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검은 기둥이 무너졌다.

카일은 서고를 열지 않았다. 손등의 매듭실이 화상처럼 타올랐고, 봉인 안쪽에서 목소리가 긁혔다—열어라, 열어라, 딱 한 번만. 그는 그 목소리를 씹어삼켰다. 열면 이길지도 모른다. 이겨서 또 혼자 죽는다.

"엎드려!"

그가 세라의 팔을 잡아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리안이 다미안의 목덜미를 눌렀다. 검은 기둥의 감정 폭류가 머리 위 반 뼘을 스치며 결계장 벽을 갈랐다. 벽돌이 안개로 녹아내렸다. 열기가 아니라 한기였다. 사람의 기쁨과 두려움과 사랑이 통째로 뽑혀나가는, 뼛속까지 비는 감각.

카일은 얼굴을 든 채 그 광경을 봤다.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못 본다.

"봤어." 그가 낮게 말했다.

세드릭의 텅 빈 얼굴이 안개 너머에서 흔들렸다. "뭘 봤다는 거지. 넌 미래를 못 읽는다."

"미래 말고." 카일이 일어섰다. 허벅지 상처가 벌어져 각반이 붉게 젖었지만 다리는 버텼다. "네 진(陣). 지금 그 검은 기둥이 무너질 때, 안개가 한 번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되빨려 들어갔어. 왼쪽 아래—결계장 서쪽 기둥 밑. 거기가 저장고로 이어지는 관의 입이야."

세드릭이 그쪽을 힐끗 봤다. 아주 잠깐. 카일은 그 시선의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관찰이라니." 세드릭이 웃으려다 실패했다. 물기 없는 입가가 경련했다. "고작 눈으로 본 것에 뭘 걸겠다는 거냐."

"고작 눈." 카일이 반복했다. "그래. 그게 내가 삼 개월 동안 배운 전부야."

그는 세라를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을 봐도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움도, 애틋함도. 텅 빈 채였다. 하지만 그는 그 텅 빔을 알아본다. 그게 지금은 오히려 무기였다.

세라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뭘 하면 돼."

"명부." 카일이 손을 내밀었다. "스물세 명의 감정 항목이 적힌 계통도. 그거 나한테 다시 넘겨. 나는 그걸로 진의 배선을 읽을 거야."

"근거는."

"5화 서열전 기억해?" 카일이 이미 명부를 받아 펼치며 말했다. "그때 서고가 나한테 형제의 위치를 알려줬어. 왼쪽 통로라고. 그런데 걔들은 오른쪽에 있었어. 예언이 정반대로 어긋났지. 나는 그때부터 서고를 못 믿었어. 매 순간 내 눈으로 다시 확인해야 했어. 안개 냄새, 발소리, 그림자 각도—전부."

그가 명부를 세라 손에 반쯤 돌려주며 계통도 위를 짚었다.

"그렇게 삼 개월. 서고가 거짓말을 할수록 나는 눈이 밝아졌어. 저 사기꾼이 나한테 준 최고의 선물은 미래가 아니라, 미래를 못 믿게 만든 거였어."

세드릭의 안개가 잠시 멈칫했다. 처음이었다.

"배선이 보여." 카일이 계통도의 붉은 선을 손끝으로 훑었다. "이름 스물세 개가 감정 종류별로 묶여 있어. 기쁨 여섯, 두려움 다섯, 애정 넷… 세드릭은 이걸 순서대로 저장고에 부어. 종류가 섞이면 안 돼. 섞이면 그릇이 흔들려."

"카일." 리안이 등 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끼어들었다. 그는 감정을 반쯤 빨린 탓에 낯빛이 잿빛이었지만 눈만은 살아 있었다. "말이 길어. 뭘 하면 이겨."

"섞으면 돼."

"뭐?"

"저 소용돌이는 종류별로 감정을 빨아들이는 관이야." 카일이 서쪽 기둥을 가리켰다. "리안, 넌 승부욕. 지금 이 순간 세드릭을 꺾고 싶어 미치겠지. 다미안, 넌 두려움. 살고 싶어 떨고 있고. 세라, 넌 신뢰. 나를 믿기로 한 걸 후회하는 중이겠지."

"후회 안 해." 세라가 쏘아붙였다.

"그럼 됐어." 카일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지만 웃음의 흔적이었다. "너희 셋이 동시에, 각자 다른 감정을 최대로 끌어올린 채 저 관 입구에 손을 대. 종류가 다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세드릭의 분류가 무너져. 백 년치 저장고가 역류해."

"우리 감정까지 빨리면?" 다미안이 떨며 물었다.

"안 빨려." 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빨리는 건 흔들리는 감정이야. 팔아넘긴 감정. 근데 너흰 지금 그걸 지키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야. 결정한 감정은 안 빨려. 나 못 믿어?"

다미안이 그를 봤다. 지난밤 스스로 계약 쪽지를 찢은 손을 폈다. "믿어."

세드릭이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검은 기둥을 다시 세우려 했지만—손이 느렸다. 반 박자. 카일은 그 반 박자를 봤다.

"저 자식이 느려졌어." 카일이 소리쳤다. "지금이야!"

세 사람이 동시에 서쪽 기둥으로 달렸다. 카일은 반대편으로 돌아 세드릭의 시야를 갈랐다. 맨손의 봉인술 기초 결—삼 주 전 금서고에서 경비진을 속인 그 손짓. 화려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쓸 수 있는 최소한의 마법. 하지만 정확했다.

"거두는 손을 묶는다." 카일이 벽화 셋째 줄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읊었다. 지하에서 해독한 봉인 문장. "'흔들리는 것을 걷어낸 자리에 완전이 온다'—그 완전을, 지금 되돌린다."

리안이 관 입구에 손을 박았다. "이겨야겠다는 마음, 안 팔아!" 승부욕이 붉게 터졌다.

다미안이 그 옆에 손을 댔다. "무서운 거, 이게 내 거야!" 두려움이 파랗게 쏟아졌다.

세라가 마지막으로 손을 얹었다. "저 사람 믿는 거—누가 뭐래도 내 결정이야." 신뢰가 하얗게 밀려들었다.

세 갈래 감정이 관 안에서 충돌했다. 세드릭의 분류가 뒤엉켰다.

"안 돼." 세드릭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높이기만 했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릴 감정이 없었으니까. "종류가 섞이면… 다시 분류하면 된다. 계산하면—"

계산이 늦었다. 그는 두려움이 없어서 서두르지 않았고, 기쁨이 없어서 승기를 반기지 않았고, 조급함이 없어서 필사적이지 않았다. 백 년치 감정을 거둬 완전해진 대가로, 그는 지금 이 순간 '지면 끝'이라는 감각 자체를 잃은 자였다.

저장고가 역류했다.

검은 기둥이 안에서부터 갈라졌다. 백 년간 갇혀 있던 학생들의 감정이—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두려움이—한꺼번에 결계장 밖으로 터져나가 관중석으로 되쏟아졌다. 잿빛으로 쓰러져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얼굴에 핏기를 되찾으며 눈을 떴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옆 사람을 끌어안았다. 되돌아온 감정이 사람들을 다시 사람으로 만들었다.

세드릭만이 그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이게… 완전이었어."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텅 빈 얼굴 위로 아무 표정도 지나가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존재. 두렵지 않고, 기쁘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

"실수했잖아." 카일이 그 앞으로 걸어갔다. 절뚝이며. "너는 지금 지고 있어. 근데 그게 무섭지가 않지? 무서웠으면 아까 반 박자 빨리 손을 세웠을 거야. 나는 무서워서 삼 개월을 떨었어. 그 떨림이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세드릭의 몸이 안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감정을 걷어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자는 서 있을 이유도 잃는다.

"너는…" 세드릭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완성된 그릇이… 아니라… 텅 빈 그릇이었군."

"나도 거기까지 갔었어." 카일이 그를 마주 봤다. "전생에. 딱 너처럼. 그래서 알아. 그건 끝이 아니라 소멸이야."

세드릭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백 년을 이어온 감정 수확 사냥터가, 설계자가 사라지자 저 혼자 주저앉았다. 결계장이 새벽빛을 되찾았다.

정적.

세라가 카일의 옆으로 왔다.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번엔 밀어내지 않았다.

"이겼어." 그녀가 말했다. "서고 안 열고."

"안 열었어." 카일이 손등의 매듭실을 봤다. 붉은 자국이 여전히 화상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지불의 영수증. "미래 안 봤어. 내 눈으로만 봤어."

"근데 너." 세라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들여다봤다. 예전처럼 거짓을 참지 못하는 눈으로. "아직 나 봐도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카일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응. 그건 안 돌아와."

"알아. 봉인해도 안 돌아온다며." 세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줬다. "근데 넌 그걸 나한테 숨기지 않았어. 이번엔. 전생엔—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안 숨겼어."

"전생 대답, 아직 안 했지." 카일이 말했다.

"지금 했잖아." 세라가 처음으로 웃었다. "숨기지 않는 거. 그게 대답이야. 나 이제 다시 물을게. 물어도 도망 안 갈 거지?"

"안 가."

관중석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이자벨라 벤저민이 무너진 결계장 사이를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카일 앞에 멈춰 서서,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입학 첫날 그를 '옛 마법사와 같은 눈'이라 지목했던, 감정을 판 자들의 말로를 아는 눈으로.

"첫날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하나." 그녀가 물었다.

"손을 내리길 바란다고 하셨죠." 카일이 답했다. "제가 그 마법사와 같은 눈을 가졌다고."

"그래. 감정을 팔아 힘을 얻은 자에게선 위화감이 난다. 곁에 서면 등골이 서늘해지지. 사람이 아니라 잘 만든 기계 옆에 선 것 같아서." 이자벨라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카일의 손등, 화상 같은 봉인 자국을 봤다. "그 위화감이—지금 네게선 안 느껴진다."

카일이 그녀를 봤다.

"넌 감정을 잃었어. 그건 사실이야. 되돌릴 수도 없고."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그 마법사는 감정을 팔아 편해지려 했고, 넌 팔지 않으려고 그 손을 스스로 못질했지. 잃은 자리에 매듭을 감고 버텼어. 그게 다르다. 넌 그 마법사와 달리, 남은 걸 지켜냈다."

세라와 리안과 다미안이 그 말을 들었다. 관중석의 학생들도.

"넌 감정을 판 가짜가 아니야." 이자벨라가 마침내 말했다. "네 실력은 네 눈과 판단으로 쌓은 거다. 아르카나 탑 이름으로 인증한다—카일 도렌시아, 이번 서열전의 정점은 너다. 서고도, 계약도, 뒷거래도 없이."

리안이 픽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졌다, 이번엔 진짜. 다음엔 안 진다."

다미안이 카일의 어깨를 짚었다. 손이 아직 떨렸지만, 그건 그의 두려움이었고 그의 것이었다.

카일은 자신의 두 손을 봤다. 텅 빈 손. 편리한 힘 대신 남긴 손. 그 손으로 이겼다. 처음으로, 대가 없이.

그는 승리의 기쁨이 밀려오길 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그 감정은 회귀 첫날 서고를 연 순간 팔려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목 안쪽 어딘가, 마지막으로 남은 감정 하나가 조용히 뜨거워졌다. 기쁨은 아니었다. 그보다 낮고 단단한 것—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는 감각. 혼자가 아니라는 것.

전생의 그는 정점에 홀로 섰다. 이번엔 옆에 세라가 있고, 리안이 앉아 있고, 다미안이 어깨를 짚었다.

"카일." 이자벨라가 돌아서려다 멈췄다.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도록.

"세드릭은 끝이 아니다."

카일의 등이 굳었다.

"그는 제3연구부의 인증관이었어. 인증관은 명령을 받는 자리지 내리는 자리가 아니야." 이자벨라가 무너진 결계장 너머, 새벽 하늘 끝을 봤다. 대륙 마법사 협회의 첨탑이 아득히 솟아 있는 방향이었다. "감정 거래를 설계하고 백 년간 사냥터를 운영한 진짜 본체는 아르카나 탑 최상층에 있다. 세드릭은 그 손끝 하나였을 뿐이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젊었을 때, 그 마법사—네게서 봤던 그 눈을 가진 자를 나는 거기서 봤으니까." 이자벨라가 카일을 돌아봤다. "그리고 하나 더. 네가 왜 열다섯으로 돌아왔는지. 누가 네 손에 그 책을 쥐여줬는지. 그 답도 전부 거기 있다."

카일의 손등에서 봉인 자국이 다시 뜨거워졌다.

누가 카일에게 미래를 읽는 책을 쥐여줬는가. 삼 개월 내내 뒤로 미뤄둔 물음이, 이제 첨탑 꼭대기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올라올 텐가." 이자벨라가 물었다. "이번엔 네 눈으로 볼 수 있겠나. 탑 꼭대기에 뭐가 있는지."

카일은 세라를 봤다. 세라가 명부를 품에서 꺼내 그의 손에 반쯤 걸쳤다. 혼자 가게 두지 않겠다는 손이었다.

"봐야죠." 카일이 첨탑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두 손을 쥐었다. "제가 왜 돌아왔는지—이번엔 내 눈으로."

새벽빛이 무너진 결계장 위로 쏟아졌다.

첨탑 꼭대기에서,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카일 도렌시아의 이름을 조용히 지워내고 있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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