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60도의 열기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숨을 쉴 때마다 달궈진 식용유와 탄화된 단백질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강진석은 14시간째 서 있는 중이었다.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손끝은 칼날에 쓸리고 뜨거운 소스에 데어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었다.
탁. 탁. 탁. 탁.
일정한 마찰음이 주방의 소음을 뚫고 울렸다. 진석의 손끝에서 아스파라거스가 0.5cm 간격으로 정교하게 잘려 나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칼질이었다.
"야, 강진석."
날카로운 목소리가 진석의 고막을 때렸다.
진석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수년간 반복된 가스라이팅이 만든 조건반사였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목소리의 주인은 최도현이었다. 대성 F&B가 내세운 프리미엄 오마카세 브랜드, '가온'의 총괄 셰프. 금사로 이름이 새겨진 흰색 조리복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직접 칼을 잡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최도현이 진석의 도마 앞으로 다가왔다. 구두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무겁게 얹혔다.
"이게 가니쉬로 쓸 수준이라고 생각하냐?"
최도현이 손가락 끝으로 아스파라거스 조각을 툭 쳤다. 잘려 나간 단면은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최도현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단면이 뭉개졌잖아. 눈이 삐었어? 이따가 오는 VIP들이 이따위 쓰레기를 먹고 대성 F&B를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진석은 고개를 숙였다.
목구멍까지 반박이 차올랐다. 단면은 뭉개지지 않았다. 섬유질 하나 다치지 않게 정밀하게 편썰기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진석은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최도현의 말은 곧 법이었다. 반항의 대가는 가혹한 따돌림과 주방에서의 배제뿐이었다.
주변의 다른 보조 요리사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철저히 진석을 외면했다. 최도현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최도현이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자격증도 없는 낙하산 새끼라 그런지 기본이 안 돼 있어. 내가 내 레시피 전수해 주면서 키워 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어디서 배운 망나니질이야?"
그 레시피는 원래 진석의 수첩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석이 밤을 새우며 연구하고 기록했던 한식 분자 요리 기법들. 최도현은 그것을 통째로 가로채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내고 스타 셰프의 반열에 올랐다. 진석은 그저 그의 그늘 밑에서 보조라는 이름의 노예로 썩어가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진석은 안전한 침묵 속으로 숨으려 했다. 바닥의 타일 틈새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때였다.
시야가 푸른색으로 번쩍였다. 눈앞의 열기가 일순간 차갑게 식는 착각이 들었다.
화르륵.
청색 불꽃 같은 실선들이 진석의 망막을 타고 흘렀다. 이윽고 반투명한 푸른색 상태창이 시야 중앙에 떠올랐다.
[시스템 '천재 요린이 메이커'가 각성합니다.]
[사용자의 가용 능력을 스캔합니다…… 스캔 완료.]
[고유 권능: '분자 구조 시각화' 및 '실시간 생체 뇌파 분석'이 활성화됩니다.]
진석은 눈을 비벼 엎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푸른 글씨들은 시선을 옮겨도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따라붙었다.
동시에, 주방 중앙의 워터에이징 수조가 푸른빛으로 스캔되기 시작했다. 최도현이 오늘 저녁 VIP 코스의 메인 요리로 쓰기 위해 꺼내놓은 최고급 한우 안심이었다.
글자들이 안심 덩어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대상: 최상급 한우 안심 (드라이에이징 45일)] - 단백질 분자 이물질 비율: 14.2% - 낙산균(Clostridium butyricum) 오염 수치: 840 CFU/g (식품위생 표준 기준치 초과) - 산패도: 0.42 (주의 단계) - 상태: 유통기한 임박 및 보관 온도 관리 부실로 인한 미세 부패 진행 중.
***
진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낙산균 오염 수치 840 CFU/g. 식품위생법상 허용 기준치를 아득히 초과한 수치였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냄새도 드라이에이징 특유의 치즈 향에 묻혀 있었지만, 속은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업의 플래그십 매장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재료를 방치하고 있었다. 최도현이 원가 절감을 위해 배선우 상무와 짜고 저가 식자재를 납품받아 쓰던 부패의 증거였다.
그때, 또 다른 알림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
[알림: 미각 정밀 가이드를 수용하시겠습니까?] - 효과: 식재료의 맛, 영양, 조리 온도의 분자 단위 최적 경로 제공. - 대가: 실제 물리적 미각 마비 페널티 돌입 (시스템 사용량에 비례하여 혀의 미각 세포가 점진적으로 괴사함). - 페널티 해소 조건: 고객에게 요리를 제공하여 도파민 및 옥시토신 수치를 자극, '감정 동조 포인트'를 획득하여 미각으로 환전해야 함.
***
'미각 마비.'
요리사에게 미각을 잃는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
진석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눈앞에 서서 자신을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는 최도현의 얼굴이 보였다. 이대로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대역으로 살다가 버려질 것인가, 아니면 악마의 계약을 맺고서라도 이 지옥을 부수고 나갈 것인가.
선택은 길지 않았다. 안전한 숫자 뒤로 숨는 것은 오늘로 끝이었다.
'수락한다.'
심장 속으로 차가운 얼음물이 주입되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혀끝이 빠르게 얼어붙었다. 입안에 고인 침의 맛도, 주방 공기에 섞인 짠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안에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미각이 사라졌다. 대신, 뇌리로 직접 꽂히는 절대적인 수치적 감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야, 대답 안 해? 귀까지 먹었냐?"
최도현이 진석의 어깨를 밀쳤다. 진석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눈빛은 이전과 달랐다. 짓눌려 있던 눈동자에 서늘한 생기가 돌았다.
"가니쉬는 완벽했습니다."
진석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뭐?"
"두께 0.5cm, 절단면의 세포 파괴율 3% 미만. 아스파라거스의 수분 보존율을 극대화한 최적의 칼질이었습니다. 뭉개진 것은 셰프님의 안목입니다."
주방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늘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찌질한 강진석이 아니었다.
최도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그리고 그 고기."
진석이 최도현이 들고 있는 안심을 가리켰다.
"지금 팬에 올리면 안 됩니다."
"하! 네가 이제 조리법까지 훈수질이냐? 미슐랭 스타 가온의 셰프가 나야, 너야?"
"팬 온도는 240도. 드라이에이징으로 수분이 날아간 고기를 그 온도에 올리면 겉면이 타기 전에 단백질 수축이 급격해집니다.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기도 전에 육즙이 전부 유출됩니다."
진석의 눈에 안심의 분자 구조가 실시간으로 보였다.
***
[실시간 팬 온도: 242℃] - 열전도 시뮬레이션: 수분 손실률 22% 예상. - 단백질 분자 결합 비: 4:6 (불균형, 질겨짐). - 권장 조치: 심부 온도를 54℃로 유지하기 위해 화력을 180℃로 낮추고 12초 뒤 뒤집을 것.
***
"12초 뒤에 뒤집어야 단백질 분자 결합 비가 7대 3으로 유지됩니다. 지금 뒤집으면 질겨서 씹지도 못합니다."
"이 개새끼가 어디서 말장난을 해!"
최도현은 진석의 말을 무시하고 고기를 팬에 던지듯 올렸다.
치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육즙이 급격하게 흘러나와 팬 바닥에서 끓어올랐다. 고기는 마이야르 반응에 의한 갈색 크러스트가 아니라, 수분에 젖어 찌듯이 익어가고 있었다.
최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석이 말한 그대로였다. 탄화되는 냄새와 함께 고기 표면이 하얗게 굳어갔다.
"이, 이건 고기 자체의 수분 함량이 많아서 그런 거야!"
최도현이 변명하듯 소리쳤다.
"낙산균 오염으로 세포막이 붕괴되어 수분을 붙잡아두지 못하는 겁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고기를 썼으니까요."
진석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위생 표준법 기준치 초과입니다. 식약처 불시 검문이라도 나오면 영업 정지 처분을 피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최도현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진석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통기한 임박 고기를 쓴 것은 배선우 상무와 자신만의 극비 사항이었다. 장부조차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주변 보조 요리사들의 시선이 최도현에게 쏠렸다. 최도현은 끓어오르는 수치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쾅!
최도현이 조리대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강진석! 네가 감히 내 주방에서 선동질을 해?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여!"
그는 진석이 정성껏 준비해 둔 가니쉬 접시를 손으로 쓸어버렸다.
쨍그랑!
하얀 도자기 접시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스파라거스들이 더러운 바닥 타일 위로 흩어졌다.
"치워."
최도현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전부 치우고, 이따가 품평회 끝나고 내 방으로 와. 네 놈 목을 어떻게 비틀어줄지 결정할 테니까."
최도현은 씩씩거리며 고기 팬을 든 채 VIP 룸으로 향하는 통로로 사라졌다.
진석은 바닥에 흩어진 아스파라거스를 내려다보았다.
혀끝은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침을 삼켜도 차가운 금속을 머금은 듯 무감각했다. 하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뛰고 있었다.
이제 저들의 숫자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에게는 더 정확하고, 더 완벽한 진짜 숫자가 있으니까.
진석은 허리를 숙여 깨진 접시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손끝이 날카로운 사기 조각에 베여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통증은 느껴졌지만,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려라.'
진석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되새겼다. 최도현의 몰락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
한 시간 후, 총괄 셰프실.
가죽 소파에 깊숙이 묻혀 앉은 최도현은 전자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매캐한 체리 향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진석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도현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책상 위의 서류 봉투를 툭 던졌다.
툭.
서류 두 장이 매끄러운 유리 책상 위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진석의 눈이 서류의 제목을 포착했다.
[권고사직 통지서] 그리고 그 아래에 깔린 또 다른 문서. [레시피 및 지식재산권 양도 동의서]
진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마주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분노가 치밀었다.
최도현이 다리를 꼬며 비열하게 웃었다.
"사인해."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해고야. 그리고 네가 그동안 내 주방에서 일하면서 끄적거렸던 그 레시피 노트들 있지? 그거 전부 가온의 자산으로 귀속된다는 동의서야."
최도현이 만년필을 진석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건 강탈입니다. 제 이름으로 연구한 레시피들입니다."
"강탈? 야, 강진석."
최도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네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자격증도 없고 학벌도 없는 그냥 주방 보조야. 네가 만든 레시피? 누가 믿어줄 것 같아? 대성 F&B라는 거대한 백이 없으면 넌 그냥 길거리 잡상인만도 못한 존재야."
최도현은 손가락으로 서류를 톡톡 쳤다.
"순순히 사인하고 나가면 퇴직금 몇 달 치는 챙겨줄게. 하지만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업계에 소문 싹 퍼뜨려서 대한민국 어떤 주방에서도 네 놈 얼굴 못 들게 만들어 줄 거야."
진석은 가만히 서류를 바라보았다.
'네 이름으로 된 주방은 평생 없을 거다.'
최도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수년 동안 자신을 옥죄던 그 가스라이팅의 사슬이 다시 한번 목을 죄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석의 눈앞에 다시 한번 푸른색 시스템 창이 점멸했다.
[경고: 부당 계약 조항 감지.] [분석 결과: 해당 동의서 서명 시, 사용자의 독자적 브랜드 설립 및 레시피 소유권이 영구 박탈됨.]
진석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혀의 감각은 사라졌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명석했다. 저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토록 서두르는 것이다. 낙산균 오염 식재료, 그리고 빼앗긴 레시피들.
진석은 만년필을 쥐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최도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명하지 않으면요?"
최도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새끼가 진짜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최도현이 진석의 덜미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진석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녹음기 앱이 작동하고 있었다.
"지금 하시는 모든 말씀은 부당노동행위 및 협박죄의 증거로 법원에 제출될 겁니다."
최도현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