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비가 온 뒤라 골목은 젖은 종이 냄새를 풍겼다. 한서율은 셋방 안쪽, 아버지가 쓰던 작업실 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문고리는 녹슬어 있었고, 손잡이를 돌리자 삐걱, 낮은 울음소리가 났다.

"3년 만이네."

혼잣말이 방 안의 먼지 냄새에 섞여 흩어졌다. 아버지가 죽은 뒤로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방이었다. 집주인이 재개발 통지서를 들고 온 게 오늘 아침이었고, 사흘 안에 짐을 빼야 한다는 말에 서율은 결국 이 방까지 밀려 들어왔다.

낡은 작업대 위엔 먼지 쌓인 조각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끌, 망치, 사포… 그리고 그 사이, 유난히 손질이 잘 된 조각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는 오래된 뼈로 만들어진 듯 누런빛을 띠었고, 칼날에는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서율은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순간 손끝이 서늘해졌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마치 칼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체온을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아버지가 이런 걸 쓰셨었나."

기억을 더듬어봐도 낯설었다. 아버지 한명운은 이름 없는 조각가였다. 재능은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결국 빚에 쫓기다 작업실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 가문의 명예도, 재산도 모두 재가 되어 흩어졌다.

작업대 아래, 오래된 나무 상자가 눈에 띄었다. 자물쇠는 부서져 있었다. 서율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낡은 사진 몇 장과 편지 한 장, 그리고 작은 돌덩이가 들어 있었다.

돌은 반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표면은 은은한 푸른빛을 띠었는데, 손으로 만지자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돌이… 떨려?"

서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돌을 살폈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닿은 돌의 표면이 심장처럼 미약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편지를 펼쳤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서율아.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우리 가문은 본래 '월인(月人)의 조각가'라 불렸다. 달빛으로 조각을 새기고, 그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힘을 탐낸 자들이 있었다. 별조각 협회. 그들이 우리 가문을 몰락시켰다. 나는 그들을 피해 숨어 살았지만, 결국 찾아냈더구나.』

서율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재가… 사고가 아니었다고?"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박혔다.

『이 조각칼과 달빛석을 네게 남긴다. 하지만 부탁이다. 힘을 각성하기 전까지는, 절대 보름달 아래에서 조각칼을 잡지 마라. 아직 너는 준비되지 않았다.』

서율은 편지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고, 구름 사이로 둥근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보름달…"

무심코 중얼거린 순간, 서율은 스스로도 놀랐다. 아버지의 경고를 들었으면서도, 손에 든 조각칼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니. 그런 건 동화에나 나오는 얘기잖아."

그러나 손바닥의 돌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율은 스스로를 비웃듯 픽 웃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조각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도구를 감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그가 다가가면 황급히 천으로 가리던 조각들. 그때는 그저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 진짜로… 뭔가를 감추고 계셨던 거예요?"

그 순간 창밖의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서율의 손에 들린 조각칼이 은은한 빛을 반사했다. 그리고 반쪽 달빛석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돌에서 뻗어 나온 옅은 빛이 서율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마치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처럼, 서늘하면서도 선명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때, 서율은 창밖에서 이질적인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이… 어딘가 이상했다.

하얀 달이 아니었다. 옅은, 그러나 분명한 푸른빛을 띤 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달이 왜 파랗지?"

착시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다시 봐도 하늘의 달은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율은 확신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하늘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

"뭐야, 왜 이렇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에 쥔 조각칼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서율은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며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방 안 가득, 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아, 안 돼—"

그의 비명 같은 외침이 낡은 작업실을 가득 채우는 순간, 세상이 통째로 빛에 잠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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