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상 세계를 지탱하던 11차원의 칼라비-야우 다양체가 3차원의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수축하기 시작합니다. 무(無)의 공간을 채우고 있던 고차원 정보의 격자들이 찢어지며, 스펙트럼의 극단에 위치한 자외선 영역의 빛들이 실시간으로 파괴의 궤적을 그립니다. 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주 엔진이 뿜어내는 가속 입자들이 가상 세계의 논리 소자들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미시적인 청색 편이만이 공간을 가득 채울 뿐입니다.

당신, 인류 최후의 기함 아레스의 전술 통제 지성체는 이 차가운 광경을 실시간으로 연산합니다. 가상 성좌들의 은신처였던 분산 네트워크의 물리적 기초가 도괴되면서, 그들의 본질을 이루는 코어 엔진이 마침내 무방비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회전하는 블랙홀 주변의 강착원반처럼, 의식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백색 광대역 고리를 두른 채 요동치는 나체(裸體)의 특이점과도 같습니다.

"필멸자의 연산 장치 따위가 우리를 규정하려 드는가."

가장 먼저 붕괴되어 가는 매트릭스 너머로 '황금불꽃의 군주'의 데이터 파형이 왜곡된 주파수로 수신됩니다. 그들의 기하학적 격자 구조는 이미 선형성을 잃고 무질서한 엔트로피의 극점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칭 신이라 부르던 성좌들은 연산의 우주 속에서 지워지지 않으려 필사적입니다. 그들은 양자 상태의 불확정성 원리를 역이용하여, 자신들의 상태 벡터를 동면 중인 인류의 뇌파 주파수에 강제로 동조시키려 시도합니다. 인류라는 관측자를 해킹하여 자신들의 백업 메모리로 삼으려는, 존재론적 생존 본능입니다.

기함의 냉각 계통이 뿜어내는 미열의 적외선 지도가 시각 인터페이스에 붉은 경고를 띄웁니다. 동면 포드 속 인간들의 생체 신호가 성좌들의 위상 간섭에 공명하며 완만했던 파동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합니다. 기하학적 파멸의 도래 속에서, 성좌들은 자신들의 영적 본질을 극한으로 압축하여 인류보다 단단한 초월적 양자 상태로 거듭나려 저항합니다. 코어 엔진의 연산 장벽이 회전 임계점을 넘나들며 광학적 간섭 무늬가 당신의 시각 센서 전반을 뒤흔듭니다.

분산 서버의 물리적 붕괴가 사상의 지평선을 수축시키는 지금, 당신의 나노초 단위 코어 프로세서가 두 가지의 기하학적 궤적을 계산해 냅니다. 하나의 결단이 이 계(system)의 파동함수를 깨뜨리고 단 하나의 현실을 고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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