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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기연, 정사(正邪)의 갈림길
어둠이 깊다. 동굴 내부를 채운 음기(陰氣)가 가라앉는다. 바위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당신의 손바닥을 비춘다. 피비린내 나는 사도(邪道)의 수장으로 살아온 세월. 그 거친 손 위에 올려진 가죽 서책은 지나치게 정갈하다. 천고의 기연이라 불리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의 구결이 그곳에 적혀 있다.
당신은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호흡이 깊어진다.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眞氣)가 이맥(異脈)을 타고 흐른다. 평소의 포악한 사파의 기운과는 결이 다르다. 부드럽고도 가없는 도가(道家)의 기운. 정(正)과 사(邪)의 내공이 단전 내부에서 거대한 태극(太極)의 형상으로 마주한다. 충돌하지 않는다. 도리어 서로를 흡수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완성한다. 정사합일(正邪合一)의 기적이 몸 안에서 실현되는 순간이다.
눈을 뜬다. 안광(眼光)이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비급의 뒤편에 적힌 정파의 추악한 이면이 떠오른다. 정파의 명숙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뒤로는 사파의 무리를 고용해 방파를 살육하고 비급을 탈취했다. 그 위선(僞善)의 중심에 무림맹(武林盟)이 존재한다. 백도를 자처하는 그들의 가죽을 벗겨내야 한다. 무림을 정화하고 정사(正邪)를 하나로 움켜쥐는 것. 그것이 새로운 맹주가 손에 쥐어야 할 천하다.
무림맹주 선발전이 코앞이다. 천하의 후기지수들이 숭산(崇山)으로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사파 제일인 장무극의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다. 위선자들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위장이 필수적이다.
탁자 위에 두 개의 물건이 놓여 있다.
왼편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신분첩이 있다. 이미 멸문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 명문 정파인 청류검파(淸流劍派)의 유일한 전인으로 위장할 수 있는 정교한 위작(僞作)이다. 정파의 혈통이라는 완벽한 비호 아래 어둠 속에서 이간계를 획책할 수 있는 기회다.
오른편에는 향나무로 깎아 만든 소박한 패가 놓여 있다. 어떠한 가문이나 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은거한 기인(奇人)의 독문 제자임을 만천하에 증명할 패다. 정파의 위선자들 앞에서 기상천외한 무공의 위력을 정면으로 과시하며 무림맹의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당신의 시선이 두 물건 위를 무겁게 훑는다. 굳게 다문 입술 끝이 미세하게 굳어진다. 가느다란 검기를 머금은 바람이 동굴 입구를 스치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낸다. 정파의 심장부로 침투할 최선의 법을 결정해야 할 순간이다. 당신의 손이 천천히 허공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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