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통로 벽도 전부 재료예요. 알죠?"
유겐의 골무가 벽면을 긁었다. 서율은 오른손 파편을 쥐려 했지만 새끼손가락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형상을 뽑지 않고, 걸쇠 하나 값으로 벽 안쪽의 배관을 상(像)으로 밀어 젖히는 것.
파열음. 뒤편 배관에서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좁은 통로가 순식간에 하얗게 뒤덮였다. 유겐이 팔로 얼굴을 가리는 사이, 서율은 하늬의 옷깃을 잡고 반대편으로 굴렀다. 굳은 왼팔이 바닥을 긁으며 돌 갈리는 소리를 냈다.
"뛰어요."
두 사람은 정비 사다리를 타고 지하로 떨어졌다. 낡은 하수 갱도. 유겐의 발소리가 위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서율의 왼팔이, 완전히 멈췄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잿빛 대리석이 한꺼번에 굳었다. 관절이 접히지 않았다. 팔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팔은 몸에서 떨어진 남의 물건 같았다. 숨이 짧아졌다. 3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이 눈앞을 스쳤다. 병상에서 아버지가 손을 들려다 실패하던 그 표정. 팔이 어깨에서 심장으로 굳어가던 밤들. 아버지는 그때 아무 말도 못 했다. 목소리조차 돌이 되어 있었으니까.
"한서율!"
하늬가 그의 성한 오른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뺨의 붉은 자국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돌아와요. 지금 나가면 죽어요."
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굳은 팔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아직 그의 것이었다.
"…아직, 여기까지는."
―
은신처는 하늬가 반년 전 잡아둔 폐공방이었다. 협회 감시망 밖, 시 외곽의 버려진 대리석 가공소. 먼지 덮인 절삭기와 깨진 원석 더미 사이에 접이식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율은 침대에 누워 굳은 왼팔을 배 위에 올렸다. 어깨를 넘어선 잿빛이 쇄골 언저리에서 멈춰 있었다. 그 경계선을 손끝으로 짚었다. 심장까지, 손 한 뼘.
"움직여요?"
하늬가 물었다. 서율은 어깨를 힘껏 당겼다. 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관절은 여전히 죽어 있었지만, 완전히 돌이 되지는 않았다.
"잠으로 회복된다고 했어요. 강도현이." 그는 천장을 봤다. "작은 형상은 하룻밤이면 손목 아래까지 풀렸어요. 근데 벽을 통째로 조각한 다음부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늬가 낡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록했다.
"손등에 처음 반점 생긴 게 언제예요."
"사자 석상 봉인한 날. 서부 지부 계단." 서율은 눈을 감고 날짜를 셌다. "그날 손등에 잿빛 점 하나. 다음 날 반점이 유리처럼 번들거렸고, 심사 청원 열람실 갔을 때는 손등 전체. 1차 심사 실증 뒤에 팔목까지. 벽 조각한 다음엔 어깨까지."
하늬가 손을 멈췄다.
"…서율 씨. 이거, 스무 날도 안 됐어요."
서율이 눈을 떴다.
"손등 점 하나에서 어깨 완전 석화까지. 스무 날." 하늬가 수첩을 돌려 보여줬다. 날짜와 진행 부위가 화살표로 이어져 있었다. 화살표의 간격이 뒤로 갈수록 좁아졌다. "속도가 붙고 있어요. 처음엔 하루에 손톱만큼. 지금은 하루에 한 뼘."
서율은 그 화살표를 오래 봤다. 자기 몸이 종이 위 선분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선분의 끝은 심장이었다.
"멈추는 법은요."
"몰라요." 하늬가 수첩을 덮었다. "근데 아는 사람 자료는 있어요."
―
하늬가 낡은 서류철을 절삭기 위에 펼쳤다. 협회 서관 지하에서 반년에 걸쳐 빼낸 복사본들이었다. 그중 한 장, 세로쓰기 의무 기록.
「대상: 한(韓)—미등록. 부위 진행: 우수 지골 → 완관절 → 상완 → 견부 → 흉부. 진행 기간: 초진 후 이백여 일.」
서율의 성한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이건…"
"당신 아버지예요." 하늬가 낮게 말했다. "명부에서 지워졌지만, 이 의무 기록만 지우는 걸 잊었더라고요. 이백 일 넘게 걸렸어요. 손끝에서 심장까지."
서율은 아버지의 기록과 자기 몸을 번갈아 봤다. 부위 진행 순서가 똑같았다. 손끝, 팔, 어깨, 그다음 가슴.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그가 그대로 밟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는 이백 일, 자신은 스무 날.
"아버지는 왜 이렇게 느렸어요."
"당신이 빠른 거예요." 하늬가 종이를 넘겼다. 다른 장. 협회 내부 처방 지시서였다. "여기 봐요. 초진 이후로 아버님은 힘을 거의 안 썼어요. 조각을 끊었어요. 그래서 이백 일 버틴 거예요. 근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마지막 장을 짚었다. 서율이 몸을 일으켰다.
「말기 삼십 일간 진행 급가속. 원인: 대상 자택 방문 후 대형 작업 재개 정황. 방문자: 미기재.」
"말기 삼십 일. 갑자기 빨라졌어요." 하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전까지 조각을 끊고 버티던 사람이, 죽기 직전 한 달에 갑자기 대형 작업을 다시 시작했어요. 누군가 방문한 다음에."
서율은 그 '방문자: 미기재' 다섯 글자를 노려봤다.
"누가 아버지한테 다시 조각을 시켰어요."
"모르겠어요. 이름이 지워졌어요. 근데—" 하늬가 종이 귀퉁이를 가리켰다. 인주로 찍힌 결재 도장. 은실로 짠 것 같은 별자리 문양. "이 도장, 어디서 봤죠?"
서율은 봤다. 백단휘의 봉투에 찍혀 있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절삭기 위 종이 한 장이 서율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굳어 죽은 게 아니었다. 조각을 끊고 이백 일을 버티던 사람에게, 누군가 다시 조각칼을 쥐게 했다. 완성하라고. 미완을 끝내라고.
미완의 죄.
장례식 방명록의 그 네 글자가 이제야 이빨을 드러냈다. 미완의 죄는 아버지의 죄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완성'을 강요해 죽인 자가 남긴, 자기 손을 씻는 조문(弔文)이었다.
"이 사람이," 서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완성하면 죽는 걸 알면서, 아버지한테 완성하라고 했어요."
―
그날 밤, 서율은 잠들지 못했다.
굳은 왼팔이 배 위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오른손으로 아버지의 유작 조각—품에서 떼놓지 않은 손바닥만 한 대리석 조각을 만졌다. 손끝에 새겨진 별자리 문양.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미완의 부분.
지금껏 그는 이걸 완성하고 싶었다. 세상이 아버지를 사기꾼이라 불렀으니까. 자신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으니까. 협회가 도장을 찍어주면, 그제야 자신이 존재해도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도 그랬을까. 인정받고 싶어서, 증명하고 싶어서 다시 칼을 들었을까. 아니면 누가 그 마음을 이용했을까. '완성해야 진짜다', '완성 못 하면 미완의 죄다'—그 말로 아버지를 몰아, 스스로 굳어 죽게 만든 걸까.
서율은 조각을 내려놨다.
"난 완성 안 해." 어둠에 대고 중얼거렸다. "인정받으려고 나를 굳히지 않아."
처음이었다. 협회의 도장을, 세상의 승인을 갈망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한 것은. 그는 협회가 자기를 진짜라고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심사위원이 고개를 끄덕이기를, 규정집이 자기 편이기를. 그 기다림이 아버지를 죽인 회로와 같은 것이었음을, 종이 한 장이 알려줬다.
"진실 밝히는 데 필요한 만큼만 써." 그는 굳은 팔을 봤다. "그 이상은 안 써. 승인 때문에는, 안 써."
―
새벽이었다.
폐공방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늬가 깼다. 그녀가 문틈으로 밖을 살피더니 얼굴이 굳었다.
"협회 전달원이에요. 어떻게 여기를…"
"수신처." 서율이 몸을 일으켰다. "역추적당한 그 수신처. 여기 위치가 거기 걸려 있었죠."
하늬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백단휘는 그녀의 물증을 밖으로 흘려보내면서, 동시에 그 물증이 향하는 안전가옥을 하나씩 지웠다. 이 은신처도 그중 하나였다.
문 아래로 은색 봉투가 밀려 들어왔다. 서율이 성한 손으로 집었다. 붉은 인장 대신 은실 별자리 문양이 찍혀 있었다.
봉투를 열었다. 협회 공문서였다.
「계승 심사 통과자 한서율에 대하여, 제31조 위반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능력의 통제 불능 징후 및 미등록 위험 조각가 재분류 사유가 발생함. 협회 규정 제9조 3항에 준하여, 능력의 비가역적 강제 봉인 여부를 판정하는 청문 절차를 개시함. 소환 일시: 삼 일 후 정오. 주심: 백단휘.」
서율의 손끝이 문서 위에서 떨렸다.
"강제 봉인 청문…" 그는 규정집을 떠올렸다. "9조 3항. 심사위원 전원 합의로 사칭 확정 시에만 봉인 가능. 난 사칭이 아니에요. 1차 심사 통과했잖아요."
"'재분류'예요." 하늬가 문서를 가로챘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조항을 훑었다. "당신을 다시 미등록 위험 조각가로 분류하면, 계승자 신분이 취소돼요. 그럼 사칭 판정을 새로 걸 수 있고. 규칙을 무기로 쓰는 거예요."
"주심이 백단휘고." 서율이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를 죽인 자가, 이번엔 규칙으로 내 손을 봉인하려는 거군요."
봉인. 그것은 곧 힘의 죽음이었다. 힘이 죽으면 아버지의 진실을 밝힐 길도, 그 문양이 가리키는 좌표도 영원히 묻힌다. 백단휘는 서율의 몸이 스스로 굳어 죽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규칙 한 줄로 그를 지울 수 있었다.
서율은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굳은 왼팔을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그는 매번 힘을 폭발시켰다. 사자를 봉인할 때, 벽을 조각할 때, 걸쇠를 밀 때. 그때마다 승인받고 싶어서, 살아남고 싶어서, 한계까지 썼다. 그리고 한계까지 쓸 때마다 심장에 가까워졌다.
"하늬 씨." 그가 말했다. "나 실험 하나 해볼게요."
그는 성한 오른손으로 파편을 쥐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굳었지만 나머지 네 손가락은 살아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이번엔 무언가를 완성하려 하지 않았다. 형상을 뽑지 않았다. 대신 굳은 왼팔의 대리석 표면, 그 결 안쪽에 아주 작은 상 하나를 그렸다. 실체화가 아니라, 자기 팔의 잿빛 조직을 원래 살결로 되돌리는 역방향의 상.
손끝에 열이 올랐다. 그러나 그는 멈췄다. 딱, 어깨 경계선 한 마디만큼만.
지금까지는 힘이 이끄는 대로, 완성이 요구하는 대로 끝까지 갔다. 이번엔 자기가 멈출 지점을 먼저 정했다. 협회의 판정도, 힘의 관성도 아닌 그의 결정으로.
"윽—"
잿빛 경계선이 쇄골에서 어깨 아래로 한 마디 물러났다. 아주 조금. 그러나 처음이었다. 석화가 심장 쪽으로 번지기만 하던 것이,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서율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멈췄어요." 그가 웃었다. "밀어낼 수도 있어요. 끝까지 안 가면. 완성 안 하면."
하늬가 그의 어깨를 봤다. 경계선이 분명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떻게…"
"승인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쓸 때만 심장으로 갔어요." 서율이 굳은 팔을 천천히 들었다. 관절이 미세하게 접혔다. "내가 멈출 지점을 정하니까, 대가가 멈춰요. 아버지는 이걸 몰랐어요. 완성해야 한다는 말에 끝까지 갔으니까."
그는 아버지의 조각을 다시 집어 들었다. 완성하지 않기로 한 조각. 이제 그것은 미완의 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미완이었다.
―
삼 일 후. 청문 소환 시각까지 남은 마지막 밤이었다.
서율은 폐공방 뒤뜰로 나왔다. 하늬가 소환장을 다시 검토하는 동안, 그는 굳은 팔을 안고 하늘을 봤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되돌린 팔이 이제 손목까지는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
구름이 갈라졌다. 보름달이었다.
푸른빛이 서린 달. 그 안에 어리는 창백한 눈동자 하나. 각성하던 밤 이후로 위기의 순간마다 그를 지켜보던 그 존재가, 오늘 다시 그를 내려다봤다.
서율은 품의 아버지 조각을 꺼냈다. 손끝의 별자리 문양이 달빛을 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붉은 점 하나로 좌표만 가리키던 성좌가, 보름달의 푸른빛 아래 처음으로 완전히 떠올랐다. 미완이라 여겼던 손끝의 조각—그것은 미완이 아니었다. 달빛이 닿아야만 나머지 선이 드러나는, 아버지가 일부러 미완인 척 남긴 완성된 지도였다.
성좌가 공중에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붉은 점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점이 이어지며 하나의 선을 그었다. 그 선의 끝이 가리키는 곳에, 지금껏 본 적 없는 두 번째 표식이 떠올랐다. 반쪽으로 갈라진 원. 반쪽 달빛석의 형상이었다.
"하늬 씨…"
하늬가 소환장을 손에 든 채 뛰어나왔다. 그녀도 공중의 성좌를 봤다.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이게… 어디를 가리키는 거예요?"
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성좌의 끝, 반쪽 달빛석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그는 알아봤다. 그것은 협회 본부였다. 삼 일 후 그가 강제 봉인 청문을 받으러 걸어 들어가야 할, 바로 그 자리.
아버지의 좌표와 백단휘가 부르는 자리가, 마침내 하나로 겹쳐졌다.
푸른 달 속 눈동자가 깜빡였다. 서율의 굳은 왼팔이, 달빛 아래에서 다시 한 번, 저릿하게 조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