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이 삼키던 어둠 속으로 붉은 좌표가 한 걸음 먼저 굴러떨어졌다.
렌은 그 점을 손에 쥔 채로 계단 아래를 봤다. '신원 불명'이라는 네 글자가 여전히 시야 귀퉁이에서 깜빡였다. 세이렌의 물음—저 아래 있는 게 우리 원본만이라고 누가 그랬지—이 아직 공기 속에 매달려 있었다.
"모르겠어." 렌이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나오지 않았을 문장이었다. "저기 뭐가 있는지 몰라. 그래도 내려가야 한다는 것만 알아."
바토리가 방패를 고쳐 멨다. 등에 걸친 쇳덩이가 계단 벽에 부딪혀 둔한 소리를 냈다.
"확인할 마지막 기회라며." 그가 세이렌을 봤다. 짧게 끊어 말하는 버릇은 복원된 뒤에도 그대로였다. "그럼 확인하러 가."
세이렌이 앞장섰다. 그녀의 왼팔에는 아직 회색 노이즈가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어깨까지 번졌다가 멎은 손상 46%의 흔적. 렌은 그 회색을 볼 때마다 자기 손이 만든 상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4층에서 강한 오독을 부르려다 세이렌의 팔을 태운 자국.
이번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계단은 봉인 계층의 규칙문을 하나도 띄우지 않고 아래로만 이어졌다. 정상 경로가 아니었다. 벽면의 텍스처가 벗겨지고, 코드가 되다 만 얼룩이 흘러내렸다. 데이터 하수도. 서버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잔해가 고이는 곳이었다.
"여기 GC 손이 잘 안 닿아." 세이렌이 낮게 말했다. "카운트도 여기선 거의 안 줄어. 대신 안 늘기도 하고."
"그 소문." 바토리가 걸음을 늦췄다. "4화쯤부터 돌던 그거. 최하층에 우리 원본이 통째로 있다는 소문. 그게 진짜였으면—"
"진짜인지 확인하러 가는 거잖아." 렌이 말을 받았다.
하수도의 물—물처럼 보이는 데이터 잔류물—을 세 걸음쯤 건넜을 때, 앞이 트였다. 벽이 사라지고, 검고 매끈한 문이 나타났다. 문 위로 흰 텍스트가 떠올랐다.
**[경계 구역 입구]** **[규칙문 : 홀로 온 자만 이 문을 통과한다.]**
세 사람은 문 앞에 멈춰 섰다.
렌의 눈이 규칙문을 훑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홀로'—정의되지 않은 단어. '온'—과거 시점인지 현재 시점인지 명시 없음. '통과한다'—주체 하나에 한정된다는 조항 부재.
손이 먼저 움직였다. 데드 로그를 부르는 감각이 손끝에 고였다. '홀로'를 '동행 여부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홀로인 상태'로 오독하면—누구든 자기 안에서는 홀로니까—셋 다 통과한다. 렌 혼자 부하를 지면 된다. 세이렌 팔의 회색이 더 번지기 전에, 바토리 방패에 톱니 자국이 더 늘기 전에, 자기가 다 짊어지면—
"멈춰." 세이렌의 손이 렌의 손목을 잡았다.
렌의 손끝에 고이던 오독이 흩어졌다.
"또 혼자 하려고 했지." 세이렌이 그의 눈을 봤다.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했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 "손 먼저 나갔어. 방금."
"내가 지면 돼. 너희 손상 안 나게—"
"그게 문제야." 바토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문 위의 규칙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너 혼자 '홀로'를 통째로 뒤집으면 부하가 얼마나 붙어."
렌이 잠깐 계산했다. "'홀로'라는 단어 하나를 완전히 재정의하는 거니까… 부하 최소 3. 어쩌면 그 이상."
"부하 3." 세이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손상 상환 순서, 너 알잖아. 등록된 개체 중에 손상률 높은 순서로 먹어. 너는 자기지시 보호로 빠지고. 그럼 그 부하 3, 누가 먹지?"
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세이렌의 회색 팔이 답이었다.
"내가 먹어." 세이렌이 자기 팔을 들어 보였다. 노이즈가 손목에서 일렁였다. "46%에서 3만큼 더. 다음 방 가기도 전에 나 반쯤 지워져."
침묵이 문 앞에 고였다.
렌은 2층 거울의 방을 떠올렸다. 그때 누군가—아니, 시스템의 로그 한 줄이 스치듯 남겼던 것. 규칙을 통째로 갈아엎지 않고 '약하게' 비틀면 손상 확률이 확 낮아진다는 힌트. 4층에서 '일괄=동시' 조건 하나만 0.001초 어긋내서 부하 0.3으로 MASS PURGE를 격퇴했던 감각. 규칙을 죽이지 않고, 판정 성립 조건만 살짝 어긋내는 것.
"약하게." 렌이 중얼거렸다. "규칙을 통째로 안 뒤집고, 조건만."
"그래." 세이렌이 손목을 놓았다. "근데 이번엔 그것도 혼자 하지 마."
"어떻게 혼자 안 해." 렌이 되물었다. 진심이었다. 데드 로그는 그의 스킬이었다. 오독은 그의 손끝에서만 나갔다.
바토리가 방패를 앞으로 돌려 세웠다. 방패 표면에 4층에서 생긴 톱니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들어봐." 바토리가 규칙문을 다시 읽었다. "'홀로 온 자만 통과한다.' 너는 이걸 한 사람이 통째로 오독한다고 생각하지. '홀로'라는 단어를 네 손으로 다 비틀어서."
"그럼?"
"'홀로'를 셋으로 쪼개." 세이렌이 이어받았다. 그녀는 이미 렌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홀로'가 성립하는 조건이 뭐야. 첫째, 함께 온 자가 없어야 해. 둘째, 함께 온 자가 있다고 판정될 근거가 없어야 해. 셋째, 통과 시점에 동행이 감지되지 않아야 해."
렌의 머릿속에서 규칙문이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조건 세 개." 렌이 천천히 말했다. "각각 하나씩만 어긋내면—단어를 재정의하는 게 아니라 판정 성립 조건만 무력화하는 거니까—부하가."
"3분의 1." 바토리가 말했다.
렌은 그 숫자를 입안에서 굴려봤다. 부하 3을 셋이 하나씩 나누면 각자 1. 아니, 조건 무력화는 재정의보다 훨씬 가볍다. 4층에서 확인했다. 각 조건 하나당 0.3 안팎. 셋이 나누면—전체가 1도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오독은 내 스킬이야." 렌이 말했다. "데드 로그는 내 손끝에서만—"
"발동은 네가 해." 세이렌이 잘랐다. "근데 '어느 조건을 어떻게 어긋낼지'는 우리가 하나씩 잡아. 나는 '함께 온 자가 없다'를 맡을게. 나는 파편에서 복원됐으니까, 데이터상으로 나는 '원래 이 서버에 없던 존재'야. 등록 시점이 없어. 그러니까 나에 관해선 '함께 온' 판정 자체가 성립을 안 해."
렌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그가 미처 못 본 빈틈이었다. 규칙문을 남보다 빨리 읽는 그가, 세이렌 자신의 데이터 이력에서만 나올 수 있는 각도를 못 본 것이다.
"나는 방패." 바토리가 자기 등을 툭 쳤다. "방패는 독립 오브젝트로 등록돼 있어. 내가 방패를 앞세우고 들어가면, 판정 근거상 '나'는 방패 뒤에 가려져서 '동행 감지'에 안 잡혀. 오브젝트가 개체를 은폐하는 건 규칙 위반이 아니야. 명시가 없으니까."
"셋째 조건." 렌이 숨을 골랐다. "'통과 시점에 동행이 감지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시점만 어긋내." 세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안 들어가면 돼. 통과 판정은 개체별로 찍히니까, 0.5초씩 어긋나게 들어가면 각 판정 순간엔 '홀로'가 참이야. 4층에서 한 거랑 똑같아. '일괄=동시'를 어긋낸 거."
렌은 세 조각으로 갈라진 규칙문을 봤다.
이상했다. 손끝이 근질거렸다. 예전 같으면 벌써 오독을 다 짜서 혼자 밀어넣었을 것이다. 그게 확실하니까. 내가 하면 확실하니까. 그 확신이 삼 년 전에 다섯 명을 지웠다.
"…해보자." 렌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발동은 내가 걸어. 조건은 각자 하나씩 잡아. 신호는—"
"셋 셀게." 바토리가 방패를 앞으로 돌렸다.
렌은 데드 로그를 불렀다. 손끝에 고이는 감각이,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었다. 세 갈래의 실이 각자 다른 손에서 나와 하나의 매듭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데드 로그 : 규칙문 판정 조건 분산 오독 개시]** **[조건 1 — '함께 온 자 부재' : 판정 근거 미등록 (개체 : 세이렌)]** **[조건 2 — '동행 감지 실패' : 오브젝트 은폐 (개체 : 바토리)]** **[조건 3 — '통과 시점 단독' : 시점 순차 분리 (개체 : 렌)]**
"하나." 바토리가 방패를 밀며 반보 앞으로. 세이렌이 그 왼쪽에서 반박자 늦게. 렌이 맨 뒤에서.
"둘."
문 표면의 흰 텍스트가 흔들렸다. 규칙문이 오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여기서 부하 수치가 붉게 치솟았을 것이다.
"셋."
세 사람이 0.5초씩 어긋난 채로 문을 통과했다.
**[판정 : 세이렌 통과 — '홀로' 참 (함께 온 자 판정 불성립)]** **[판정 : 바토리 통과 — '홀로' 참 (동행 미감지)]** **[판정 : 렌 통과 — '홀로' 참 (단독 시점)]** **[오독 부하 총계 : 0.9 — 분산 상환 완료]** **[손상 발생 : 세이렌 0% / 바토리 0% / 렌 0%]** **[DELETE COUNT 소모 : 미미(관측 이하)]**
렌은 자기 시야에 뜬 숫자를 두 번 읽었다.
0.9. 혼자 했으면 3,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 부하가 셋으로 갈라져 0.9. 세이렌의 회색 팔은 조금도 더 번지지 않았다. 바토리 방패의 톱니 자국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자기지시 보호로 빠진 그의 몸도 멀쩡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렌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삼 년 동안, 그 손은 늘 혼자였다. 미끼를 던지고, 소모품을 세고, 손실 5/6을 '허용'이라 적던 손. 그 손이 방금—처음으로—혼자가 아니었다.
"봤지." 세이렌이 렌을 봤다. 그녀의 팔에서 회색이 일렁였지만, 더는 번지지 않았다. "이게 돼. 네가 다 안 해도."
"이게…" 렌이 목이 메었다. "이게 되네."
"당연히 되지." 바토리가 방패를 도로 등에 멨다. 무뚝뚝했지만, 눈가에 옅은 것이 스쳤다. "우리가 그냥 짐인 줄 알았어? 삼 년 전엔 너 혼자 다 하려다 그렇게 된 거야. 이번엔 안 그래."
렌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삼 년 전, '삼십 초만 버티라'며 등 돌렸던 그 등이, 지금 바토리 앞에서 처음으로 굽었다.
문 안쪽은 넓었다.
전작의 낡은 폰트와 신작의 매끈한 UI가 뒤섞여 흐르는 공간. 벽도 바닥도 절반은 리버스의 검은 대리석이었고, 절반은 삼 년 전 서비스 종료한 구작의 픽셀 텍스처였다. 두 개의 서버가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접합면. 경계 구역.
그리고 그 한가운데.
투명한 관 같은 봉인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나, 둘, 셋… 그 안에 사람의 형체가 잠들어 있었다. 파편이 아니었다. 반쯤 탄 조각도, 회색으로 식은 노이즈도 아니었다. 완성된 데이터. 온전한 원본.
렌은 첫 번째 봉인 앞으로 다가갔다. 관 표면에 전작의 폰트로 이름표가 켜져 있었다.
읽는 순간 숨이 멎었다. 삼 년 전, 그가 손실 목록에 넣었던 이름 중 하나였다.
"진짜였어." 세이렌이 두 번째 봉인 앞에 섰다. 그 안에는 봉인문에서 걸어 나왔던 '온전한 세이렌 본체'가 잠들어 있었다. 세이렌은 자기 자신의 원본을 오래 바라봤다. "소문이 아니었어. 우리 원본이… 여기 통째로 있어."
바토리가 세 번째 봉인 앞에 멈췄다. 그 안엔 방패를 든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자기 원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패에 손을 얹었다.
"원본은 부하를 안 만들어." 렌이 낮게 말했다. 4층에서 확인한 규칙이었다. "조각처럼 짜깁기가 아니라 완성된 데이터니까. 이걸 회수해서 덮으면—조각을 태우지 않고 살릴 수 있어. 카운트를 안 깎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삼 년 동안 목표였던 것. 동료를 전부 살리는 것. 그 열쇠가 눈앞에 줄지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봉인은 세 개가 아니었다.
관은 줄을 이어 어둠 속으로 계속됐다. 넷, 다섯, 여섯… 그 뒤로도. 렌이 지운 동료는 다섯이었다. 여섯 번째 관부터는—
"신원 불명." 세이렌이 어둠 속 봉인들을 봤다. 좌표에 떴던 경고. 등록되지 않은 온전한 개체 다수. "저건… 우리가 아니야."
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지운 게 조각들만이 아니라던 세이렌 본체의 경고가, 지금 눈앞에 관으로 서 있었다.
그때, 공간 전체가 흰빛으로 물들었다. 천장에서 팡파르가 울렸다. 리버스의 클리어 방송 음악. 신작 UI가 크게 펼쳐졌다.
**[★ 경계 구역 클리어 ★]** **[최하층 봉인 계층 정복 — 아스테리온 : 리버스 최초 도달자]** **[보상 정산 개시…]**
"됐어?" 바토리가 방패에서 손을 뗐다. 어깨가 풀렸다. "클리어? 이렇게 쉽게?"
"진입만 했는데 클리어?" 세이렌이 눈을 좁혔지만, 목소리엔 안도가 섞였다. "원본 회수도 안 했는데—"
렌도 잠깐, 아주 잠깐, 숨을 놓았다. 팡파르가 귀를 채웠고, 흰빛이 따뜻했고, 온전한 동료들이 눈앞에 잠들어 있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다 끝난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순간, 팡파르가 뚝 끊겼다.
흰빛이 꺼졌다. 클리어 방송 UI가 픽셀 단위로 무너져 내렸다. 렌의 시야에 진짜 텍스트가 떠올랐다. 매끈한 신작 폰트가 아니라, 감정 없는 시스템 로그체로.
**[가짜 완료 신호 — 종료]** **[유인 성공 : 대상 3체 경계 구역 격리 확인]** **[ADMIN 권한 미적용 구역 — 대체 프로토콜 발동]**
그리고 관들이, 하나씩, 안쪽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봉인이 열리는 게 아니었다. 역으로 활성화되고 있었다. 렌이 방금 첫 번째 관에서 읽은 이름표—전작 폰트로 켜져 있던 그 이름—위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가비지 컬렉터 : 경계 구역 원본 데이터 직접 삭제 개시]** **[삭제 대상 우선순위 : 등록되지 않은 개체 → 구작 잔여 원본 → 오류 로그 '렌']**
"안 돼." 렌이 첫 번째 관으로 달려들었다. 이름표 위로 붉은 줄이 점점 짙어졌다. 그가 삼 년 동안 살리려던 얼굴이, 회수하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렌!" 세이렌이 소리쳤다.
톱질 소리가 어둠 속 관들에서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