참가. 승수에 따라 학년 서열이 매겨지고, 서열은 실습실 우선권과 아르카나 탑 추천에까지 직결된다. 순수 마법 실력만으로 매겨진다는 문장이 굵게 강조돼 있었다.

카일은 명단으로 눈을 옮겼다. 조 편성표. 그의 이름을 찾아 손가락으로 훑던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카일 도렌시아."

돌아보니 상급생 하나가 서 있었다. 은발을 단정히 틀어 올린 여학생. 가슴에 3학년 정리위원 배지를 달았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편성 담당 로젤린 아스타드야." 그녀가 명단 두루마리를 살짝 흔들었다. "네 조가 조금 바뀌었어. 신입 최고 성적자는 초반부터 강한 상대와 붙는 게 관례거든. 축하해. A조 1번."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A조는 상위 후보들이 몰린 죽음의 조였다. 신입이 첫 라운드부터 배정될 자리가 아니었다.

"관례라고요." 카일은 두루마리를 봤다. "편성은 무작위 추첨 아니었습니까."

"조정 권한은 정리위원에게 있어." 로젤린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실력자를 일찍 시험하는 게 학원엔 이득이니까. 불만이면 정식으로 이의를 넣든가."

그녀는 두루마리를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 돌아섰다. 향수 냄새가 스쳤다. 카일은 그 등을 눈으로 좇았다.

이상했다.

편성 조정 권한. 신입의 명단을 특정해 갈아엎을 수 있는 재량. 전생의 기억을 뒤져봐도 정리위원은 명단을 정서하고 게시하는 잡무 담당이었다. 무작위 추첨 결과에 손을 댈 권한 따위 없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그 권한을 준 것이다. 학원 규정 밖에서.

'평범한 상급생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리고 방금, 그녀는 명단의 수많은 이름 중 정확히 그의 이름을 지목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카일은 게시판을 다시 봤다. A조 1번, 카일 도렌시아. 그 아래 상대들의 이름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첫 상대는—

"리안 하이베른."

이름을 소리 내 읽은 건 카일이 아니었다. 옆에서였다.

*

리안은 팔짱을 낀 채 게시판 앞에 서 있었다. 명문 하이베른가의 셋째. 늘 여유로운 웃음을 걸치고 다니는 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 웃음은 어딘가 딱딱했다.

"우연이네." 리안이 카일을 돌아봤다. "첫 상대가 너라니. 로젤린 선배가 나름 신경 써준 건가."

"신경 쓴 건 확실하지." 카일이 대꾸했다.

리안은 그 말의 무게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한 발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억눌린 것이 새어 나왔다.

"입학식 때 말이야. 결계 봉합, 네가 했다며. 삼백 명 구했다고 다들 떠들더라." 리안의 턱이 굳었다. "그날부터 학원이 네 이름만 부른다. 우리 형들도 편지에 썼어. 하이베른가 셋째가 도렌시아 신입한테 밀린다더냐고."

"난 밀리라고 한 적 없는데."

"닥쳐." 리안이 카일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짚었다. "난 지름길 안 탔어. 후원도, 뒷거래도 안 받았다. 아침마다 손이 터지도록 마력 회로를 그렸어. 그런데 넌—" 그의 눈이 흔들렸다. "넌 그냥 한 번에 삼백 명을 구했지. 그게 재능이라면, 난 그 재능을 부숴서라도 이겨야겠어."

결계장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카일은 자신의 호흡부터 셌다. 서고를 열지 않겠다는 건 이 순간 아무것도 미리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리안이 어느 손으로 첫 주문을 짤지, 어느 각도로 파고들지, 전생의 기억에도 이번 생의 예언에도 답은 없었다. 오직 지금 눈앞의 소년을 읽어야 했다.

리안이 결계장 반대편에 섰다. 손등에 마력 회로가 붉게 떠올랐다. 아침마다 터지도록 그렸다던 그 회로였다. 거짓이 아니었다. 선의 밀도가 촘촘했고, 마력의 흐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지름길을 타지 않은 자의 손이었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카일은 속으로 정정했다. 리안은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 재능을 믿지 못하는 자였다. 그 불신이 그를 게시판 앞에서 굳게 만들고, 형들의 편지 앞에서 무너지게 하고, 언젠가 익명의 쪽지를 주머니에 넣게 만들 것이었다.

개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화염 창 셋이 동시에 갈라져 날아왔다. 빠르고 정확했다. 카일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면 리안의 리듬에 끌려간다. 그는 첫 창을 봉인 격자로 흩고, 둘째 창을 몸을 틀어 흘렸다. 셋째 창이 옆구리를 스쳤다. 뜨거움이 옷자락을 태웠지만—두려움은 남아 있었고, 그 두려움이 그를 살아 있게 했다. 세드릭 같은 텅 빈 얼굴이었다면 이 창 앞에서 필사적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봐주지 말라며." 카일이 옷자락의 불씨를 눌러 껐다. "너야말로 아끼고 있잖아."

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세 번째 창. 힘을 절반만 실었어. 날 다치게 하기 싫었나, 아니면 겁이 났나." 카일이 앞으로 한 발 디뎠다. "이기고 싶다면서 왜 손을 사려."

그 말이 급소를 찔렀다. 리안의 얼굴이 붉게 달았다. 이번엔 아끼지 않았다. 회로 전체가 타오르며 화염 폭풍이 결계장을 삼켰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열기가 카일의 눈썹을 그슬렸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전생의 카일이라면 서고를 열었을 순간.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라던 이자벨라의 말이 목 안쪽에서 울렸다. 그는 손을 내렸다. 봉인술 하나면 됐다. 폭풍이 아니라, 폭풍을 만드는 회로 자체를 읽었다. 리안의 마력 흐름은 지나치게 정직했다. 힘을 쏟을수록 회로의 이음새가 팽팽해졌고, 팽팽해진 지점은 무너지기 쉬웠다.

카일은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피부가 익는 감각을 삼키며, 리안의 왼쪽 손목—회로가 가장 조여든 지점에 봉인 매듭을 던졌다. 격자가 손목을 감았다. 흐름이 끊겼다.

폭풍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흩어졌다.

격자가 조여든 손목에서 마력이 역류했다. 리안은 이를 악물고 남은 회로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불씨 하나가 피어났다. 마지막 저항이었다.

카일은 그 불씨를 봤다. 꺼뜨리는 건 쉬웠다. 봉인 하나면 됐다. 하지만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리안이 스스로 그 불씨를 어떻게 다룰지, 그것까지 빼앗고 싶지 않았다.

"쏘고 싶으면 쏴." 카일이 말했다. "말리지 않아."

리안의 손이 멈췄다. 불씨가 손끝에서 흔들렸다. 카일의 옷깃은 이미 그슬렸고, 옆구리의 스친 상처에선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이 거리에서 정통으로 맞으면 카일도 무사하지 못했다.

리안은 카일의 얼굴을 노려봤다. 피할 자세조차 잡지 않은 얼굴. 계산이 아니라, 정말로 맡긴 얼굴이었다.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리안이 손을 내렸다. 손등의 붉은 자국이 저릿하게 떨렸다. "왜…… 안 막았어."

"막을 수 있었지." 카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그건 네 불이잖아. 네가 끄든 쏘든, 그건 네가 정할 일이야."

리안이 숨을 삼켰다. 그의 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이기려고 달려온 상대가, 이겨 놓고도 자신의 선택 하나를 남겨 뒀다는 사실 앞에서.

리안이 무릎을 꿇었다. 끊긴 회로가 손등에서 붉게 저렸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카일을 올려다봤다. 승부는 끝났다. 관중석은 조용했다.

카일은 손을 뻗어 리안을 일으켜 세웠다. 리안이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뿌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넌 강해." 카일이 낮게 말했다. "아침마다 그린 회로, 거짓 아니잖아. 방금 그 폭풍, 후원도 뒷거래도 없이 네 손으로만 만든 거야."

리안의 입술이 떨렸다. "그런데도 졌어."

"졌지. 나한테. 이번엔." 카일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넌 계약 같은 지름길 없이도 여기까지 왔어. 그게 진짜 재능이야. 누가 편지에 뭐라고 쓰든, 네 손에 새겨진 건 아무도 못 가져가."

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분함이 목까지 차오른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분함 사이로, 처음 보는 것이 스쳤다. 흔들림.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름길 없이도……" 리안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결계장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일은 그 얼굴을 봤다. 승부욕 뒤에 눌린 것이 있었다. 가문의 기대. 형들의 편지. 재능 없이도 성적을 올려준다는 익명의 제안—전생에 다미안이 받았던 것과 같은 손길이, 언젠가 이 소년의 주머니에도 닿을지 몰랐다. 리안 하이베른은 정확히 잠식자가 좋아하는 표적이었다. 절박하고, 자존심 강하고, 지름길을 증오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갈망하기 직전인 자.

"정식으로 신청한다." 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첫 라운드, 나랑. 봐주지 마."

카일은 그 손을 잡았다.

"봐줄 생각 없어."

*

서열전 첫 라운드는 원형 결계장에서 열렸다. 관중석이 신입들로 가득 찼다. 세라피나가 앞쪽 난간에 팔을 걸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붉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카일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표정 없이 턱을 까딱했다. 이겨봐, 라는 건지, 도구로 안 쓰나 보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심판이 개시를 알렸다.

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화염 계열. 손바닥에서 불꽃이 세 갈래로 뻗어 나와 카일의 양옆과 정면을 동시에 노렸다. 빠르고, 정확했다. 아침마다 손이 터지게 그렸다는 회로는 거짓이 아니었다. 세 갈래의 각도가 완벽했다.

카일의 안쪽에서 익숙한 감각이 스쳤다. 위기. 그 순간 정신 깊은 곳의 책이 저절로 펼쳐지려 했다. 3초 뒤 리안의 발디딤을, 그다음 수를, 결말을 보여주겠다고. 딱 한 장면만 열람하면 이 경기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안 돼.'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열면, 벽화 속 얼굴에 한 걸음 다가간다. 승리의 기쁨은 이미 없다. 남은 감정을 또 도려내면서까지 이 애송이를 이길 이유는 없었다.

그는 책을 닫았다. 서고 대신, 백 년의 실전 기억을 썼다.

화염 세 갈래는 각도가 완벽한 대신 회수가 느리다. 카일은 정면 불꽃 아래로 몸을 낮췄다. 왼쪽 갈래가 지나갈 자리를 미리 계산해 반 보 물러섰다. 오른쪽 갈래—이건 피하지 않았다. 옷깃이 그슬렸다. 대신 그 열기가 지나가는 순간 리안의 시야가 불빛에 잠깐 죽는다는 걸 알았다. 카일은 그 반 박자에 앞으로 파고들었다.

"뭐—!"

리안이 화염을 회수하려 했지만 늦었다. 카일은 이미 팔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공격 마법을 쓰지 않았다. 대신 기초 봉인술 하나를 리안의 발밑 마력 회로에 걸었다. 지하 금서고에서 4급 봉인을 되감던 그 기술의 축소판. 리안의 다음 화염이 손끝에서 맺히기 시작했다.

봉인이 먼저 회로를 무는가, 화염이 먼저 터지는가.

승부는 그 반 박자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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