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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와 천하도
『조선왕조실록』 여백의 주석에는 기록되지 않은, 승정원 일기의 한 구절이 당신의 시야를 흔든다.
"…상의 병세가 깊어지니, 조정의 외척과 궐 안의 사대부들이 동궁(문종)의 뒤를 이어 왕실의 서얼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중 ‘주(奏)’는 생모의 가문이 미약하여 가장 먼저 도사(屠蛇)의 칼날 위에 서게 되었다."
빙의의 혼란은 찰나에 불과하다. 당신은 향나무 냄새가 짙게 밴 사정전의 밀실에서 정신을 차린다. 문틈으로 새어 드는 밤바람에 촛불이 흔들리고, 그 너머로 당신을 내려다보는 사내, 조선의 천재 군주 이도(李祹)가 서 있다. 그의 눈빛은 맹수와 같아, 서자라는 미천한 신분의 당신이 품은 사소한 역심조차 꿰뚫어 볼 듯 날카롭다. 조정의 외척들과 사림들은 이미 당신을 제거할 명분을 찾기 위해 궐 밖에서 이빨을 갈고 있다. 이 정치적 질식사 위기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당신이 가진 미래의 지식을 조국의 가장 위대한 왕에게 ‘거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뿐이다.
당신은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두꺼운 한지 한 장을 펼쳐 놓는다. 그것은 당대 조선이 천하의 전부라 믿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아니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는 물론, 대양 너머에 도사린 거대한 두 개의 대륙—아메리카가 정교한 구면 투영법으로 묘사된 미지의 '천하도(天下圖)'다.
"이것이… 무엇이냐?"
세종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조선이 명(明)의 사대(事大)라는 울타리 안에서 송화강의 여진과 남해의 왜구만을 살필 때, 바다 너머 천하는 이미 격변을 준비하고 있사옵니다."
당신은 직설적인 변명을 피하고, 외교적 실리와 정량적 수치를 제시한다.
"현재 조선의 경지 면적은 약 1,600,000결(結)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7할이 산지라 백성들은 만성적인 기근에 시달립니다. 소신이 그린 이 지도 너머 ‘신대륙’에는 평원만 해도 중원의 대륙을 세 번 품고도 남을 땅이 존재하옵니다. 바람의 흐름인 흑조(黑潮,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3만 리를 항해한다면, 불과 서너 달 만에 이 기적의 대지에 닿을 수 있사옵니다."
세종의 시선이 지도의 해류선과 위도 표시에 머문다. 당대 조선의 주력선인 대맹선(大猛船)이 가진 약 100톤 안팎의 배수량과 평저선 구조로는 원양의 거친 파도를 버틸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를 가장 잘 아는 군주다. 그의 손가락이 북미 대륙의 거대한 평원 위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황당무계한 설화가 아니며, 탁상공론도 아니다. 이것을 증명할 방도가 네게 있는가?"
왕의 눈빛에 지적 호기심과 함께, 첩첩산중인 조정의 당쟁을 염두에 둔 경계심이 동시에 떠오른다. 서자인 당신이 이 거대한 비밀을 무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다음 패를 던져 왕의 확신을 얻어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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