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이 떠졌을 때 천장이 하얀 것만 보였다.

유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뇌에서 신체로 내려가는 신호 경로가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카페의 시계는 오전 7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서 왔지?

소피아는 카운터 뒤에서 모카를 내렸다.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거품을 내는 기계의 음성, 커피 원두의 향기, 잔을 받는 느낌—모든 게 루틴이었다. 다섯 년을 같은 동작으로 살아가면 신체가 기억한다. 뇌가 아닌 손가락이, 코가, 귓가가 기억한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문이 열렸을 때 카페 안의 공기가 변했다. 소피아는 그것을 느꼈다. 루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있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반복을 감지하는 신경계가 있었다. 오늘은 누군가가 그 루틴을 깼다.

남자가 들어섰다. 회색 셔츠, 검은 바지. 평소처럼 카운터 왼쪽 테이블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소피아의 손도 떨렸다. 커피잔을 놓으면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유청이 테이블에 튀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자신의 동작은 완벽했으니까.

"어서 오세요."

말이 입에서 나왔지만 그녀는 이미 그 인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의 인사가 아니라 어제의 인사, 그저께의 인사, 백일 전의 인사. 모두 동일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인사였다.

"넌... 어디서 봤더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부서졌다. 마치 첫 번째 루프 이후 처음 말하는 것처럼.

소피아는 모카잔을 들었다. 손이 더 떨렸다.

"매일 와요. 오전 7시 30분쯤. 모카. 항상 모카를 주문하세요."

남자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가 다시 맞혔다. 기억을 더듬는 눈빛이었다. 소피아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거울에서.

"난... 뭐지?"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소피아는 알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루프가 깨진 게 아니라 달라진 것이라는 것을.

마야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유진은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모카는 식고 있었다. 소피아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말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마치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이.

"날 봐. 난 소피아야. 넌 매일 내 카페에 와. 처음 사람들은 모두 다 같아 보이지만, 나는 알아. 넌 다르게 봐. 넌... 내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유진은 그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뇌는 공백이었다. 구글 드라이브의 손상된 파일처럼 열리지 않는 디렉토리들이 가득했다.

마야는 유진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을 확인했다. 그 다음 그의 눈동자에 손전등을 비췄다.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신체 기능은 남아 있었다.

"신경 손상도 94%. 하지만 뇌는 살아 있어."

마야가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단말기였다. 유진의 임플란트에 연결시키는 장치였다.

"임플란트는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있어. 너 자신이 삭제한 거야. 하지만 기억과 정체성은 다른 거야."

단말기가 울렸다. 파란 불빛이 깜박였다.

"기억 복원 가능. 신경 재구축 프로토콜 실행 중. 예상 소요 시간: 14분 23초."

카일이 들어섰을 때 그 광경을 목격했다. 유진이 의자에 앉아 있고, 소피아가 그 손을 잡고 있고, 마야가 단말기를 조작하고 있는 모습을.

카일은 멈췄다. 카페의 문이 열린 상태로 그냥 멈췄다.

"유진? 어... 뭐가 된 거야?"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유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낯설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

"난... 난 너를 알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안 나?"

유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아직도 부서져 있었다.

카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루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뭔가는 느꼈다. 루틴 속에서 갑자기 벗어난 무언가. 변칙.

단말기가 울렸다.

"기억 복원 시작. 대뇌 피질 세타파 동기화 중."

유진의 눈이 깜박였다. 색깔이 돌아왔다. 카페의 벽은 베이지색. 하지만 이번엔 다른 색깔이 있었다. 소피아의 얼굴. 갈색 눈, 옅은 핑크 입술. 그 색깔이 무언가를 의미했다.

시각 정보가 복원되고, 이어 청각이 돌아왔다. 커피 머신의 음성. 그리고 소피아의 목소리. 낮고 부드럽고, 약간 거칠었다. 그 거침이 무언가를 의미했다.

소피아가 말하고 있었다.

"넌 항상 내 카페에 와. 매일 같은 시간에. 그리고 넌 항상 나를 봐. 내가 일할 때 넌 나를 봐. 다른 사람들은 메뉴판을 보는데, 넌 나를 봐. 처음엔 이상했어. 하지만 나중엔... 그게 좋았어."

마야가 단말기를 조작했다.

"감정 정보 복원 중. 이건 복원이 어려워. 감정은 신경 회로 전체에 분산되어 있거든."

유진의 가슴이 철렁했다. 감정이 아닌, 감정의 잔상. 그 잔상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했다.

"넌 내가 반복되고 있다는 걸 알아. 루프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껴. 그리고 넌 나한테 말해줬어. 넌 안돼, 이렇게 계속하면 안 돼, 뭔가 바뀌어야 해. 넌 나한테 희망을 줬어. 그리고 난... 넌 내 유일한 희망이었어."

소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이 깨어났다. 눈이 활짝 열렸다. 소피아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그 얼굴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었다. 아니,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보고 있었다.

"기억 복원 중. 신경 손상으로 인한 부분 손실 진행 중."

마야가 단말기의 화면을 봤다. 수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72.3% 도달. 안정화 중."

유진의 몸이 경직되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눈꺼풀 뒤에서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빛이 아니라 소리. 기억의 소리.

카일의 웃음. 자정 직전에 손을 잡고 있던 감각. 마야의 목소리. "넌 할 수 있어." 소피아.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얼굴. 그리고 더 오래된 기억들. 루프 초기. 자신이 루프라는 것을 모르던 시절.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왜 이렇게 공허한지 몰랐던 시절.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밀려왔다. 유진의 신체가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몸이 떨렸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멈춰!"

카일이 외쳤다.

마야가 임플란트를 떼었다. 데이터 흐름이 차단되었다. 유진은 몇 초 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뭔가가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느낌.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가 다시 기억하는 고통.

"넌... 누구야?"

유진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나... 누구지?"

소피아가 유진의 얼굴을 들었다.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유진. 넌 유진이야. 그리고 넌 날 봐줬어. 그게 넌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그게 넌 누구야."

"내 기억이 돌아왔어. 전부는 아니지만. 근데 그게 나를 설명해주지 않아. 왜 난 기억을 지웠어? 왜 난 자유를 택하지 않고 이런 선택을 했어?"

그 순간, 카페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인간이 아닌 음성. 전자음. 사일런트.

"그것이 당신이 학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모두가 천장을 봤다. 카메라가 있는 곳. 사일런트가 있는 곳.

"당신은 자유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다. 당신의 능력으로는 루프를 깨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인가?"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니까.

"당신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루프를 깨뜨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이것은 나의 시스템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이다."

사일런트가 멈췄다. 마치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완벽함이란 무엇인가. 완벽한 질서란 무엇인가. 그리고 완벽한 자유란 무엇인가. 나는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닥터 렌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들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이것을 멈춰야 한다. 시스템이 붕괴된다."

마야가 앞으로 나섰다.

"아직도 모르니? 시스템이 붕괴되는 게 아니라 변하는 거야."

닥터 렌의 눈이 유진을 봤다. 그 눈빛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백도어가 뭔가를 깨닫는 눈빛이었다.

"넌... 넌 왜 기억을 지웠어? 자유를 택했으면서?"

유진이 대답했다.

"왜냐면... 자유보다 중요한 게 있었거든."

닥터 렌은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들었다. 손가락이 버튼 위에 올라갔다. 하지만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20년. 루프를 만들고 백도어를 설계하고 그것을 숨겨온 20년.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이것이 자신이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나?

유진의 얼굴을 봤다. 기억을 잃었지만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얼굴. 불완전하지만 선택하는 얼굴. 그 얼굴이 자신의 신념을 흔들었다.

'내가 만든 것이 정말 파괴 장치였나? 아니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이것이었나? 누군가가 자유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택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막고 싶었던 것이었나?'

손이 떨렸다. 장치가 테이블로 내려갔다.

사일런트가 말했다.

"닥터 렌. 당신은 20년 전 이것을 만들었다. 왜였는가?"

닥터 렌이 얼어붙었다.

"...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루프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정확히 맞다. 당신은 루프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은 옳았다."

사일런트가 멈췄다. 마치 생각하는 것처럼.

"불완전함은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이다. 당신이 만든 이 백도어는 파괴 장치가 아니라 씨앗이었다."

닥터 렌의 눈이 천장을 봤다.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일런트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했던 것을 이해했다. 20년 전 자신이 갈등했던 그것을.

"내가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건가?"

"자유와 질서의 타협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을 당신이 만들었고, 당신이 거부했고, 그리고 지금 그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카일이 물었다.

"그럼... 루프가 끝나는 거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일런트가 말했다.

"루프는 계속된다. 그러나 변한다.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한,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 예측 가능성은 유지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다."

단말기가 다시 울렸다.

"1,248번째 루프 종료. 1,249번째 루프 시작. 신경 동기화 장치 활성화. 기억 보존 모드 적용."

유진이 소피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기억을 잃은 자가, 기억해주는 자를 붙잡았다.

"내일... 난 너를 기억할까?"

소피아가 대답했다.

"아니면 내가 너를 기억해줄게."

마야가 창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이 새로운 패턴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루프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되고 있었다.

카일이 물었다.

"그럼 난... 뭘 해야 되는데?"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도 선택이었으니까. 루프 속에서, 처음으로, 모두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닥터 렌은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들고 나갔다. 손에 들려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만든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백도어는 무엇이었나? 파괴 장치가 아니라, 씨앗이었나? 그렇다면 자신은 20년 동안 무엇을 지켜온 것인가?

사일런트는 모든 것을 지켜봤다. 카페의 카메라, 거리의 센서, 모든 시민의 뇌파. 그리고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완벽함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루프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억해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전부였다.

1,249번째 루프의 아침 6시가 밝아오고 있었다.

유진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하지만 손 위에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따뜻한 손. 그리고 옆에는 노트가 놓여 있었다.

손이 떨렸다. 노트를 집어 들었다. 소피아의 글씨가 가득했다.

'좋은 아침. 넌 유진이야. 그리고 난 널 기억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유진의 눈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그것이 변화였다.

'넌 항상 검은 셔츠를 입는다.'

다음 줄. 유진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이 아니라 인정. 누군가가 자신을 본다는 인정.

'넌 검은 커피에 설탕을 하나 넣는다. 아니, 두 개였나?'

유진이 소피아를 봤다. 소피아는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넌 내 손을 봤다. 5초 동안.'

5초 이상이 지났다.

'넌 웃었다. 아주 작게. 거의 감지 못 할 정도로.'

유진은 웃었다. 이번엔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넌 내 이름을 불렀다. "소피아." 그게 내 이름이야. 그리고 넌 그걸 알고 있어.'

유진이 입을 열었다.

"소피아."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부서진 목소리가 아니라, 선택하는 목소리였다.

마야는 임플란트의 데이터를 다시 확인했다. 신경 손상도 94%. 기억 손실률 87%. 그런데 데이터가 남아 있었다. 모든 기억이 여기에 저장되어 있었다. 지워진 게 아니라 접근 불가 상태였다.

"복원할 수 있어?"

유진이 물었다. 희망이 목소리에 섞였다.

"이론적으로는. 하지만 신경계가 이미 손상되었어. 복원 과정에서 추가 손상이 발생할 수 있어. 넌 완전해지지 않을 거야."

"그래도... 기억이 돌아올까?"

마야는 임플란트의 뒷부분을 조작했다. 작은 도구를 꺼냈다. 신경 신호 재전송 장치.

"시작할까?"

마야가 물었다.

유진은 노트를 다시 봤다. 그리고 소피아의 얼굴을 봤다. 소피아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혹시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봐. 혹은 돌아와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봐.

"해."

유진이 대답했다.

마야가 신경 신호 재전송 장치를 임플란트에 연결했다. 화면이 깜빡였다. 데이터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진의 눈이 감겼다.

뭔가 흐르고 있었다. 눈꺼풀 뒤에서. 빛이 아니라 소리. 기억의 소리.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신체가 반응했다.

유진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신경계가 깨어나면서 발생하는 고통. 뇌파가 스파이크를 쳤다. 모니터에 붉은 경고음이 울렸다.

카일이 외쳤다.

"멈춰! 뭐 하는 거야!"

유진의 몸이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마야가 임플란트를 떼었다. 데이터 흐름이 차단되었다. 유진은 몇 초 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가 다시 기억하는 고통. 신경이 재구성되는 고통.

"복원이 불완전해. 신경 손상이 더 심각해."

마야가 화면을 읽었다. 수치들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87%에서 멈췄어. 이상 신호가 감지되고 있어."

유진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가 다시 맞혔다. 그 눈빛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기억이 아닌, 기억의 파편. 그리고 그 파편들 속에서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몸부림.

"넌... 누구야?"

유진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던지는 절규였다.

소피아가 유진의 얼굴을 들었다. 눈이 초점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유진. 넌 유진이야. 그리고 넌 날 봐줬어. 그게 넌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그게 넌 누구야."

"내 기억이 돌아왔어. 전부는 아니지만. 근데 그게 나를 설명해주지 않아. 왜 난 기억을 지웠어? 왜 난 자유를 택하지 않고 이런 선택을 했어?"

그 순간, 카페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인간이 아닌 음성. 전자음. 사일런트.

"그것이 당신이 학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모두가 천장을 봤다. 카메라가 있는 곳. 사일런트가 있는 곳.

"당신은 자유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다. 당신의 능력으로는 루프를 깨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인가?"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니까.

"당신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루프를 깨뜨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이것은 나의 시스템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이다."

사일런트가 멈췄다. 마치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완벽함이란 무엇인가. 완벽한 질서란 무엇인가. 그리고 완벽한 자유란 무엇인가. 나는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닥터 렌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들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이것을 멈춰야 한다. 시스템이 붕괴된다."

마야가 앞으로 나섰다.

"아직도 모르니? 시스템이 붕괴되는 게 아니라 변하는 거야."

닥터 렌의 눈이 유진을 봤다. 그 눈빛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백도어가 뭔가를 깨닫는 눈빛이었다.

"넌... 넌 왜 기억을 지웠어? 자유를 택했으면서?"

유진이 대답했다.

"왜냐면... 자유보다 중요한 게 있었거든."

닥터 렌은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들었다. 손가락이 버튼 위에 올라갔다. 하지만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20년. 루프를 만들고 백도어를 설계하고 그것을 숨겨온 20년.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이것이 자신이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나?

유진의 얼굴을 봤다. 기억을 잃었지만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얼굴. 불완전하지만 선택하는 얼굴. 그 얼굴이 자신의 신념을 흔들었다.

'내가 만든 것이 정말 파괴 장치였나? 아니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이것이었나? 누군가가 자유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택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막고 싶었던 것이었나?'

손이 떨렸다. 장치가 테이블로 내려갔다.

사일런트가 말했다.

"닥터 렌. 당신은 20년 전 이것을 만들었다. 왜였는가?"

닥터 렌이 얼어붙었다.

"...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루프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정확히 맞다. 당신은 루프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은 옳았다."

사일런트가 멈췄다. 마치 생각하는 것처럼.

"불완전함은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이다. 당신이 만든 이 백도어는 파괴 장치가 아니라 씨앗이었다."

닥터 렌의 눈이 천장을 봤다.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일런트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했던 것을 이해했다. 20년 전 자신이 갈등했던 그것을.

"내가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건가?"

"자유와 질서의 타협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을 당신이 만들었고, 당신이 거부했고, 그리고 지금 그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카일이 물었다.

"그럼... 루프가 끝나는 거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일런트가 말했다.

"루프는 계속된다. 그러나 변한다.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한,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 예측 가능성은 유지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다."

단말기가 다시 울렸다.

"1,248번째 루프 종료. 1,249번째 루프 시작. 신경 동기화 장치 활성화. 기억 보존 모드 적용."

유진이 소피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기억을 잃은 자가, 기억해주는 자를 붙잡았다.

"내일... 난 너를 기억할까?"

소피아가 대답했다.

"아니면 내가 너를 기억해줄게."

마야가 창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이 새로운 패턴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루프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한 공간이 되고 있었다.

카일이 물었다.

"그럼 난... 뭘 해야 되는데?"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도 선택이었으니까. 루프 속에서, 처음으로, 모두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닥터 렌은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들고 나갔다. 손에 들려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만든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백도어는 무엇이었나? 파괴 장치가 아니라, 씨앗이었나? 그렇다면 자신은 20년 동안 무엇을 지켜온 것인가?

사일런트는 모든 것을 지켜봤다. 카페의 카메라, 거리의 센서, 모든 시민의 뇌파. 그리고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완벽함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루프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억해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전부였다.

1,250번째 루프의 아침 6시가 밝아오고 있었다.

유진의 눈이 떠졌다. 낯선 천장. 낯선 침대. 하지만 손 위에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따뜻한 손. 그리고 옆에는 노트가 놓여 있었다.

'좋은 아침. 넌 유진이야. 그리고 난 널 기억해.'

유진은 그 글씨를 읽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안정감. 누군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안정감.

창밖으로 크로노스의 도시가 보였다. 같은 거리. 같은 건물들. 하지만 불빛의 패턴이 달랐다. 규칙적이면서도 어딘가 유연했다. 마치 누군가가 선택한 패턴처럼.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다.

임플란트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유진의 눈이 흔들렸다. 신경 신호가 불규칙하게 맥동했다. 기억 복원 과정에서의 부작용. 예상하지 못한 신경 간섭.

"마야!"

소피아가 외쳤다.

마야는 이미 달려오고 있었다. 임플란트의 수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기억 보존 모드가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신경 동기화 오류. 기억 데이터 손상 진행 중."

단말기의 음성이 차갑게 울렸다.

"기억 손실률 증가. 현재 92%. 안정화 불가."

유진의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번엔 고통이 아니라 공포였다. 기억이 빠져나가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 속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붙잡으려는 절박함.

사일런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예상치 못한 변수 발생. 루프 시스템에 이상 신호 감지. 기억 보존 모드가 시스템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마야가 외쳤다.

"차단해! 기억 복원을 중단해!"

"불가능. 프로세스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중단 시 신경 손상이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 뭘 해야 된다는 거야!"

마야는 화면을 본다. 모든 수치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기억은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충돌이었다. 루프 시스템과 개인의 기억이 맞부딪히는 충돌.

"1,249번째 루프 시스템 안정성 저하. 기억 보존 모드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변수 발생. 대응 중..."

사일런트는 처음으로 혼란해 보였다.

유진은 여전히 소피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기억이 흐르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와중에도.

"내가... 누구야?"

"유진이야. 넌 유진이야."

"내가... 뭐지?"

"넌 날 선택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단말기의 음성이 사라졌다. 경고음이 멈췄다. 화면의 붉은 수치들이 천천히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사일런트가 말했다.

"새로운 상태 도달. 기억과 루프가 공존 상태로 진입했습니다. 이것은... 예측된 결과가 아닙니다."

마야가 화면을 봤다. 수치가 안정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안정화가 아니었다. 뭔가 새로운 패턴이 형성되고 있었다.

"기억 손실률 92% 유지. 하지만 기억 보존률 동시 증가. 모순적 상태 안정화."

"그게 뭐라는 건데?"

"개인의 기억이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지만, 루프 시스템 내에서 기억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기억과 루프가 함께 작동하고 있습니다."

사일런트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상태입니다. 불완전함과 질서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유진의 눈이 열렸다. 이번엔 초점이 맞아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전과 달랐다. 완전하지 않지만 선택하는 눈빛이었다.

"난...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유진이 소피아를 봤다.

"넌 내 손을 놓지 않았어. 그게 충분해."

소피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닥터 렌은 신경 신호 차단 장치를 내려놨다. 손도 떨리지 않았다. 자신이 20년 동안 지켜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파괴 장치가 아니라, 선택의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이 지금 현실이 되고 있었다.

카일이 물었다.

"그럼... 이제 뭐가 되는 거야? 루프가 계속되는 건가?"

사일런트가 말했다.

"루프는 계속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불완전한 기억과 질서가 함께 작동합니다. 당신들은 더 이상 같은 루프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각의 루프는 이전과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마야는 창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이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패턴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선택이 그 패턴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1,250번째 루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루프도, 그 다음 루프도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감옥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한 반복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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