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안의 손이 카일의 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톱이 옷감을 파고들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정에. 지하에서."
카일은 그 얼굴을 한참 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멈추게 할 방법은 하나. 서고를 열면 된다. 다미안이 계약 장소에서 어떤 말에 흔들리는지, 몇 시 몇 분에 문을 여는지, 어느 문장으로 그를 되돌릴 수 있는지—오 초짜리 미래 한 장면이면 계산이 끝난다. 전생의 카일이라면 벌써 열었을 것이다. 다미안을 붙잡아 기절시키고, 방에 가두고, 자정을 넘겨버렸을 것이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정신 깊은 곳에서 읽을 수 없는 책의 표지가 손끝에 닿았다. 열려고 했다.
『난 도구로 안 쓰인다고 했지만—네가 너 자신을 도구로 쓰는 것도, 옆에서 보기 힘들어.』
세라의 목소리가 손등을 붙들었다. 2화에서, 다미안의 쪽지를 뺏으려던 그의 손목을 그녀가 붙잡았을 때. 도구 취급하지 마. 저 애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카일은 책에서 손을 뗐다. 감정을 하나 더 잃고 다미안의 선택을 빼앗는 것—그건 잠식자가 다미안에게 하려는 짓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미안." 그가 눈을 떴다. "그 쪽지. 지금 갖고 있지."
다미안이 움찔했다. 주머니에서 눅눅한 양피지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첫날, 이층 회랑에서 그가 흔들던 종이. 재능 없이도 성적을 올려주는 길, 대가는 가장 안 쓰는 것 하나. 그때부터 다미안은 이 쪽지를 놓지 못했다.
"보여줘. 아니, 됐어. 안 봐도 뭐라고 쓰였는지 알아." 카일이 숨을 골랐다. "같이 가자."
다미안의 눈이 흔들렸다. "말리는 거야?"
"아니." 카일은 그 대답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낯설었다. "네가 결정해. 대신 결정하기 전에,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줄게. 그러고도 계약하겠다면—막지 않을게."
"넌… 넌 왜 그렇게까지."
"가면서 말할게. 시간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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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발광석 하나 없이 캄캄했다. 카일이 앞장서고, 다미안이 반 걸음 뒤에서 벽을 짚으며 따라왔다. 허벅지의 상처가 계단을 디딜 때마다 욱신거렸다. 오늘 낮 서열전에서 찢긴 자리. 피는 멎었지만 통증은 남았다.
"다미안. 계약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아?"
"성적이 오른대. 재능이 채워진대."
"그다음은."
"…그다음은 안 물어봤어."
카일은 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다미안의 숨소리만 들렸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그가 벽에 손을 짚었다. 차가웠다. "재능이 없었어. 너처럼. 그래서 감정을 팔았어. 처음엔 하나. 제일 안 쓰는 거 하나. 이깟 거 없어도 산다, 싶은 거. 근데 힘이 붙으니까 자꾸 이겼어. 이길 때마다 하나씩 더 팔았어. 승리의 기쁨을 팔고, 지는 두려움을 팔고, 사람이 그리운 마음을 팔고."
"어떻게 됐는데."
"대륙 최강이 됐어." 카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폐허에서 혼자 죽었어. 마지막엔 자기가 왜 살았는지도 몰랐어. 슬프지도 않았어. 슬픔도 팔았거든. 그냥… 텅 빈 채로 무너졌어. 배신당한 것도 아니야. 스스로 다 팔아치우고, 스스로 부서진 거야."
다미안은 말이 없었다. 카일은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도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이것만 기억해. 계약은 재능을 주는 게 아니야. 널 조금씩 지워가는 거야. 네가 다미안이라는 걸, 아주 천천히, 네가 눈치 못 채게."
계단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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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통로 끝, 낮은 아치 아래에 사람 형체가 서 있었다. 회색 로브. 얼굴이 후드 그늘에 잠겨 있었지만 입가만 보였다. 그 입이 웃었다.
"다미안 크로프트. 정오에 답신을 넣었더군. 약속을 지키는 청년이야." 목소리는 부드럽고 느렸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종류의 느림이었다. "그런데 손님을 데려왔네."
"이 애 일에 끼어들지 마." 카일이 앞으로 나섰다.
"끼어드는 건 자네 아닌가, 카일 도렌시아." 중개인이 후드 아래에서 다미안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다미안. 잘 생각해봐. 자넨 이 학원에서 유일하게 재능 없이 들어온 학생이야. 3조 과제도 저 둘 덕에 통과했지. 서열전 첫 라운드는 어땠나. 손도 못 써보고 떨어졌어. 다들 알아. 자네도 알고."
다미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난 자네에게 잔인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자비를 베푸는 거지." 중개인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재능 없는 자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되는지 아나? 조롱받다가, 밀려나다가, 잊혀. 난 그 운명에서 자넬 꺼내주려는 거야. 대가는 하나. 자네가 제일 안 쓰는 감정 하나. 아깝지도 않을 거야. 저 친구는 자네가 스스로 서는 걸 원치 않아. 계속 도움을 받는 위치에 두고 싶은 거지. 그게 편하니까."
교묘했다. 카일은 그 말투를 안다. 절박함의 틈을 정확히 찾아 손가락을 밀어 넣는 방식. 전생에 자신이 넘어간 방식.
"다미안." 카일은 소리치지 않았다. "저 사람 말이 다 맞아. 넌 첫 라운드에서 떨어졌고, 과제도 우리가 도왔어. 부정 안 해."
다미안이 카일을 봤다. 배신당한 얼굴로.
"근데 하나 틀린 게 있어." 카일이 다미안의 눈을 똑바로 봤다. "난 네가 도움받는 위치에 있길 바란 적 없어. 아까 계단에서 네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잖아. 그건 널 약자로 두는 게 아니라, 너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뜻이야. 저 사람은 널 '재능 없는 자'로만 봐. 나는 널 '다미안'으로 봐. 둘 중 누가 널 지워가고 있는 것 같아?"
중개인의 입가에서 웃음이 잠깐 흔들렸다.
"쪽지 이리 줘." 카일이 손을 내밀었다. "뺏는 거 아니야. 네가 직접 결정해. 그거 태울지, 넘길지."
다미안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그 종이. 재능 없이도 성적을 올려주는 길. 그는 오래 그것을 내려다봤다.
"난… 난 여기서 못 버틸 줄 알았어." 다미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데 아까 카일이 계단에서 그 사람 얘길 할 때. 혼자 죽었다는 그 사람. 나… 그 사람이 무서웠어. 감정도 못 느끼면서 최강이 된 사람. 그게 나였을까 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안 해요." 다미안이 중개인을 향해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재능 없이 상위권에 오르느니, 재능 없이 그냥 다미안으로 남을래요. 무너져도 내가 무너지는 거지, 지워지는 건 싫어요."
그가 양피지를 두 손으로 찢었다. 곰팡이 냄새 나는 조각이 지하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일은 그 광경을 봤다. 서고를 열지 않았다. 강제로 막지도 않았다. 미래를 훔쳐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 하나로—다미안이 스스로 문턱에서 돌아섰다. 가슴 어딘가가 조여왔다. 슬픔인지, 다른 무엇인지. 남은 감정 하나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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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인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짙어졌다.
"흥미롭군. 아이 하나를 데려오고 대신 자넬 이 자리에 세웠어." 후드가 카일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다미안은 자네 몫이 아니야. 오늘은 물러나지. 하지만 가기 전에 하나만 묻자, 카일 도렌시아."
지하 공기가 무거워졌다.
"자넨 방금 저 아이한테 감정을 팔면 지워진다고 했지. 훌륭한 설교였어. 그런데 말이야." 중개인이 카일의 손등을 가리켰다. 붉은 봉인 자국. "자넨 이미 쓰고 있잖아. 그 힘. 위기마다 미래를 열람하고, 그 대가로 감정을 하나씩 잃고 있지. 기쁨—없어졌고. 두려움—오늘 없어졌더군. 자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카일의 발이 바닥에 붙었다.
"자넨 우리 계약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르다고 여기지. 그런데 결과가 같잖아. 감정을 팔아 힘을 얻고, 하나씩 지워지고. 우리와 뭐가 다르지, 카일 도렌시아? 자넨 그저, 계약서에 서명을 안 했을 뿐이야."
말이 화살처럼 박혔다. 반박할 말을 찾았다. 나는 다르다고. 나는 이번 생에는—그런데 오늘 낮, 서열전 결계장에서 두려움을 잃었다. 서고를 열었으니까. 지금 다미안을 막으려 서고를 열려고도 했다. 손끝이 표지에 닿았었다.
중개인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로브 자락이 사라졌다.
카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미안이 걱정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리가 멀게 들렸다. 우리와 뭐가 다르지. 우리와 뭐가—
"다르지 않아."
새로운 목소리. 아치 반대편, 카일이 내려온 계단 쪽에서. 우아하고 서늘한 여자 목소리. 발광석 하나 없는데도 그녀가 걸어오는 소리는 또렷했다.
로젤린 아스타드였다. 오늘 서열전을 카일이 떨어지도록 설계한 진행위원. 그녀의 손등에도, 카일의 것과 똑같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카일에게 천천히 들어 보였다.
"저 사람이 정답을 말해줬는데 못 알아듣네." 로젤린이 미소 지었다. 곰팡이 냄새가 그녀에게서 흘러왔다. 카일의 방문에 꽂혀 있던 쪽지와 똑같은 냄새. "너도 나처럼 잠식자의 개야, 카일 도렌시아. 다만 넌 그걸 모르는 척할 뿐이지."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난, 너 때문에 우리 가문이 무너진 걸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
카일의 손등이 저릿했다. 붉은 자국이, 로젤린의 것과 겹쳐 보였다.
"우리 가문이 무너진 걸." 카일이 낮게 되물었다. "네가 왜 나를 겨냥하는지, 이제 알겠군."
"아니.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 로젤린이 아치 아래로 들어섰다. 후드 없는 얼굴이 어둠에 익숙한 듯 담담했다. "아스타드는 사백 년 된 마탑 명문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파문당했지. 감정 거래에 손댔다는 죄목으로. 재밌는 건, 우리를 고발한 자료가 어디서 나왔는지야."
그녀가 다미안을 힐끗 봤다. 겁에 질려 벽에 붙어 있는 소년을. 그리고 다시 카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일 도렌시아. 아르카나 탑 최연소 대마도사. 감정 거래를 척결한 영웅. 그 자료를 탑에 넘긴 게 바로 너였어." 로젤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네가 스스로는 수백 번 계약을 쓰면서, 자기 흔적을 지우려고 우리 가문을 제물로 바쳤지. 아버지는 파문당한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어머니는 미쳤고. 나는 열두 살에 거리로 나앉았어."
카일은 숨을 삼켰다. 전생.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어느 지점. 감정을 다 팔아 텅 빈 채로 무슨 짓이든 했던 그 궤적 어딘가에, 이 여자의 가문이 있었다. 슬픔도 없이, 손실 항목을 지우듯이. 세라를 방패로 세웠던 것처럼.
"그건…" 반박이 목에 걸렸다.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다는 건 무죄가 아니었다. 감정을 팔아치운 자에게 죄책감이 남았을 리 없으니까. 기록조차 안 했을 것이다.
"봐. 부정도 못 하잖아." 로젤린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잠식자들이 나한테 왔어. 가문을 재건해주겠다고. 대가는 하나—널 지켜보고, 견제하고, 필요하면 짓밟는 것. 서열전 대진을 짠 것도, 네 방에 쪽지를 꽂은 것도 나야. '전생의 계약, 이번에도 하시겠습니까'라고."
카일의 시야가 좁아졌다. 그 쪽지. 서관 3층 끝방 문 앞에서 그를 얼어붙게 했던 그 양피지. 전생을 아는 존재. 그게 이 여자였다.
"넌 내 전생을 어떻게 알아." 카일이 물었다. "회귀는… 나만 아는 일이야."
"회귀?" 로젤린이 눈썹을 올렸다. 진짜 모르는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난 잠식자한테서 네 과거를 들었을 뿐인데."
카일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로젤린은 회귀를 모른다. 그녀가 아는 '전생의 카일'은—회귀 이전, 이 세계선의 카일이 저지른 일이다. 그렇다면 잠식자들은 회귀 이전의 카일을 안다. 즉 잠식자들이야말로 그의 전생과 이번 생을 잇는 유일한 존재. 방문의 쪽지, 벽화 속 자신의 얼굴, 곰팡이 냄새—전부 하나로 꿰였다.
"넌 나를 짓밟으려고 여기 왔어." 카일이 한 걸음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잠식자들이 정말 원하는 게 가문 재건일까? 다미안 같은 재능들을 여기서 사냥하는 게 진짜 목적이잖아. 넌 그 사냥개고. 그리고 사냥개는—사냥이 끝나면 어떻게 되지?"
로젤린의 미소가 굳었다.
"내가 널 견제하는 이유는 딱 하나야." 카일은 밀어붙였다. 두려움이 없어서 오히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정말 무너뜨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너를 열두 살에 거리로 내던진 그 시스템이야. 그런데 넌 지금 그 시스템의 도구가 됐어. 그 사람이 방금 나한테 뭐랬는지 알아? 넌 계약서에 서명을 안 했을 뿐이라고. 로젤린. 너는 서명을 했어."
"닥쳐." 그녀의 손등에서 붉은 자국이 빛났다. 지하 공기가 압력으로 짓눌렸다. 마력이 응축되는 감각. "네가 나한테 설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네가 우리 아버지를—"
빛이 터졌다.
카일은 몸을 틀었다. 허벅지 상처가 찢어지는 통증. 로젤린의 손끝에서 뻗은 붉은 선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관통해 지하 벽을 태웠다. 벽화. 발광석 하나가 그 충격에 떨어졌고—바닥에서 붉은 구속진이 깨어났다. 3화에서 그가 봤던 그 경비진. 침입자를 옭아매는 붉은 선.
진이 카일과 다미안, 로젤린을 동시에 옭아매기 시작했다. 세 사람 모두 침입자였다.
"다미안, 벽에서 떨어져!" 카일이 소리쳤다. 손등이 뜨거웠다. 정신 깊은 곳에서 책의 표지가 다시 손끝에 닿았다. 열면 된다. 이 진을 어떻게 푸는지, 로젤린의 다음 공격이 어디로 오는지, 오 초 뒤 미래 한 장면이면—
우리와 뭐가 다르지, 카일 도렌시아.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손을 뗐다. 서고가 아니라, 3화에서 이 진을 봉인술 되감기로 풀어본 기억을 끌어올렸다. 발광석 마디. 붉은 선의 흐름. 손등에 남은 봉인 자국을 역으로 흘려보내며—
그때 로젤린의 두 번째 붉은 선이 그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벽화 문장 셋째 줄, 아직 해독하지 못한 그 이름 위로. 곰팡이 냄새가 폭발하듯 짙어지고, 벽화 중앙의 얼굴이—전생의 카일 얼굴이—붉은 빛에 젖어 살아 있는 것처럼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