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옥상 문을 밀고 나오자 밤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도현은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오른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감추기 위해서였다.

지우는 난간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그저 입술 끝에 물고 도현이 오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회귀 전에도 널 만났다'는 게 무슨 뜻이야."

도현이 물었다. 인사도, 뜸도 없었다. 지우가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겼다.

"넌 그 말이 이상하지도 않았어? 인턴 첫날 처음 본 사이인데."

"이상했어. 그래서 물어보는 거고."

"거짓말." 지우가 짧게 웃었다. "넌 하나도 안 이상했을 거야. 넌 지금 나를 처음 보는 사람 취급 안 하고 있으니까. 첫날부터. 3번 베드에서 날 협박할 때도, 넌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미 다 아는 얼굴이었어."

바람이 지우의 앞머리를 흩었다.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됐고." 지우가 담배를 난간 너머로 튕겨 버렸다. "본론이나 하자. 넌 나한테 궁금한 게 그거 하나가 아닐 텐데."

"이서린 기자가 말한 데이터 조작 증거. 네가 뭘 알아."

"그것도 나중에."

지우가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도현을 정면으로 봤다. 응급실에서 보던 서늘한 벽이 아니었다. 얼굴이 벗겨져 있었다.

"먼저 이거부터 대답해. 서도현. 넌 왜 나를 미워하지 않아?"

"—뭐?"

"넌 나를 미워해야 정상이야. 그런데 안 그래. 넌 오히려 나한테 미안해하는 얼굴을 할 때가 있어. 그게 소름 끼쳐. 넌 나한테 뭘 미안해하는데."

도현의 목이 말랐다. 손 떨림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말해야 했다. 회귀했다고. 이 모든 걸 이미 한 번 겪었다고. 하지만 그 말을 지우가 믿을 리 없었다. 그래서 도현은 다른 길로 갔다.

"기억 하나만 말할게. 들어보고 아니면 아니라고 해."

"...뭘."

"3년 뒤." 도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랑 내가 같은 팀이 돼. 흉부외과 3년 차. 대동맥 판막 재수술 케이스가 하나 들어와. 76세, 고령에 신장도 안 좋았어. 심사위원회는 수술 반대했지. 리스크 대비 이득이 없다고. 넌 나한테 물러서자고 했어. 세 번. 정확히 세 번."

지우의 눈이 굳었다.

"난 안 들었어. 내가 옳으니까. 이 환자는 지금 안 하면 반년 안에 죽는다는 게 내 판단이었으니까. 넌 인계 노트에 반대 의견을 적었어. 나중에 문제 생기면 너라도 살려고. 그거 보고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그만해."

"'겁쟁이는 수술방 나가.' 내가 그랬어. 사람들 앞에서."

바람 소리만 옥상을 채웠다. 지우의 손이 난간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수술은 성공했어." 도현이 계속했다. "환자는 살았고, 난 논문을 썼고, 넌... 넌 그 팀에서 없는 사람이 됐지. 내가 지운 거야. 데이터 정리도, 후속 관리도 다 내가 했고, 네 이름은 어디에도 안 들어갔어. 넌 3주 뒤에 다른 과로 갔어."

"그걸 어떻게—"

"들어. 아직 안 끝났어."

도현은 눈을 감았다. 이 다음이 진짜였다.

"그 환자, 4개월 뒤에 다른 병으로 재입원했다가 죽었어. 수술이랑은 상관없는 폐렴이었어. 그런데 심사위원회는 그걸 내 수술 실패로 몰았어. 서류상으로. 그리고 그 서류에 반대 의견이 하나 필요했지. '집도의가 위원회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다'는 걸 증명해 줄, 내부자의 증언이."

지우가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도현은 눈을 떴다.

"네가 그 증언을 했어. 한지우. 네가 인계 노트에 남긴 그 반대 의견이, 3년 뒤에 나를 매장하는 증거로 쓰였어."

옥상의 조명 하나가 지지직거리며 깜빡였다.

지우의 입술이 벌어졌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그 얼굴을 봤다. 회귀 전 마지막으로 봤던, 청문회장에서 자신을 향해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그 무표정한 얼굴이 지금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너 미쳤어." 지우가 겨우 뱉었다. "그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야. 근데 어떻게—"

"일어났어. 나한테는. 딱 한 번."

침묵이 길었다.

지우가 난간에서 등을 뗐다. 걸음이 흔들렸다. 그가 도현의 멱살을 잡았다. 도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그래서 넌 지금 내가 그 배신을 할 거라고, 미리 나를 벌주러 왔어? 나를 감시하러? 그래서 첫날부터 나한테 그런 눈을—"

"아니."

도현이 지우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오른손이 떨리는 게 지우의 손목에 그대로 전해졌다. 지우가 그걸 느끼고 멈췄다.

"난 널 벌주러 온 게 아니야. 난 그 반대 의견이 왜 거기 있었는지, 이번에야 겨우 알았어."

"...무슨 소리야."

도현이 지우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넌 그 노트를 나 죽이려고 쓴 게 아니었어. 넌 나를 살리려고 쓴 거였어. 언젠가 내가 저 오만함 때문에 무너질 걸 알았으니까. 그때 최소한 너라도, 내 옆에서 '나는 반대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나를 감쌀 수 있으니까. 넌 방패를 만든 거였어. 나를 위한."

지우의 숨이 멎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배신으로 읽었어. 죽는 순간까지. 3년을. 나는 네가 살아남으려고 나를 팔았다고 믿었어. 카르텔이 네 노트를 이용한 건 맞아. 하지만 그 노트를 무기로 만든 건 그놈들이지, 네가 아니었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도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노트가 필요한 상황을 만든 건, 나였어. 세 번이나 물러서자는 너를 겁쟁이라고 부른 나. 네 이름을 팀에서 지운 나. 누명은 카르텔이 씌웠지만, 그 누명이 붙을 자리를 만든 건, 절반은 내 오만이었어."

지우가 도현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 눈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넌... 지금 사과하는 거야?"

"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나한텐 일어났어."

"그럼 다시는 안 일어나면 되잖아. 그럼 넌 나한테 사과할 이유도 없고, 나도 널—"

"안 돼." 도현이 잘랐다. "그런 식이면 또 똑같아. '내가 알아서 다 안 만들면 돼.' 그게 오만이야. 나 혼자 판을 다 통제하겠다는 거. 그러다 널 또 배제하는 거. 그래서 이번엔... 부탁하는 거야."

도현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그 손을.

"같이 하자. 카르텔. 이번엔 나 혼자 밀어붙이지 않을게. 네 반대는 인계 노트에 적지 말고, 내 앞에서 말해.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이라도."

지우는 그 손을 보고 있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그 손." 지우가 낮게 말했다. "정형외과 손 수백 개 봤다고 했지. 나 아직도 그런 손 처음 봐. 너 그거 뭔지 말 안 할 거지."

"때 되면 말할게."

"거짓말쟁이."

지우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도현이 내민 손을 잡는 대신, 뭔가를 꺼내 도현의 손바닥에 올렸다.

작고 검은 USB였다. 모서리가 긁혀 있었다.

"악수는 나중에." 지우가 말했다. "먼저 이거부터 봐. 그리고 나서도 나랑 같이 하고 싶으면, 그때 손 잡아."

도현이 USB를 봤다. 손안에서 그것을 굴렸다.

"이게 뭐야."

"박태오가 3년 전에 지운 거." 지우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나 정형외과 돌 때, 그 병동에 이송돼 온 환자가 있었어. 개인병원에서 척추 수술 받다가 신경 손상. 근데 성심으로 넘어오면서 기록이 이상하게 정리됐어. 원래 개인병원 과실이었는데, 서류상으로는 이송 중 사고로 바뀌어 있더라고. 책임 소재가 붕 뜨는 방향으로."

"박태오가."

"당시 그 개인병원 원장이 심사위원회 누구랑 대학 동기였거든. 태오가 실무를 맡았어. 그 환자, 결국 하반신 못 썼어. 유족은 아무한테도 책임 못 물었고. 나 그때 그 기록 정리하는 거 우연히 봤어. 원본 백업이 잠깐 떴을 때, 복사했어. 살아남으려고 나도 입 닫았지만... 지우진 못하겠더라."

지우가 도현의 눈을 봤다.

"넌 자꾸 카르텔의 정점을 치려고 하지. 윤재경. 근데 그 인간은 신념으로 무장돼서 안 흔들려. 그 밑을 쳐야 해. 겁 많고 이기적인 놈. 궁지에 몰리면 제 살길부터 찾는 놈."

"박태오."

"이 USB 안에 그 환자 원본 기록이랑, 태오가 조작 전에 남긴 접근 로그가 있어. 이거 하나로 태오는 못 죽여. 근데—" 지우가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칼자루는 되지."

도현은 USB를 꽉 쥐었다. 떨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조각이 맞물렸다. 2화에서 박태오가 회수해 간 심초음파 차트. 위조된 수치 48에서 42. 그때는 손에 쥐지도 못했던 실마리가, 지금 다른 얼굴을 하고 손바닥 위에 있었다.

"지우야."

"왜."

"너 아직 손 안 잡았어."

지우가 도현을 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듯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이 맞잡혔다. 도현의 떨리는 오른손과, 지우의 서늘한 손이.

"경고하는데." 지우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번에 또 나 혼자 두고 밀어붙이면, 그땐 진짜로 인계 노트에 적어서 널 팔아넘길 거야. 방패 말고, 진짜로."

"그래."

"...진심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마. 무섭잖아."

지우가 옥상 문 쪽으로 걸었다. 문을 열다 말고 멈췄다.

"USB, 강민석 선생 컴퓨터로 열지 마. 병원 네트워크 다 심사위원회가 봐. 밖에서 열어. 그리고..." 지우가 어깨 너머로 도현을 봤다. "이서린 기자. 그 사람이 왜 3년째 성심 주위를 맴도는지 알아? 그 척추 환자 유족이, 이서린 기자 취재원이었어. 침묵당한 사건. 그거 그 사람 첫 특종이 될 뻔했던 거야."

문이 닫혔다.

도현은 혼자 옥상에 남았다. 손바닥의 USB가 밤공기에 차가웠다. 그것을 재킷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박태오. 이서린. 조작된 데이터. 세 개의 선이 이 검은 플라스틱 조각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회귀 전, 그는 이 모든 걸 혼자 상대하려다 부서졌다. 이번엔 손 하나가 늘었다.

도현은 떨리는 오른손을 폈다. 아직도 손끝이 저렸다. 오늘 응급실에서 만진 세 환자의 통증이 여전히 뼈마디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 손으론 아직 아무 수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손으로 USB는 쥘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아래에서 울렸다. 규칙적이고 느렸다. 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이 시간에, 이 계단을 이렇게 걷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박태오가 옥상 계단참 아래에서 도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서류 봉투를 들고. 그의 시선이 도현의 재킷 안주머니가 불룩한 곳에 잠깐 머물렀다.

"이 시간에 옥상엔 무슨 일이야, 서 선생."

박태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이 계단 조명 아래에서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한지우 선생이랑 무슨 얘기 그렇게 오래 했어? 방금 내려가던데."

도현의 손이 재킷 위로 올라갔다. 그 안의 USB를 감싸듯이.

박태오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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