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정해지지 않은 후계 — 십 년의 부작용
고구려 조정은 태왕의 병세를 전제로 이미 재편되어 있었다. 요동을 관리하는 서변 무장들은 전공을 세워 다음 대에 자리를 굳히려 했고, 국내성의 문관과 왕실 외척은 어린 왕자를 중심으로 섭정의 틀을 짜고 있었다. 태왕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 아침, 두 계획이 동시에 정지했다.
십 년은 후계 구도를 굳히는 대신 무기한 유예로 만든다. 태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는 한마디로 매년 미뤄지고, 그 미뤄짐이 파벌의 수명을 늘린다. 무장들은 전공을 쌓을 시간이 생겼다고 여기고, 문관들은 왕자가 성인이 될 시간을 벌었다고 여긴다. 둘 다 상대가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도 물러서지 않는다.
동시에 태왕 자신도 갇힌다. 그가 앓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그가 여전히 스물아홉의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된다. 살아남은 영웅은 자기 전성기의 그림자 안에서 계속 이겨야 한다. 조정은 강해지는 대신 갈라진다.
지역
국내성 사고와 서기 서열
국내성 왕궁 서편, 압록 물길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해 돌기단 위에 세운 삼중 목조 건물. 아래층은 세금 장부와 군량 출납, 중간층은 왕실 계보와 조서 사본, 위층은 연표와 외교 문서를 둔다. 위층은 창이 없고, 등불 대신 반사판을 쓴다. 불이 나면 나라의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고에 배속된 서기는 셋으로 나뉜다. 태학 출신 사관(史官)은 붓을 들어 문장을 짓고, 서기(書記)는 그 문장을 정서하며, 필사(筆寫)는 낡은 죽간과 목간의 글자를 그대로 베낀다. 을두미는 서기 말단이다. 그는 사료를 짓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대신, 이 나라 삼백 년 연표를 열일곱 번 베껴 쓰면서 통째로 외웠다. 그가 아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뿐이며, 그 과거의 형태로만 앞을 짐작한다.
사고에는 오래된 규칙이 하나 있다. '고친 글자는 지우지 않고, 옆에 작게 사유를 적는다.' 을두미는 이 규칙을 사람에게도 적용하기 시작한다.
기타
궁색한 개혁 — 소금·시험·위조 지도
을두미의 정책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다. 그가 외운 삼백 년 연표에서, 예전에 한 번 실패했던 조치의 뒷부분만 잘라 붙인 것들이다. 그래서 전부 궁색하고, 그래서 통과된다. 조정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전례가 있다'는 말에는 진다.
하나. 소금 전매를 명분으로 요동 국경에 개시(開市)를 연다. 실제 목적은 세수보다 정보다. 장부에 남는 거래 품목의 변화가 적국의 군량 준비를 먼저 알려준다.
둘. 하급 관리 대상 문서 시험. 귀족 자제를 배제하지 않되 문장 정서와 계산을 시험 항목에 넣는다. 명분은 '사고의 오탈자 감소'. 실제로는 파벌 밖의 사람을 조정 하부에 심는 일이다.
셋. 왜 사신에게 건네는 위조 지도. 해안선을 실제보다 완만하게, 수심을 두 자 얕게 그린다. 배가 침몰하지는 않지만 상륙 일정이 늘어난다. 을두미는 이것을 '농담'이라 불렀고, 회담장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힘의체계
사관의 붓 — 수명 장부의 필법
국내성 사고(史庫) 깊은 칸에 봉해져 있던 붓. 사람이 태어날 때 배당된 수명은 '장부'에 기재되며, 제 몫을 다 쓰지 못하고 죽은 자에게는 잔여 연수가 남는다. 붓을 든 자는 죽은 자의 잔여를 계산해 산 자의 이름 아래 옮겨 적을 수 있다. 옮겨 받은 자는 병들지 않고, 잠이 짧아도 판단이 흐려지지 않는다. 덧붙여 필자는 그 대상이 겪을 앞으로 열두 달의 정치 판세를 문장 형태로 열람한다.
규칙은 셋이다. 첫째, 수명은 창조되지 않고 이동한다. 십 년을 적으면 십 년이 어딘가에서 빠진다. 둘째, 그 출처는 필자가 직접 사람 이름으로 적어 지정해야 하며, 하루가 지나도 비어 있으면 붓이 스스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고른다. 셋째, 열람한 판세는 필자가 개입한 순간부터 어긋난다. 같은 대상을 두 번째로 열람하면 절반이 거짓이 된다. 어느 절반인지는 표시되지 않는다.
붓은 먹을 갈 필요가 없다. 다만 이름을 적을 때마다 필자의 손끝에서 열이 빠져나가, 을두미의 오른손 세 손가락은 겨울이 아닌 계절에도 늘 차다.
세력
412년 겨울의 판 — 후연·북위·백제·왜
서쪽. 후연은 이미 껍데기다. 모용씨의 권위는 무너졌고 요동의 성들은 조공 대상을 매년 바꾼다. 그 자리를 노리는 것은 북위. 평성에서 남쪽으로 손을 뻗고 있으나 아직 초원과 화북 사이에서 허리를 세우는 중이라, 고구려와 정면으로 부딪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북위가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고구려가 남쪽에 묶여 있는 상태'다.
남쪽. 백제는 아신왕 이래 요동을 잃은 굴욕을 조정 전체가 외우고 있다. 병력은 부족하나 항로와 장인, 그리고 왜와의 혼맥이 있다. 왜는 철을 원한다. 반도 남부의 철정(鐵鋌)을 안정적으로 받기 위해서라면 어느 편에든 배를 댄다.
고구려의 실제 국력은 창칼보다 장부에 있다. 요동 전역을 유지하는 데 드는 것은 군량, 소금, 말먹이, 그리고 각 성의 곡물 저장 회전율이다. 전쟁의 승패는 대개 개시 전에 이 넉 줄에서 결정된다. 사신들이 같은 방에서 서로 다른 거짓말을 하는 오전 회담이, 성벽 무너지는 밤보다 판을 더 많이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