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툭.

손바닥에 닿는 서류 봉투의 촉감은 차갑고 묵직했다. 대성 F&B 법무팀 배지를 단 김진우 변호사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강진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강진석 씨. 법원 송장입니다. 대성 F&B 소유의 특허 레시피를 무단으로 카피해 사용한 혐의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및 특허 침해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법의 무서움을 똑똑히 알게 될 겁니다."

진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년간 대성 F&B 주방에서 당해온 가스라이팅의 잔재였다. '네까짓 게 감히 대기업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어?'라던 최도현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려던 진석의 눈앞에 푸른색 반투명 시스템 창이 점멸했다.

[시스템 경고] - 대상: 대성 F&B 법무팀 김진우 - 적대적 위협 감지. - 사용자 스트레스 수치: 78% (경계 단계) - 미각 마비 진행도: 32% (가이드 사용 제한 누적 중)

차가운 청색 광원이 시야를 채우자, 마비되려던 이성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진석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성 F&B가 내미는 10억 원짜리 송장은 그저 자신을 위축시키기 위한 허세용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10억 원이라."

진석 대신 나선 것은 한연우 변호사였다. 그녀는 태블릿 PC를 든 채 김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지하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을 딱딱하게 때렸다.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이시군요. 특허법 제29조 제1항에 따른 신규성 및 진보성 결여 조항은 검토하고 이 따위 협박장을 가져온 겁니까?"

김진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연우 변호사님. 대기업의 특허권을 침해한 명백한 정황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얘기하시죠."

"대성 F&B가 등록한 특허 제10-202X-XXXXXX호, '천연 조미료를 이용한 숙성 육수 제조법' 말씀이시죠? 해당 레시피의 핵심 분자 결합 구조는 이미 3년 전 학계에 보고된 공지 기술입니다. 특허 무효 심판 청구서, 내일 아침 특허심판원에 접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연우가 김진우의 가슴팍을 향해 태블릿 화면을 돌렸다. 화면에는 대성 F&B 플래그십 레스토랑 '도현'의 내부 식자재 수급 대장 복사본이 띄워져 있었다.

"특허 침해 가처분을 논하기 전에, 본인들의 위생 상태부터 법원에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이게 무슨……."

"식품위생법 제4조 위반 혐의.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부패한 식재료를 사용해 고객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매장에 대해, 관할 지자체와 식약처에 기습 특별점검을 신청했습니다. 접수 완료 시간은 바로 10분 전입니다."

김진우의 얼굴에서 오만한 미소가 빠르게 씻겨 내려갔다. 그는 침을 삼키며 진석과 한연우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겨우 위생 점검 따위로 대성 F&B의 플래그십 매장을 흔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구청이고 식약처고 우리 네트워크가 안 닿는 곳이 없는 줄 알아야지."

"그 네트워크가 '디지털 미생물 측정기'의 객관적 수치까지 조작해 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죠."

진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수년 동안 최도현의 대역으로 일하며 주방 구석구석을 스캔했던 데이터가 그의 머릿속에 완벽한 좌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입니다. 최도현 셰프에게 주방 청소나 똑바로 해 두라고 전하십시오."

김진우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거칠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탄 검은색 세단이 날카로운 배기음을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다음 날 오전 10시, 강남 테헤란로 중심부에 위치한 '도현(道賢)'. 대성 F&B가 자랑하는 연 매출 100억 대의 초호화 한식 플래그십 레스토랑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단정한 위생복을 입은 직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남구청 위생과, 그리고 식품의약품안전처 특별단속반입니다. 식품위생법 제22조에 의거, 매장 내 조리 시설 및 식자재 보관실에 대한 기습 위생 점검을 실시합니다."

단속반 주임이 공무원증과 점검 명령서를 들이밀었다. 주방 안쪽에서 황급히 뛰어 나온 최도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뒤에는 대성 F&B 마크가 선명히 박힌 법무팀 직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이봐요!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우리 매장은 매달 대기업 자체 기준에 맞춰 최고 등급의 위생 평가를 받는 곳입니다! 당장 나가세요!"

최도현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시선이 단속반원들의 뒤쪽에 서 있는 강진석에게 닿았다. 최도현의 눈등에 실핏줄이 터질 듯 붉어졌다.

"강진석……! 네놈이 결국 미쳤구나! 주방 보조 새끼가 대기업 주방에 흙발을 들이밀어?"

진석은 최도현의 폭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주방 전체의 위생 수치가 3D 렌더링처럼 정밀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천재 요린이 메이커 - 위생 정밀 스캔] - 구역: 메인 셰프 전용 조리대 및 원목 도마 뒤편 - 오염 물질: 낙산균 (Clostridium butyricum) 및 대장균군 - 오염도 수치: 4,500 RLU (식약처 권고 기준치: 150 RLU 이하) - 위험도: 극도로 높음 (식중독 유발 및 원재료 오염 유발)

진석은 단속반 주임에게 다가가 조용히 손가락을 뻗었다.

"주임님. 메인 셰프 전용 원목 도마를 뒤집어 보십시오. 그리고 칼걸이 내부 자외선 소독기의 램프 작동 여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야! 강진석!"

최도현이 진석의 덜미를 잡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연우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최도현 셰프님. 공무집행방해죄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대성 F&B 법무팀이 옆에 있으니 잘 아시겠지요?"

한연우의 차가운 경고에 최도현의 몸이 굳었다. 법무팀 직원 역시 최도현의 옷자락을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공무원을 상대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적으로 최악의 패착이었다.

단속반원들이 진석이 가리킨 원목 도마를 들어 올렸다. 겉보기에는 깨끗하게 닦인 고급 단풍나무 도마였다. 그러나 도마를 뒤집어 바닥면과 조리대 상판이 맞닿는 이음새를 확인하자, 누런 유기물 찌꺼기가 굳어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ATP 미생물 측정기 준비해."

단속반 주임의 지시에 따라 반원이 멸균 면봉을 꺼냈다. 그는 도마 뒤편의 틈새를 꼼꼼히 문지른 뒤, 시약이 담긴 튜브에 넣고 흔들었다. 그리고 디지털 미생물 측정기(ATP 측정기)에 삽입했다.

주방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최도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측정기의 액정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도마 위로 떨어졌다.

삐빅-.

간결한 기계음과 함께 화면에 굵은 디지털 숫자가 인쇄되듯 나타났다.

[측정 결과: 4,500 RLU]

"4,500……?"

단속반 주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식약처 위생 표준 기준치인 150 RLU의 정확히 30배 초과입니다. 이건 단순 오염이 아니라, 조리 도구를 전혀 소독하지 않고 방치해 낙산균이 대량 증식한 상태입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매일 소독기로 소독을……!"

최도현이 더듬거리며 칼걸이 자외선 소독기로 향했다. 진석이 한 걸음 다가가 소독기 전원을 켰다. 파르스름한 불빛이 들어오는 듯싶더니, 이내 틱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 버렸다.

"자외선 램프의 수명이 다한 지 최소 3개월이 넘었습니다. 겉보기에만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내부 온도는 낙산균과 대장균이 번식하기 가장 좋은 35도를 유지하고 있었죠. 최도현 셰프님, 본인의 시그니처 메뉴인 '저온 숙성 육회'를 이 도마와 칼로 썰어내지 않았습니까?"

진석의 조목조목 짚어내는 팩트 폭격에 최도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대성 F&B 법무팀을 바라보았으나, 그들 역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국가 공인 측정 기계가 뿜어내는 '4,500 RLU'라는 숫자는 그 어떤 대기업의 법률적 방어막으로도 덮을 수 없는 절대적인 증거였다.

단속반 주임이 수첩을 꺼내 들고 엄숙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식품위생법 제4조 및 동법 제71조에 의거, 즉각적인 시정 명령 및 영업정지 15일 처분을 사전 통지합니다. 아울러 위해 식품 제조 혐의로 형사 고발 절차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현장 시료 채취하겠습니다."

"영업정지 15일이라니요! 하루 매출이 수천만 원인 매장입니다! 주임님, 한 번만 재고를……!"

최도현이 단속반 주임의 소매를 붙잡았으나, 주임은 단호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대기업 플래그십 매장에서 이 정도 수치가 나온 건 명백한 직무유기이자 범죄입니다. 서명하십시오."

최도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처분 고지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이 진석에게 꽂혔다. 불타는 듯한 적의가 가득했지만, 진석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더 이상 최도현이라는 거대한 허상 앞에 위축되던 주방 보조 강진석이 아니었다.

[시스템 메시지] - 퀘스트 완료: '위생 표준법을 통한 적대자 무력화' - 대상(최도현)의 스트레스 수치: 99% (붕괴 단계) - 고객 및 관람자 뇌파 동조율 급증: 도파민 92% 상승 - 감정 동조 포인트 5,000 XP 획득!

[시스템 페널티 완화] - 획득한 포인트를 소모하여 '물리적 미각 환전'을 실행합니다. - 미각 마비 진행도: 32% -> 12% (감각 회복 중)

순간, 진석의 혀끝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입안을 감돌던 무미건조한 모래알 같던 느낌이 사라지고, 주방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식초의 산미와 빗물의 흙내음이 선명하게 비강을 찔렀다. 혀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진석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완벽한 승리였다.

***

위생 점검이 끝나고 '도현'의 정문에 '영업 정지'를 예고하는 행정처분 공고문이 붙었다. 매장을 빠져나온 진석과 한연우는 인근의 한적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한연우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대단하더군요. 자외선 소독기 램프의 수명까지 정확히 짚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주방에서만 5년을 일했습니다. 눈감고도 어디에 먼지가 쌓이는지 다 압니다. 최도현은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 연출을 할 뿐이니까요."

진석의 건조한 어조에 한연우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단순한 의뢰인을 대하는 것 이상의 깊은 신뢰가 서려 있었다.

"이번 영업정지로 대성 F&B의 브랜드 이미지에는 심각한 타격이 갈 겁니다. 특히 최도현을 앞세워 준비하던 가맹 사업 계획은 전면 보류되겠지요. 강진석 씨 덕분에 우리 법적 대응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되었습니다."

[시스템 알림] - 조연 '한연우'와의 신뢰도 상승. - 추가 감정 동조 포인트 1,000 XP 적립. - 미각 마비 진행도: 10% (안정 상태)

진석은 되살아난 미각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원두의 풍미가 혀의 돌기 하나하나를 자극했다. 자신의 힘으로 되찾은 맛이었다. 그 맛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달콤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최도현의 대역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대성 F&B가 빼앗아 간 내 이름의 레시피들을 전부 되찾아올 겁니다."

"돕겠습니다. 저 역시 그들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쳤다. 자본과 법률, 그리고 과학적인 수치로 무장한 그들의 역습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뗐을 뿐이었다.

***

그날 밤 9시. 장대비가 쏟아지는 푸드 테크 밸리의 이면 도로. 진석은 한연우와 헤어진 뒤, 홀로 우산을 쓰고 퇴근길에 올랐다.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번져 굴절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뒤쪽에서 불규칙하고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석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그림자 사이로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최도현이었다. 고급 명품 슈트는 빗물에 엉망으로 젖어 있었고, 넥타이는 풀어헤쳐진 채였다. 그의 손에는 반쯤 비어 있는 양주병이 들려 있었다. 벌게진 눈으로 진석을 노려보는 그의 모습은 낮의 화려했던 스타 셰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강진석……!"

최도현이 이빨을 갈며 진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몸에서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네가 감히 내 매장을 망쳐? 내 커리어를 끝장내? 주방 보조 구더기 같은 새끼가 어디서 머리를 쳐들어!"

진석은 우산을 든 채 차분하게 최도현을 응시했다.

"최도현 셰프님. 음주 소란은 본인의 남은 명예마저 갉아먹을 뿐입니다. 비켜 서시죠."

"명예? 하! 하하하!"

최도현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빗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양주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파편 소리가 골목길의 정적을 깨뜨렸다.

최도현이 진석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눈에 광기 어린 미소가 서서히 떠올랐다. 진석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확신에 찬 비열한 미소였다.

"너, 요새 주방에서 요리할 때 간 전혀 안 보더라?"

진석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최도현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젖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무리 레시피 수치니 분자 조합이니 떠들어대도 숨길 수 없어. 내가 네놈 밑바닥을 모를 줄 알았냐? 너 요새 간 못 보지? 네 혀는 맛을 못 보는 개껍데기 셰프잖아!"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최도현의 폭로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진석의 심장이 강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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