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 밖으로 디딘 첫발
이십 載(재)의 성쇠(盛衰)가 이토록 찰나런가.
어둠만이 유일한 동반자였고, 차가운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이슬만이 목을 축여 주던 세월.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석문이 육중한 비명을 지르며 열릴 때, 동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벽공(碧空)의 달빛이었다.
당신은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먼지 쌓인 가사(袈裟)처럼 해진 옷자락이 밤바람에 어지러이 흔들린다. 이십 년 동안 오직 복수만을 향해 벼려온 검 한 자루가 당신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울부짖는다. 검은 차가운 얼음물 속에 가라앉은 잔청(殘淸)의 월광(月光)을 닮아 있었고, 검 끝은 소리 없이 땅을 향해 흐른다. 고독은 이미 뼈에 사무쳐 서리가 되었으나, 그 서리가 바로 당신의 척추를 탱탱하게 지탱해 온 고목(枯木)의 심재(心材)였다.
눈앞에 펼쳐진 산하(山河)는 낯설고도 쓸쓸하다. 한때 가문의 전각이 찬란하게 빛나던 거리는 무너진 기와 조각과 황야의 잡초만이 성성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성쇠의 무상함이 대지 위에 가득하건만, 그 황량함 속에서도 눈에 띄는 적의(敵意)가 존재한다. 저 멀리 백색의 깃발이 밤하늘을 등지고 오만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백하문(白河門). 이십 년 전, 당신의 가문인 설화검문(雪花劍門)을 피로 씻어내고 그 시체 위에 찬란한 금루(金樓)를 세운 위선자들의 이름.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과 횡포는 여전히 강산에 깊은 고랑을 파놓고 있었다. 강호의 공기는 이토록 비정하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계율 아래 약자들의 신음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심장 깊은 곳에서 태동하는 검의 울림이 한기를 더해간다. 슬픔도 분노도 너무 오래 묵으면 한천(寒天)의 얼음처럼 투명해지는 법. 당신의 눈매는 마른 벌판 위의 고독한 매의 눈처럼 쓸쓸하면서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다.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비바람 속에 잊힌 가문의 한(恨)을 강호에 다시 선포하기 위한 서막. 하지만 사방에 적들의 눈길이 뻗어 있고, 한 자루 검만으로 대적하기엔 가야 할 길이 구만리다. 세상을 등진 자의 걸음걸이는 신중해야 마땅하며, 검의 첫 서슬은 먹잇감의 목덜미에 가장 투명하게 가닿아야 한다.
삭풍(朔風)이 불어와 도포 자락을 세차게 때린다. 어둠 속에 숨어 강호의 은밀한 치부를 쥐고 흔드는 흑무(黑霧)의 구덩이로 발을 들일 것인가. 아니면 저 오만한 백색의 깃발을 찢어 발기며 정면으로 가문의 귀환을 알릴 것인가. 당신은 대지 위에 길게 번지는 어둠을 내려다보며 검자루를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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