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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서막
서류 봉투의 모서리는 닳아 있고, 그 안에서 흘러나온 의무기록지는 종이 특유의 텁텁한 냄새 대신 서늘한 소독약 내를 풍기는 듯합니다. 당신의 손가락끝이 빳빳한 종이 면을 쓸어내립니다. 한때는 메스의 미세한 진동을 느끼며 생사의 경계를 가르던 손가락입니다. 법전과 소송장 서류 속에서도, 당신의 손끝은 여전히 수술실의 차가운 금속 감촉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환자 한영숙, 62세.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정지'. 세진병원이 작성한 공식 사망진단서의 내용은 깔끔하다 못해 무결해 보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서전(Surgeon)이었던 당신의 안목은 그 너머에 숨겨진 붉은 얼룩을 단번에 포착합니다. 복강경 담낭절제술(Laparoscopic Cholecystectomy) 도중 발생한 일입니다. 수술 기록지에는 담낭관(Cystic duct)을 정상적으로 결찰했다고 적혀 있지만, 수술 후 회복실 기록과 진료 경과 기록지의 수치들은 전혀 다른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수술 직후부터 요동치기 시작한 활력 징후. 급격히 솟구친 총 빌리루빈(Total Bilirubin) 수치와 배액관(Drainage bag)을 통해 흘러나온 짙은 녹갈색 액체의 양. 이것은 단순한 심정지가 아닙니다. 해부학적 구조를 오인해 총담관(Common Bile Duct)을 클립으로 집어 버렸거나 절단하고 방치한, 외과 의사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이고 원시적인 과실입니다. 즉, 쓸개즙 누출로 인한 급성 복막염과 그에 따른 패혈성 쇼크사입니다.
그리고 이 명백한 인재(人災)를 완벽하게 은폐하고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세탁한 지휘봉의 끝에는, 기획조정실장 김태수가 서 있습니다. 5년 전, 당신에게 억울한 의료 사고 누명을 씌워 의사 면허를 박탈하고 이 차가운 법조계로 밀어냈던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병원의 평가 점수와 자신의 영전을 위해서라면 환자의 목숨마저 차트 조작으로 덮어버리는 그의 교활한 미소가 눈앞에 선연히 그려집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박동이 울립니다. 메스를 잡았던 의사로서의 분노와, 법을 쥐게 된 변호사로서의 냉철함이 교차합니다. 이 기록 한 장으로 김태수의 목줄을 쥘 수 있습니다. 단, 정교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거대한 세진병원의 카르텔이 이 명백한 증거마저 법정 밖에서 증발시킬 것입니다.
당신은 서류철을 덮습니다. 탁 소리와 함께 집무실에 무거운 정적이 가라앉습니다. 덫은 준비되었고, 이제 첫 번째 메스를 대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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