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오의 구두 소리가 옥상 계단을 다 내려오지 못하고 멈췄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둘이."
도현은 지우와 맞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손끝에서 USB의 각이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 박태오의 시선이 그 손을 훑고, 지우의 얼굴을 지나, 다시 도현에게 못 박혔다. 겁이 많은 남자였다. 겁이 많은 만큼 상대의 겁을 냄새 맡는 데는 능했다.
"박 교수님이야말로."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옥상까진 무슨 일로 올라오셨습니까. 담배도 안 피우시면서."
박태오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갔다. 그가 계단 마지막 칸을 마저 밟고 옥상 바닥에 섰다.
"인턴 나부랭이가 교수한테 취조를 하네. 성심이 이렇게 위계가 무너진 곳이었나."
"위계 얘기 나온 김에 하나 여쭙죠."
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면 이 남자는 반드시 밀고 들어온다. 회귀 전 그를 매장한 손이 저 손이었다.
"2009년 3월, 척추 신경외과 협진 환자. 재수술 후 하반신 마비. 그 기록, 지금도 연구동에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지우셨습니까."
박태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반 박자 늦게 빠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도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손을 대지 않아도 읽히는 통증이 있다. 죄책감이 아니라 발각의 공포. 이 남자의 병은 그거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모르시면 다행이고요."
도현은 등을 돌렸다. 계단을 두 칸 내려가다 말고 다시 고개만 돌렸다.
"근데 교수님, 아까 12층 자료실에서 폐기예정 진료기록 태그 떼던 손, 그거 CCTV에 잡히는 각도인 거 아셨어요? 4층 복도 카메라가 자료실 문을 정면으로 봅니다. 저 인턴 첫 주에 병원 구조도 다 외웠거든요."
거짓 절반, 진실 절반이었다. CCTV 각도는 몰랐다. 하지만 박태오가 자료실에서 무언가를 지웠다는 건 확신했다. 지우가 준 USB가 그 증거였다.
박태오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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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지하 3층 당직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도현은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옆에서 지우가 문에 등을 대고 복도를 살폈다.
"이서린 기자가 그랬어. 이 파일이 열리면 되돌릴 수 없다고."
지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이제 그 건조함이 벽이 아니라는 걸 도현은 알았다.
"열려."
폴더가 떴다. 진료기록 스캔본, 마취 기록지, 그리고 수술 동의서. 도현은 마취 기록지의 한 줄에서 손을 멈췄다.
"봐라. 여기."
"뭔데."
"집도 시작 시각이랑 마취 유도 시각이 뒤집혀 있어. 마취가 걸리기 전에 칼이 들어갔다는 기록이지. 실제로 그랬을 리 없어. 누군가 나중에 시간을 조작하면서 앞뒤를 못 맞춘 거야."
지우가 문에서 떨어져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걸 왜 조작해?"
"신경 손상이 마취 문제가 아니라 술기 문제였다는 걸 감추려고. 마취과 책임으로 몰면 집도의는 빠지거든. 근데 시간을 억지로 손대다 보니 이렇게 티가 났어."
도현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수술 소견서였다. 필체가 두 종류였다. 앞부분은 담당의, 뒷부분은 다른 손이 덧쓴 흔적.
"덧쓴 이 손."
도현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게 박태오야. 나 이 사람 소견서 오늘 응급실에서 봤어. 'ㅅ' 받침을 이렇게 위로 뻗쳐 쓰는 버릇, 똑같아."
지우가 숨을 삼켰다.
"그럼 이 환자는…"
"하반신이 마비된 채로 살아 있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당직실의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도현은 그 불빛 아래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오늘은 능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손끝이 저렸다. 살릴 수 있었으나 놓친 환자의 통증은 유독 오래 새겨진다고 했다. 이 마비된 남자의 통증은 언젠가 도현의 다리에도 새겨질 것 같았다. 만지지 않았는데도.
"기자 만나야겠어."
"위험해."
"위험한 건 가만히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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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린은 병원 뒤편 24시간 카페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두 대와 서류 뭉치가 테이블을 뒤덮었다.
"USB 열었네요."
인사도 없이 그녀가 말했다. 커피는 손도 안 댄 채 식어 있었다.
"환자 이름은 알아요. 최영수. 마흔둘. 사고 당시 두 아이 아빠였고, 지금은 요양병원에 있어요. 3년 전에 내가 이 사건 취재하려다 편집국에서 킬됐어요. 성심 광고가 우리 매체 1면을 먹여 살리거든요."
이서린은 서류 한 장을 도현 앞으로 밀었다.
"증거 없는 정의는 소음이에요. 나 이 소음 3년 냈어요. 아무도 안 들었고. 그래서 묻는 건데."
그녀의 눈이 도현을 정면으로 겨눴다.
"당신, 확신만 있고 증거는 없는 부류예요, 아니면 진짜예요?"
도현은 USB를 테이블에 올렸다.
"마취 기록지 시간 조작. 소견서 필체 두 개. 이거면 소음이 아니라 소리가 됩니다."
이서린이 처음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필체는 감정 넣으면 되고, 시간 조작은 원본 로그랑 대조하면 빼도 박도 못해요. 문제는."
"원본이 병원 서버에 있다."
"그리고 그걸 관리하는 게 심사위원회예요. 박태오 위에."
도현은 창밖을 봤다. 새벽 세 시의 성심의료원이 불을 반쯤 끈 채 서 있었다. 저 건물의 어느 층에서 조작이 태어났고 어느 층에서 사람이 묻혔다.
"박태오부터 무너뜨리죠."
"어떻게요."
"이 사람은 겁쟁이입니다. 겁쟁이는 자기가 죽을 것 같으면 옆 사람을 먼저 밀어요. 밀 사람이 위에 있다는 게 우리한테 유리하고요."
이서린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3년 만에 처음 짓는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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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흉부외과 7층, 박태오의 연구실.
도현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을 때, 박태오는 전화를 끊는 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가 인턴한테 여기 출입 권한을…"
"최영수 씨 잘 계십니까."
박태오의 입이 다물렸다.
도현은 문을 닫고 등으로 기댔다. 그리고 프린트한 종이 한 장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마취 기록지 사본이었다. 조작된 시간 두 줄에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마취 유도 14시 40분. 절개 14시 32분. 마취도 안 걸린 환자 배를… 아니 척추를 여셨네요. 교수님 술기가 좋으신 건지 담이 크신 건지."
"이거… 어디서 났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어디서 났는지가 중요할까요. 이게 이서린 기자 손에 넘어가면 어디까지 가는지가 중요하지."
박태오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 벽에 부딪혔다.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뇨. 제안입니다."
도현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회귀 전 이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건 통쾌함이 아니라 통로였다.
"교수님이 이 척추 환자 하나 조작한 건, 솔직히 말하면 심사위원회한테는 잔챙이예요. 그 사람들은 교수님을 방패로 세울 겁니다. 다 뒤집어쓰고 옷 벗는 건 교수님이고, 명단에 사인한 손은 안 다쳐요. 성심이 원래 그런 데 아닙니까. 실패는 서열 낮은 놈이 지는 곳."
박태오의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도현의 말이 정확히 그의 공포를 찔렀다.
"제가 원하는 건 교수님이 아닙니다."
도현이 낮게 말했다.
"위요. 그 위."
침묵이 길었다. 창밖에서 헬기 소리가 들어왔다 멀어졌다.
박태오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내가… 내가 왜 그 기록을 손댔는지 알아? 위에서 시켰어. '이건 시스템을 지키는 일이다'라고. 검증 안 된 술기가 새어나가면 병원 전체가 흔들린다고. 나는 그냥…"
"실행자였죠. 명분은 딴 데 있고."
박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윤 과장이야. 데이터는 다 윤 과장이 관리해. 연구동 서버에 원본이 다 있어. 조작 전 원본, 조작 후 버전, 다. 그 사람은 그걸 '증거'라고 안 불러. '자료'라고 불러. 필요할 때 꺼내서 쓸 자료."
도현의 손끝이 저릿했다. 원본이 존재한다. 회귀 전 자신을 매장한 조작 데이터의 원본이. 그것이 같은 서버에 잠들어 있었다.
"교수님."
도현이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방금 그 얘기, 저 말고 한 사람 더 들었으면 좋겠는데요."
도현이 연구실 문을 열었다. 복도에 강민석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녹음기가 들려 있었고, 붉은 불이 켜져 있었다.
"마취과 강민석입니다."
강민석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도현을 한 번 보고, 그 눈에 담긴 피로를 읽었다. 도현이 오늘도 손을 무리하게 썼다는 걸 이 남자는 늘 먼저 알았다.
"박 교수님, 최영수 씨 마취 저희 과에서 했습니다. 3년간 마취과가 뒤집어쓴 오명, 방금 그 한마디로 벗겨지겠네요. 감사합니다."
박태오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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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며 강민석이 도현의 팔을 잡았다.
"손, 오늘 몇 번 썼어."
"안 썼어요. 오늘은."
"거짓말. 얼굴에 쓰여 있어. 너 진단할 때 눈 밑이 이렇게 떨려. 나 그거 5화… 아니, 저번에 응급실에서 봤어. 네가 그 환자 세 명 연달아 만지고 실신할 뻔했을 때."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석은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만은 정확히 알았다. 그것이 이 남자의 무서운 점이자 고마운 점이었다.
"살아서 이겨. 죽어서 이기면 그건 지는 거야."
강민석이 녹음기를 도현의 손에 쥐여줬다.
"이건 네 지렛대야. 부러뜨리지 마."
도현이 녹음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의 저림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지우에게서 문자가 왔다.
「7층 수술 배정 명단, 내가 접근할 수 있어. 원본 서버 로그 시각이랑 명단 사인 시각 대조하면 윤재경 손 나올 거야. 나 여기서 판다.」
각자의 위치에서 판이 짜이고 있었다. 도현은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손이 아닌 가슴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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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린에게 녹음 파일을 넘긴 것은 그날 밤이었다.
"기사 초안 나왔어요."
이서린이 노트북을 돌려 보여줬다. '성심의료원 심사위원회, 의료사고 조직적 은폐 정황' — 헤드라인이 검게 박혀 있었다.
"근데 이거 터뜨리려면 원본이 필요해요. 녹음이랑 사본만으론 병원이 '악의적 편집'이라고 우기면 끝이에요. 연구동 서버 원본. 그게 있어야 못 빠져나가요."
"내일 새벽에 연구동 들어갈 방법을 찾겠습니다."
"서두르지 마요. 한 번 실패하면 다신 못…"
이서린의 말이 끊긴 건 도현의 휴대폰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지우였다. 전화 너머 목소리가 다급했다.
"도현아. 지금 어디야."
"카페. 왜."
"윤재경이 움직였어. 방금 연구동 야간 출입 기록에 윤 과장 카드가 찍혔어. 이 시간에 거기 갈 이유는 하나뿐이야."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박태오가 흘렸구나. 오늘 오후 일이 벌써 위로 올라간 거야."
"그것만이 아니야."
지우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서버실 로그에… 방금 '전체 데이터 백업 삭제' 명령이 걸렸어. 원본이, 조작 전 원본이 지금 지워지고 있어. 최영수 것도, 그리고… 회귀 전 네 걸로 쓰였을지 모르는 데이터도 전부."
이서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도현을 봤다. 도현은 이미 코트를 집어 들고 있었다.
지워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진실이 한 조각씩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몇 분이나 걸려."
"삭제 진행률… 완료까지 40분. 아니, 이미 줄고 있어. 도현아, 너 지금 뛰어도—"
도현은 이미 카페 문을 밀고 나가는 중이었다. 새벽 공기가 폐를 찔렀다. 성심의료원 뒤편 연구동에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12층이 아니라, 딱 한 층. 서버실이었다.
손끝이 다시 저려왔다. 이번엔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