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붕괴 엔진이 뿜어낸 잔여 에너지가 루나 호의 궤적을 따라 푸른 스펙트럼의 기하학적 나선으로 응축된다. 아이지스의 연산장치들이 방출하는 냉각 질소 가스가 조타실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으며, 함교의 홀로그램 스크린은 보라색과 초록색의 간섭 무늬로 일렁인다. 공간을 정교하게 왜곡해 벼려낸 도약은 잔존하는 적 기동선들을 순식간에 중력의 지평선 너머로 쓸어버렸다.
성간 통신망을 타고 다차원의 성좌들이 보내오는 감응 편향적 신호들이 계기판에 수치화되어 떠오른다. [‘심연의 지각 변동자’가 당신의 비유클리드적 기동에 고양감을 느낍니다.] [‘단절된 초끈의 지휘자’가 영혼의 진동수와 동조하는 후원 포인트를 송신합니다.]
망막에 투사되는 데이터의 폭포 속에서 당신은 차가운 함장석의 금속 손잡이를 쥔다. 승리의 열기가 조타실을 지배하기도 전에, 전면 투영 창에 잡히는 암흑 성간 물질의 흐름이 급격히 기각된다.
본래 진공의 무질서도를 대변해야 할 성간 가스들이 데시케이터 속의 고체처럼 급격히 결정화되기 시작한다. 소음이 존재할 수 없는 우주의 진공 속에서, 함선의 초진동 센서만이 차원 경계면이 비틀리는 특이점을 감지해 계기판에 날카로운 고주파 파형을 그린다. 그것은 물리 법칙을 비웃는 위상수학적 균열이다.
차원의 틈새를 비집고 등장한 것은 생물학적 범주로 정의할 수 없는 고차원적 엔트로피의 결정체, 보이드 크라켄이다.
그것의 사지는 물리적 질량이 아닌, 빛조차 왜곡시키는 인력의 다발로 구성되어 있다. 크라켄이 움직일 때마다 암흑 속의 별빛들이 굴절되어 기괴한 스펙트럼의 고리를 형성한다. 루나 호를 지탱하는 아이지스의 방어막이 그 존재가 방출하는 차원 간섭파에 닿는 순간, 양자 얽힘이 풀려나가듯 맥없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과열된 중력 붕괴 엔진은 이미 한계 온도에 도달해 경고의 붉은 빛을 맥동하고 있다.
"선장님," 아이지스의 인공지능 보이스가 평정심을 가장한 차가운 주파수로 귓가를 파고든다. "알 수 없는 위상 전이 에너지가 우측 용골 구조물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중력 붕괴 엔진의 열 배출 사이클을 강제로 고정하지 않으면, 다음 차원 파동이 도달할 때 루나 호의 존재 확률 공간은 영으로 수렴할 것입니다."
망막 위의 성간 중계창은 이제 뒤틀린 괴수를 목격한 성좌들의 흥분과 공포로 터질 듯이 불투명하게 변해간다. 아이지스의 전술 지도가 깜빡이며 두 가지 생존의 궤적을 당신의 뇌파에 직접 투사한다. 엔진의 폭주를 제어하며 극한의 물리적 충돌을 가할 것인가, 혹은 이 절망적인 전투의 장을 완전한 비극적 무대로 승화시켜 관조자들의 우주적 권능을 연산 장치 속으로 직접 끌어들일 것인가.
정적만이 지배하는 심연 속에서, 보이드 크라켄의 중력 촉수가 루나 호의 기하학적 중심을 향해 서서히 조여온다. 이제 당신의 명령만이 이 공간의 엔트로피를 결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