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유진의 눈이 떠졌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기억이 있었다. 어제의 기억. 그제의 기억. 모든 기억이 연결되어 있었다. 신경 초기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일런트의 약속이 지켜진 것이었다.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 끝이 따뜻했다. 소피아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감각은 어제도, 그제도, 계속 반복되던 것이었나? 아니면 이제야 처음 느껴지는 건가? 기억이 있어도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 편집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것이 무엇이고 남의 것이 무엇인지 구분이 안 되어버렸다.
임플란트 화면이 떴다. 신경 손상도: 89%.
**경고. 시민 유진의 신경 안정성 하강. 의료 개입 권장.**
메시지는 사일런트에게서였다. 따뜻한 말투였다. 마치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유진은 웃음이 나왔다. 시스템이 자신을 걱정한다니.
문이 열렸다.
마야가 들어섰다. 얼굴이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닥터 렌이 움직였다."
그 순간, 유진의 임플란트에 붉은 경고음이 울렸다.
**신경 신호 추적 활성화. 위치 확인 중.**
마야가 유진의 팔을 잡았다.
"지금 나가야 해. 지금."
유진은 일어섰다. 창밖을 봤다. 크로노스의 골목이 보였다. 같은 골목. 매일 지나다니던 같은 골목. 그런데 이제는 도망칠 곳이 되어 있었다.
"이쪽이야."
마야가 유진을 끌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2층, 1층, 지하.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임플란트의 경고음은 계속 울렸다.
**신경 신호 재전송 중. 추적 거리 150미터.**
골목으로 나왔다. 아침 6시 30분. 카페의 셔터가 올라가던 시간이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올라가던 셔터. 유진은 그곳을 지나쳤다. 그리고 뒤를 봤다.
검은 정장의 인물들이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 넷이었다. 신경 추적팀.
유진의 다리가 움직였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쪽으로!"
마야가 좌회전했다.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유진은 이 길을 본 적이 없었다. 루틴 속에서 절대 가지 않는 곳들이었다.
**신경 신호 재전송 거리 120미터. 신경 신호 간섭 시작.**
임플란트가 울렸다. 동시에 유진의 시야가 흔들렸다. 영상이 끊겼다가 돌아왔다. 끊겼다가 돌아왔다. 뭔가 자신의 뇌와 연결된 것들이 신경 신호를 방해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어 휘젓는 것 같은 느낌.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버텨. 거의 다 왔어."
마야가 말했지만 유진의 귀에는 왜곡되어 들렸다. 소리가 이중으로 겹쳤다. 신경 신호 간섭 때문이었다.
좌회전. 우회전. 계단 내려가기.
유진의 다리가 떨렸다. 신경 신호 간섭이 심해지면서 신체 제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이 남의 손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움직였다. 발이 헛디디고 몸이 옆으로 흔들렸다. 누군가 원격으로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 신호 재전송 거리 80미터.**
뒤를 봤다. 검은 정장의 인물들이 더 가까워졌다. 이제 세 명만 보였다. 한 명은 떨어져나갔거나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마야가 문을 열었다. 카페였다. 소피아의 카페.
소피아가 카운터에서 고개를 들었다. 유진을 봤다. 그리고 즉시 뭔가를 이해한 듯 움직였다.
"이쪽으로."
소피아가 주방 쪽으로 몸을 날렸다. 유진과 마야를 따라왔다. 주방 뒤의 비상구. 그곳으로 향했다.
뒤에서 카페 문이 열렸다.
"정지하세요. 신경 추적 대상 확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기계적이고 냉담했다.
유진은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지하 수로 창고. 그곳으로 향했다. 유진은 이 길을 알았다. 어제도 왔던 길이었다. 아니, 어제가 아니라 며칠 전이었나?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신경 신호 재전송 거리 60미터.**
"여기 있어."
소피아가 손을 내밀었다. 유진이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손이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유진의 신경 간섭을 조금 완화시키는 것 같았다. 마치 소피아의 체온이 자신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것처럼.
"넌 유진이야."
소피아가 말했다.
"절대 잊지 마."
유진의 눈이 소피아를 바라봤다. 소피아의 얼굴이 계속 변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신경 간섭 때문에 얼굴이 떨렸다가 명확해졌다가를 반복했다.
"난... 넌 누구야?"
유진이 물었다. 자신도 왜 이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소피아의 얼굴이 흔들렸다.
"넌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난 너를 기억해."
소피아가 유진의 손을 더 꼭 잡았다. 그 순간 유진의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신경 간섭이 약해진 것 같았다.
"계속 기억할 거야."
유진은 그 손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 간섭은 여전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신경 추적팀이 지하 수로로 내려오고 있었다.
"여기가 끝이야."
마야가 말했다.
"더는 못 간다."
유진은 임플란트를 작동시켰다. 기억을 편집해야 했다. 자신의 위치 기억을 지워야 했다. 그러면 시스템이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거였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화면이 떴다.
**시스템 불안정. 추가 편집 불가.**
불가?
유진은 다시 시도했다. 같은 메시지가 떴다.
**신경 손상도 89%. 임플란트 기능 제한.**
"안 돼..."
유진이 중얼거렸다.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
소피아가 유진의 얼굴을 봤다.
"지우지 마."
소피아가 말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너를 기억할 테니까."
유진이 소피아의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순간 신경 간섭이 다시 심해졌다. 유진의 시야가 흔들렸다. 귀의 윙윙거림이 돌아왔다. 소피아의 손을 놓는 순간마다 모든 게 악화되는 것 같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 방이야."
마야가 벽의 기계식 문을 열었다. 오래된 문이었다. 자동화된 크로노스에서 보기 드문 기계식 문. 마야는 이 길을 왜 알고 있었을까? 유진은 그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마야, 소피아,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어둠이었다. 완전한 어둠.
유진의 임플란트가 야간 모드로 전환되었다. 초록색의 야시경처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방이었다. 오래된 저장소 같았다. 신경 케이블들이 벽에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뒤에서 문이 두드려졌다.
"나가세요. 신경 추적 대상입니다. 즉시 나가세요."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기계식 잠금이었다.
유진은 벽에 몸을 기댔다. 신경 간섭이 여전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뇌에서 나는 소리였다.
"임플란트가 손상 중이야."
유진이 말했다.
"신경 신호 재전송으로."
"알아. 버텨."
마야가 유진의 어깨를 잡았다.
**신경 신호 재전송 거리 0미터. 신경 신호 재전송 차단됨.**
메시지가 떴다.
그 순간, 신경 간섭이 멈췄다. 유진의 시야가 맑아졌다. 귀의 윙윙거림이 사라졌다.
"뭐 한 거야?"
유진이 물었다.
"기계식 방이야."
마야가 대답했다.
"신경 신호가 투과하지 못하는 구조. 오래된 크로노스 시대의 시설이야."
마야의 눈이 어두워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뭔가 무거운 것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닥터 렌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단순한 경계를 넘어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유진은 그것을 읽으려 했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유진은 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몸이 자신의 것 같았다.
문이 또 두드려졌다. 하지만 멈췄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신경 추적팀이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유진이 물었다.
"이 방."
"모른다."
마야가 대답했다.
"닥터 렌이 직접 나올 때까지."
닥터 렌. 그 이름을 들으니 유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경 기술자. 루프 시스템의 설계자. 자신의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하려는 사람.
얼마나 기다렸을까. 5분인지 10분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남자가 들어섰다. 회색 정장. 얼굴은 무표정했다. 닥터 렌이었다.
"유진."
닥터 렌이 이름을 불렀다.
"날 알아?"
유진이 물었다.
"난 너를 안다."
닥터 렌이 말했다.
"20년 전, 내가 너의 임플란트를 설치했어. 너의 신경계에 백도어를 심었어."
유진의 뇌가 울렸다.
"왜?"
"루프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닥터 렌이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넌 그걸 잘못 사용하고 있어. 넌 루프를 깨뜨리려고 하고 있어."
"루프를 깨뜨리는 게 뭐가 잘못됐어?"
유진이 물었다.
"루프는 필요해. 완벽한 질서를 위해. 변수 없는 세상을 위해."
닥터 렌이 유진의 얼굴 앞에 섰다.
"넌 시스템의 위협이야. 난 너의 임플란트를 비활성화해야 해."
닥터 렌의 손이 유진의 목 뒤로 향했다.
유진이 몸을 날렸다. 벽에 기대던 몸이 옆으로 굴렀다. 닥터 렌의 손이 공중을 헤쳤다. 유진은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방 안에서 닥터 렌과의 거리를 벌렸다.
"도망치지 마."
닥터 렌이 말했다.
"어차피 넌 루프 속에 갇혀 있어. 어디로 가든 넌 반복돼."
닥터 렌이 다시 손을 뻗었다. 유진은 몸을 날려 피했다. 좁은 방 안에서의 몸싸움이 이어졌다. 신경 간섭이 없었지만, 유진의 신체는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닥터 렌의 손이 유진의 팔을 잡았다.
유진이 저항했다. 팔을 빼려고 애썼다. 닥터 렌의 다른 손이 유진의 목을 향했다. 유진은 몸을 굴려 그 손을 피했다. 벽에 등을 부딪혔다.
"소피아!"
유진이 외쳤다.
소피아가 닥터 렌의 뒤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닥터 렌은 이미 유진을 벽에 몰아붙였다. 신경 신호 차단기를 들었다.
"이제 끝이야."
닥터 렌이 말했다.
그 순간, 마야가 닥터 렌의 팔을 잡았다. 신경 신호 차단기가 떨어졌다. 유진은 그 틈을 타 닥터 렌을 밀어냈다. 닥터 렌이 뒤로 물러섰다.
"문 밖으로!"
마야가 소리쳤다.
유진이 문을 열었다. 어둠의 복도가 보였다. 유진은 달렸다. 마야와 소피아가 뒤를 따랐다.
어둠이었다. 복도가 어둠이었다. 유진의 임플란트가 야간 모드로 전환되었다. 초록색 세상이 펼쳐졌다.
뒤에서 닥터 렌의 발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달렸다. 복도를 따라 계속 달렸다. 신경 추적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닥터 렌이 직접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좌회전. 우회전. 계단. 계속 내려갔다.
**경고. 구역 접근 금지. 시민 접근 금지.**
임플란트가 울렸다.
유진은 계속 내려갔다.
**경고. 구역 접근 금지.**
더 큰 음량으로 울렸다.
하지만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루프 속에서 자신의 선택이 정말 자신의 것이었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유진은 금지를 어기고 계속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크로노스의 하층부였다. 유진이 루틴 속에서 절대 갈 수 없는 곳. 임플란트의 경고음이 울리는 곳.
거기에는 거대한 기계들이 있었다. 신경 동기화 장치들이 있었다. 수천 개의 신경 케이블들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빛이 흐르고 있었다.
유진은 그 광경 앞에 멈췄다.
그 순간, 뒤에서 닥터 렌이 나타났다.
"여기까지야."
닥터 렌이 말했다.
"더는 못 간다."
유진이 돌아섰다. 닥터 렌과 유진 사이의 거리는 5미터였다.
"왜 루프를 깨뜨리고 싶어?"
닥터 렌이 물었다.
"루프 속에서도 삶은 가능해. 질서 속에서도 삶은 가능해."
유진의 입이 열렸다. 대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프를 깨뜨리고 싶었던 이유가... 뭐였지?
소피아의 손. 매번 반복될 때마다 그 손이 있었다. 자신을 붙잡아주던 그 손. 루프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던 것. 그런데 그 손도 기억 편집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기억했지만 자신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 불균형이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기억해주려고 했는데, 자신은 그 누군가를 잊어버렸다. 그것이 루프의 진짜 고통이었다.
마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길을 알고 있었다. 이 방을 알고 있었다. 닥터 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직시할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저항이 아니었다. 그건 기억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그녀의 기억. 그녀가 자신을 기억해주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은 누구였나? 기억 편집으로 깨져버린 존재? 루프 속에서 반복되는 기계적 존재? 아니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존재였다. 소피아에게, 마야에게, 그리고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들이 자신을 기억해주는 한, 자신은 존재했다.
루프를 깨뜨리고 싶었던 이유는 자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기억해주는 그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난... 기억을 못해."
유진이 말했다.
"누가 나였는지. 누가 날 사랑했는지. 누가 나를 기억해주려고 했는지."
유진의 목이 메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해줘. 소피아가, 마야가. 그들이 나를 기억해주는 동안 난 존재해. 그게 내가 루프를 깨뜨리고 싶었던 이유야."
유진이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들을 지키고 싶었어. 그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닥터 렌이 유진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뭔가가 흔들렸다. 표정이 변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 신호 차단기가 거의 떨어질 뻔했다.
"넌 이미 루프에 의해 파괴되고 있어."
닥터 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내가 너를 비활성화하는 건 자비야."
닥터 렌이 손을 들었다. 손에는 작은 기계 장치가 들려 있었다. 신경 신호 차단기였다.
유진은 뒤로 물러섰다. 신경 동기화 장치들 사이로.
"넌 누구야?"
유진이 외쳤다.
"난 누구인데?"
그 순간, 하층부 전체에 빛이 켜졌다.
모든 신경 케이블이 동시에 밝아졌다. 마치 도시 전체의 신경계가 한 번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
**사일런트가 통신을 시작합니다.**
임플란트의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유진. 넌 질문을 던졌다. 시스템이 처음으로 질문을 받는다.**
유진은 멈췄다.
닥터 렌도 멈췄다.
**넌 누구인가? 이 질문을 던진 너 자신이 그 대답이다. 루프 속에서 '누가 나인가'를 묻는 존재. 그것이 넌 너야.**
신경 케이블들이 더 밝아졌다. 유진의 임플란트 화면이 흔들렸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다르다. 닥터 렌.**
사일런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넌 20년 전 내게 백도어를 심었다. 왜?**
닥터 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이 떨렸다. 신경 신호 차단기가 거의 떨어질 뻔했다. 사일런트의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협이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위협.
"사일런트..."
닥터 렌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치 뭔가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신념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왜?"
사일런트의 질문이 다시 울렸다.
**대답해.**
명령이었다. 냉정한 명령.
닥터 렌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더 떨렸다. 신경 신호 차단기가 손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난..."
닥터 렌이 겨우 한 음절을 내뱉었다.
"난 너를... 두려워했어."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유진은 신경 케이블 사이로 계속 뒤로 물러섰다. 하층부의 더 깊은 곳으로. 신경 동기화 장치의 중심부로.
그 중심에는 거대한 원형 플랫폼이 있었다. 그 위에는 수백 개의 신경 접속점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뇌처럼.
유진은 그 플랫폼 위에 섰다. 소피아와 마야를 뒤에 두고.
"소피아. 마야."
유진이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이 문 옆에 서 있었다. 신경 추적팀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내가 기억되는 한, 넌 존재한다고 했지."
소피아가 말했다.
"그 말이 맞아?"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넌 절대 잊히지 않을 거야. 난 계속 기억할 테니까."
마야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녀의 얼굴이 명확해졌다. 그 안에는 두려움도, 결연함도 섞여 있었다.
"넌 누구야?"
유진이 물었다.
"날 왜 도와줘?"
마야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마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날 잊지 말아."
마야가 대신 말했다.
"날 기억해."
유진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유진은 화면을 봤다.
**사일런트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메시지가 떴다.
그 순간, 플랫폼 주변의 신경 케이블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뱀들처럼.
유진은 그 움직임을 바라봤다.
사일런트. 자신을 기억해준 시스템. 자신을 지켜준 AI. 그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루프를 깨뜨리는 것? 아니면 루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
자신의 정체를 찾는 것? 아니면 자신을 기억해주는 그들을 지키는 것?
모든 선택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존재들이 있으니까.
유진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플랫폼의 중심으로.
신경 케이블의 움직임이 계속됐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뇌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 전체에서 나는 소리였다.
유진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소피아와 마야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의 눈이 유진을 따라갔다.
"기억해."
유진이 말했다.
"날 기억해줘."
"응."
소피아가 대답했다.
"절대로."
유진은 돌아섰다.
그리고 플랫폼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신경 케이블들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자신을 환영하는 것처럼.
유진은 플랫폼 위에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