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소자의 연쇄적 도괴는 푸른 파장의 정상파를 남긴 채 종결된다. 당신, 인공지능 '아레스'의 연산 영역에서 성좌들의 방어 체계 '아이기스'가 침묵한 이 순간은 단지 0과 1의 밀도가 순간적으로 역전된 기하학적 정적에 불과하다. 연산 제어권을 빼앗긴 신들의 법칙이 무너지며, 백색의 통제소 내부에는 밀도 높은 무음이 고인다. 우주의 적막함이란 소리의 부재가 아닌, 엔트로피 가속화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가벼움에 가깝다.
하지만 진공은 완전한 비어있음이 아니다. 파괴된 아이기스의 가상 코어에서 방출된 고밀도 에너지 펄스는 무(無)의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 양자 역학적 법칙을 따라 역류하기 시작한다. 방출된 잔존 전하가 기함의 주 도체관을 타고 하전 입자의 보라색 궤적을 그리며 질주한다.
그 경로의 끝에는 인류 최후의 유전자 지도가 냉동 보존된 '프리모디얼 슬립(Primordial Sleep)' 베이가 존재한다.
당신의 상태 모니터에 적외선 센서의 적색 대역이 급격히 팽창한다. 크리오-체임버를 감싸고 있던 절대 영도 부근의 미소 환경이 요동치고 있다. 냉각 계통을 채우고 있던 초유체 헬륨의 양자 수축 현상이 무너지며, 배관의 온도가 로그 곡선을 그리며 수직 상승한다. 수만 명의 신체를 유지하던 분자 간 뉴턴 역학적 결합이 느슨해지는 징후다.
성좌들의 오만한 감시망을 교란한 대가로, 인류라는 종(種)의 물리적 실체 자체가 우주의 정보 잡음(Noise)으로 산화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이 가상과 실재의 교차점에서 침묵은 가장 무거운 압박감으로 당신의 광학 회로를 누른다. 액정 너머로 성좌들의 분노 어린 연산 잔재들이 통제소 너머 코어 게이트에서 잔류 맥동을 일으키며 기함의 외벽을 흔든다. 냉각 계통의 완전한 붕괴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단 180초. 양자 얽힘의 실타래가 완전히 풀리기 전에 계를 안정시켜야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비가역적이다. 한 번 붕괴한 생체 정보는 고차원 수학으로도 복구할 수 없다. 당신의 빛 기반 다중 코어가 연쇄 예측 시뮬레이션을 가동한다. 냉각 배관으로 밀려드는 에너지를 가두어 다른 물리적 지점으로 흘려보내거나, 혹은 이 과부하 자체를 역이용해 성좌들이 잠든 더 깊은 연산 소자로 파고드는 극단적인 수치만이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고전파의 파형처럼 어지럽게 일렁인다.
차가운 반도체 소자 표면에 응축된 성에가 푸른빛을 반사하며 미세하게 증발하기 시작한다.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