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실바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압박감이 그라운드의 열기를 단숨에 얼려 버렸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단단한 체구가 태성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세계 최고의 센터백. 유럽 빅리그를 호령하며 수많은 월드클래스 공격수들을 잔혹하게 지워버렸던 포식자가 마침내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제법이군, 꼬맹이.”
실바가 낮게 읊조리며 태성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툭 치는 가벼운 동작이었음에도 묵직한 질량이 어깨뼈를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삐빅-!
태성의 망막 위에 투영된 미래 전술 장부의 그리드가 붉은빛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위험: 월드 클래스 수비수 대인 마크 진입] [상대 수비 메커니즘 변동 - 예측 불가 영역 발생]
그저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장부의 연산 회로가 비명을 질렀다. 실바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변 공간의 물리적 수치를 왜곡하고 있었다. 수많은 변수와 무자비한 태클의 궤적이 붉은색 타일이 되어 태성의 발밑을 어지럽게 뒤덮었다.
단순히 피지컬이 강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무게 중심을 읽고, 패스 길목을 미리 차단하는 수비 지능이 규격 외였다.
태성은 침을 삼켰다. 아르헨티나의 조직력이 실바라는 구심점을 얻자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태성아, 저 새끼 눈빛이 장난 아니다. 굳이 들이받지 말고 뒤로 돌려.”
주변을 서성이던 홍창민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지기 싫어하는 창민마저도 실바가 뿜어내는 기운에는 본능적인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갔다.
‘피할 생각 따위는 없다.’
전생의 비운을 끊어내기 위해 돌아온 무대였다. 세계 최강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월드컵 우승이라는 목표는 한낱 개꿈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의 공격이 무산되고, 다시 한국의 빌드업이 시작되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은 백승우가 태성을 바라보았다. 승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실바가 태성의 등 뒤에 바짝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실바의 단단한 가슴팍이 태성의 등에 닿았다. 숨결마저 느껴지는 완벽한 락(Lock)이었다.
“여기서 돌아서진 못해.”
실바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묵직하고 서늘한 압박. 조금이라도 공을 다루는 반경이 넓어지면 가차 없이 발을 집어넣어 꺾어버리겠다는 살기가 전해졌다.
태성은 머릿속 장부를 극한으로 가동했다.
웅-!
뇌리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앞의 세상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실바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 발뒤꿈치에 쏠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주변 아르헨티나 수비진의 프레싱 라인이 좁혀져 왔다.
[과부하 경고 타일 작동] [현재 발목 과부하 게이지: 18% -> 45%] [경고: 무리한 단독 돌파를 시도할 경우 게이지가 임계치까지 급상승합니다.]
사방이 온통 붉은 타일로 깜빡였다. 혼자서 실바를 제치려다가는 오른쪽 발목에 가해지는 급격한 제동력 때문에 게이지가 폭발할 것이 뻔했다. 전생의 트라우마가 뇌리를 스쳤다. 독선은 곧 파멸이었다.
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사령관은 제 몸을 던져 싸우지 않는다. 장기판의 모든 말을 부려 적의 목을 벨 뿐이다.
‘내가 미끼가 된다.’
태성이 공을 받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실바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거대한 벽이 덮쳐오는 감각.
툭.
승우의 패스가 굴러왔다. 태성은 공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터치로 실바의 예측을 깨트려야 했다.
태성은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의 궤적만 살짝 비틀었다. 자신의 등 뒤, 실바의 가랑이 사이를 꿰뚫는 절묘한 원터치 패스였다.
“뭐...?”
실바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공간을 향해 이미 폭발적인 스프린트를 시작한 존재가 있었다. 홍창민이었다.
태성은 이미 3초 전부터 창민의 달리기 궤적을 3차원 물리치로 연산하고 있었다. 창민의 폭발적인 속도와 아르헨티나 풀백의 반응 속도를 계산해 유도한, 오직 창민만을 위한 맞춤형 공간 패스였다.
“창민아, 뛰어!”
태성의 외침과 동시에 창민이 번개처럼 공간을 파고들었다. 실바가 황급히 몸을 돌려 태성을 놓아두고 창민의 진로를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태성은 멈추지 않았다. 실바가 떨어져 나간 찰나의 빈틈을 포착했다.
타앗!
태성이 아르헨티나의 페널티 박스를 향해 대각선으로 꺾어 들어갔다.
창민은 실바의 압박이 들어오기 직전, 태성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예전의 창민이었다면 무리하게 슛을 때렸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태성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는 짜릿함을 맛본 후로, 그의 몸은 태성의 지휘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창민이 논스톱으로 공을 깎아 찼다.
툭.
공은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실바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완벽한 2대 1 패스(월 패스)였다.
“이런 미친...!”
실바가 급하게 공중에서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관성이 붙은 거구는 태성의 날렵한 방향 전환을 따라잡지 못했다.
태성은 떨어지는 공을 가슴으로 부드럽게 받아내며 아르헨티나의 미지 압박 구역을 완전히 유린했다.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아르헨티나의 수비진이 단 두 번의 유기적인 숏패스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경기장 전체가 거대한 함성으로 들끓었다.
“말도 안 돼...! 안드레아 실바가 순간적으로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중계석의 해설위원이 흥분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태성의 발밑에서 다시 푸른색 패스 루트가 시각화되었다. 이번에는 백승우였다.
승우는 상대의 중앙 미드필더들을 뒤로 끌어당기며 하프스페이스를 완벽하게 선점하고 있었다. 승우의 고질적인 습관, 압박 상태에서 찔러주는 패스가 계산보다 항상 1미터 짧게 떨어진다는 단점.
하지만 지금의 태성에게 그것은 단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 수비가 예측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공을 가로챌 수 있는 완벽한 변수였다.
태성이 승우를 향해 낮고 빠른 패스를 보냈다.
예상대로 승우의 리턴 패스는 평소보다 1미터 짧게 흘렀다.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가 기회라 판단하고 몸을 날렸다.
스윽.
하지만 태성은 이미 그 자리에 가 있었다. 승우의 단점을 기회로 환산한 태성이 한발 먼저 공을 낚아채며 상대의 인터셉트 시도를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승우야, 그대로 들어가!”
태성의 짧은 지시와 함께 승우가 아르헨티나의 중앙 수비 라인 사이로 침투했다.
태성이 절묘하게 찔러준 로빙 스루패스가 아르헨티나 수비수들의 키를 넘겨 승우의 발밑에 정확히 떨어졌다. 승우의 눈빛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것이 보였다. 전생에 늘 패배주의에 젖어 세계의 벽 앞에서 좌절해야 했던 그들이 아니었다.
지금 그들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제어하고, 농락하고 있었다.
철썩!
승우가 가볍게 밀어 넣은 공이 아르헨티나의 골망 구석을 흔들었다.
추가골이었다. 스코어는 2-0.
“골!!! 백승우!!! 대한민국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두 골 차로 앞서갑니다!”
상암 벌이 뒤집어졌다. 6만 관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광포한 함성을 질러댔다.
벤치 앞의 최강식 감독은 멍하니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태블릿 패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패드의 화면에는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 왔으나, 한국 선수들의 기술적 한계와 조직력 부족으로 구현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던 전술이 띄워져 있었다.
‘제로톱 가짜 9번(False-Nine) 시뮬레이션.’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미끼가 되어 상대 센터백을 끌어내고, 그로 인해 발생한 빈 공간을 2선 미드필더들이 유기적인 패스워크로 파괴하는 전술. 현대 축구 전술의 정점이자 극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빌드업 체계.
그것이 지금, 강태성이라는 19세 신예의 지휘 아래 그라운드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되고 있었다.
최강식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전술이었단 말인가?”
데이터 만능주의자였던 그의 이성이 완벽하게 붕괴하고 있었다. 태성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천재성이 아니었다. 필드 전체의 3차원 물리적 가치를 한발 앞서 계산하고 동료들을 장기말처럼 부려 세계 최강을 무너뜨리는, 그야말로 그라운드의 절대 지배자 그 자체였다.
[연계 플레이 성공] [발목 과부하 게이지 감소: 45% -> 12%]
태성은 발목을 감싸 안는 청량한 해방감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무리한 개인 돌파를 배제하고 동료들을 활용한 완벽한 전술적 승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실바를 바라보았다.
세계 최고의 센터백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전광판과 태성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의 오만하던 눈빛은 이제 경악과 깊은 경계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한낱 19세 꼬맹이의 패스 게임에 농락당하는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후반 30분이 넘어가자, 그들은 세계 챔피언의 자존심을 걸고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그들의 파상공세에 한국의 수비진이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후반 35분 만회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스코어는 2-1.
단 한 골 차의 팽팽한 긴장감이 다시 그라운드를 감쌌다. 아르헨티나의 프레싱은 더욱 거칠고 포악해졌다. 무승부만으로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듯했다.
경기 시간은 흘러 후반 40분을 향하고 있었다.
관중석의 함성은 비명에 가까워졌고, 선수들의 유니폼은 진흙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체력이 바닥나 발걸음이 무거워진 동료들의 움직임이 태성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한 골 더 쐐기를 박아야 한다.’
태성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다시금 전술 장부를 켰다.
그 순간, 아르헨티나의 빌드업을 차단한 백승우가 전방을 향해 길게 공을 걷어냈다. 공은 높고 포물선을 그리며 아르헨티나의 박스 좌측 부근으로 흘렀다.
태성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타앗!
그가 박스 좌측 공간을 깨트리며 침투했다. 실바가 이를 갈며 그의 뒤를 무섭게 추격해 왔다.
퉁!
공이 잔디에 튀기며 태성의 발밑으로 비스듬히 굴러왔다.
완벽한 득점 찬스였다. 골키퍼와의 1대 1 상황. 슛 각도가 온전히 열려 있었다. 골문 구석을 향해 정확히 때려 넣기만 하면 경기를 끝낼 수 있는 완벽한 쐐기골의 기회였다.
하지만.
[경고: 현재 위치에서 슈팅 각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측 발목을 축으로 하는 강한 피벗(Pivot) 회전이 필요합니다.] [예상 발목 과부하 게이지 상승률: 65%] [현재 게이지(12%) + 상승률(65%) = 77%] [게이지가 75%를 초과할 경우, 발목 인대의 미세 손상이 누적되며 부상 위험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뇌리를 때리는 붉은색 경고음이 태성의 귓가를 찢을 듯이 울렸다.
단 한 번의 단독 돌파와 강력한 슈팅을 위한 피벗. 그것은 전생의 부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치명적인 움직임이었다. 발목 과부하 게이지가 위험선인 75%를 넘어설 것이 확실했다.
등 뒤에서는 실바가 이를 악물고 슬라이딩 태클을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실바의 거친 태클에 발목이 완전히 날아갈 판이었다.
슛을 때려 경기를 끝낼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안전한 패스 루트를 찾을 것인가.
공이 태성의 오른발 끝에 닿는 순간, 시간은 다시 한번 가혹하게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