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은 규정집 한 권을 통째로 읽어내기에 짧았다.
심사장 앞에서 서율은 접힌 접수증을 다시 폈다. 종이가 손끝에서 눅눅했다. 잿빛으로 굳은 왼손이 겨드랑이 안쪽에 종이의 온기를 느끼지 못했다. 하늬의 마지막 말이 아직 귀에 붙어 있었다. 셋 중 하나가 백단휘의 사람. 합의를 만드는 게 얼마나 쉬운지 이제 알겠죠.
그는 소매 안쪽을 슬쩍 눌렀다. 은빛 새 두 마리가 천 아래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듯.
심사장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흰 벽에 원형 탁자, 그 너머로 심사위원 셋이 앉아 있었다. 왼쪽 노인, 가운데 안경 쓴 여자, 그리고 오른쪽에 유난히 반듯한 정장의 사내. 그 사내가 서율을 보는 눈빛만 온도가 달랐다. 계산을 마친 눈이었다.
"한서율. 계승 심사 청원자."
가운데 여자가 서류를 넘겼다. 오른쪽 사내가 손끝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청원자 신원이 명부에서 삭제된 상태군요. 등록 이력 없음. 이 경우 계승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시작부터였다. 서율의 심장이 한 박자 튀었다. 예상했으면서도 몸이 반응했다.
"제9조에 따라 청원했습니다. 직계 혈통의 물증을 제출했습니다."
"물증이라." 사내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 "여기 첨부된 조각 파편, 소년이 우겨서 접수시킨 겁니까? 협회 감정을 통과하지 못한 물건인데."
방청석 뒤편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율은 그 웃음이 어디서 나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3화의 계단에서, 그는 조롱에 몸을 굳혔다. 지금은 굳지 않았다.
"제9조 2항. '직계 혈통 물증의 감정은 심사 절차 내에서 수행한다.' 감정 미통과가 아니라, 아직 감정 전입니다. 심사위원께서 순서를 바꿔 말씀하셨습니다."
사내의 손가락이 멈췄다.
"말꼬리를 잡는군."
"조항을 읽었을 뿐입니다."
가운데 여자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규정집을 확인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원자 말이 맞습니다. 감정은 이 자리에서 합니다."
사내—서율은 그가 백단휘의 사람이라 확신했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감정으로 갑시다. 계승 심사는 청원자가 조각 능력을 실증하는 걸로 이루어집니다. 실증 기준은 심사위원 재량. 나는 이렇게 요구하겠습니다. 달빛 없는 실내에서, 매개체 없이, 살아 있는 형상을 실체화해 보시오."
서율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매개체 없이. 파편 없이. 그건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도 이제 자기 능력의 규칙을 안다. 달이 없으면 파편이 있어야 했다. 둘 다 없으면 손끝에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사내는 그걸 알고 요구하고 있었다. 떨어뜨리려는 게 아니라,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문을 열어 놓고 들어가라 하는 거였다.
"그건—"
"거부하면 실증 불능. 실증 불능은 제9조 3항 사칭 확정 사유에 준합니다."
준합니다, 라는 말에 서율은 소매 안 새가 굳는 것을 느꼈다. 자기 심장 소리가 방 안에서 제일 컸다.
애원할 뻔했다. 조건을 바꿔 달라고, 매개체 정도는 허락해 달라고. 3일 전이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는 입을 다물고 규정집의 구조를 머릿속에 펼쳤다. 하늬가 아니라, 그 자신이 사흘 밤을 새워 외운 페이지였다.
재량. 재량이라는 단어가 걸렸다.
"심사위원 재량이라 하셨습니다." 서율이 천천히 말했다. "제9조 4항. '실증 기준은 심사위원 재량으로 정하되, 청원자의 등록 능력 범위를 초과할 수 없다.' 저는 매개체를 통한 실체화로 접수됐습니다. 접수증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매개체 없는 실증은 제 등록 범위를 초과한 요구입니다."
사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규정을 아주 잘 외웠군. 하지만—"
"게다가," 서율은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문장은 떨지 않았다. "재량으로 등록 범위를 초과하는 실증을 강요하는 건 제9조 4항 위반입니다. 저는 제9조 5항에 따라 이 요구의 무효를 요청합니다. 심사 대상자는 자신에게 적용될 조항을 열람하고, 부당한 조항 적용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가집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울었다.
가운데 여자가 규정집을 소리 나게 넘겼다. 왼쪽 노인이 처음으로 안경 너머로 서율을 봤다. 사내는 손끝으로 탁자를 다시 두드리려다 멈췄다.
"청원자가 조항을 정확히 인용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다른 결이 섞였다. "위원의 실증 요구는 4항을 초과합니다. 무효입니다."
"—잠깐."
문 옆, 벽에 기대어 있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강도현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서율은 몰랐다. 회색 코트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가 탁자 쪽으로 두 걸음 걸어 나왔다.
"참관 심사관 강도현입니다. 방금 위원의 실증 요구에 대해 절차 문제를 확인하겠습니다."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참관인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강 심사관."
"발언권은 있습니다. 제12조. 참관 심사관은 절차 위반이 발생한 경우 이를 지적할 의무를 가진다. 의무는 권한을 포함합니다." 도현의 말투는 물을 따르듯 평평했다. "위원께서 청원자에게 등록 범위를 초과한 실증을 요구했고, 이는 4항 위반입니다. 그리고 위반을 지적받고도 요구를 철회하지 않으면, 제12조 2항—고의적 절차 왜곡으로 위원에게 경고가 기록됩니다."
경고, 라는 단어에서 사내의 어깨가 뻣뻣해졌다.
"이건 참관인의 월권입니다."
"기록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도현이 벽 쪽 서기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 서기의 펜이 종이를 긁고 있었다. "위원 발언, 청원자 이의, 이의 인용. 순서대로 남습니다. 위원께서 원하시면 이 순서를 협회 감사부에 그대로 제출하지요."
가운데 여자가 규정집을 덮었다.
"경고 기록. 위원 세 명 중 한 명에게 절차 위반 경고 1회. 실증 요구는 등록 범위 내로 재조정합니다. 매개체 사용을 허용합니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여유가 사라진 자리에, 이를 악문 침묵만 남았다. 그를 떨어뜨리려 놓은 함정에, 그가 발을 헛디딘 것이다.
서율은 숨을 뱉었다. 손등의 잿빛이 여전히 저릿했지만, 이번엔 굳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저렸다.
도현이 서율 옆으로 왔다. 방청석에 등을 진 채, 낮게.
"조항 순서를 바꿔서 되받았지. 나쁘지 않아." 그가 서율의 잿빛 손등을 힐끗 봤다. "규정집은 무기가 아니라 지도다. 저들은 조항을 하나씩 던지지. 넌 조항들이 어떻게 서로를 잡아먹는지를 봐야 해. 4항이 5항을 부르고, 5항이 12항을 부른다. 조항 하나로 이기는 게 아니야. 사슬로 이기는 거지."
"왜 저를 돕습니까." 서율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명부에서 지워진 사람에게 예외 조항을 열어 준 것도, 제 석화를 아는 것도."
도현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대답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네 아버지가 규정집을 이렇게 읽었다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 문장이 서율의 가슴을 관통했다. 되묻기도 전에 도현은 물러섰다.
"실증을 해라. 지금 이겨 놓은 걸 지켜."
서율은 탁자 앞으로 나섰다. 접수해 둔 석고 덩이가 대리석 받침 위에 놓였다. 그는 오른손을 얹고, 소매 안 파편을 꺼내 석고에 밀착시켰다.
달이 없었다. 창밖은 대낮이었다. 파편이 손끝에서 데워지고, 서늘한 은빛 실 같은 것이 손목을 타고 흘렀다. 3화의 사자를 봉인하던 그 감각. 다만 이번엔 더 정교해야 했다. 심사위원 앞에서, 형상을 뚜렷이 세워야 했다.
석고가 떨렸다. 표면이 은빛으로 물들며 깃털의 결이 돋아났다. 부리, 발톱, 접혔던 날개가 펼쳐지고—작은 은빛 매 한 마리가 받침 위로 날아올라 방을 한 바퀴 돌았다. 형상이 살아 움직였다. 방청석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그 순간, 서율의 왼팔에 통증이 없는 통증이 번졌다. 감각이 없는 자리가 더 조여드는 이상한 압박. 그는 이를 악물고 팔을 봤다.
손등의 잿빛 반점이 유리처럼 번들거리며 넓어지고 있었다. 굳음이 손목을 넘어 팔목 안쪽으로 기어 올라왔다. 소맷단 아래, 손목 접히는 자리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아버지의 손목이 하얗게 굳어 있던 그 자리였다.
매가 받침으로 돌아와 앉았다. 형상이 완성됐다. 실증 성공이었다.
가운데 여자가 규정집을 덮으며 도장을 들었다.
"실증 확인. 매개체를 통한 살아 있는 형상의 실체화. 계승 심사 1차 통과."
붉은 도장이 서류에 찍혔다.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이번엔 조롱이 아니었다. 서율은 그 소리의 결이 달라진 것을 등으로 느꼈다.
인정. 처음으로, 세계가 그를 조금 인정했다. 규칙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규칙을 끝까지 읽어내서.
그러나 서율의 눈은 자기 팔목에 붙어 있었다. 잿빛이 팔목을 완전히 감쌌다. 매 한 마리를 세운 대가가 손등에서 팔목으로 넘어왔다. 이 진행 속도라면—그는 계산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버지가 몇 번의 조각 끝에 심장까지 굳었는지, 그 숫자를 세지 않으려 했다.
도현이 그의 팔목을 스쳐 보고 낮게 말했다.
"손목을 넘었군."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 비슷한 것이 지나갔다. "다음부턴 형상을 완성하기 전에 멈추는 법도 배워야 해. 완성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완성하지 않으면 실증이 안 됩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가 죽었다." 도현이 말했다.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서율은 그 말을 받아 삼켰다. 팔목의 잿빛이 저릿하게 당겼다.
심사장을 나서는 문 앞에서 서기가 그를 불렀다.
"한서율 청원자. 방금 전달된 겁니다."
서기가 은색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무겁고 매끈한 종이. 봉인 자리에 검은 밀랍이 눌려 있었다. 서율이 받아 든 순간, 소매 안 새 두 마리가 동시에 굳었다. 파편이 품 안에서 서늘하게 식었다.
봉투를 뒤집었다. 보낸 이의 이름이 은박으로 눌려 있었다.
백단휘.
방금 그를 떨어뜨리려던 심사위원이 백단휘의 사람이었다. 그 함정을 넘어서자마자, 함정의 주인이 직접 서율을 불렀다.
봉투 안 카드는 한 문장이었다. 정중한 필체가 도리어 목을 조였다.
『승리를 축하하며, 한서율 군. 자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나를 찾아오게. 미완의 일을 마저 끝내야 하지 않겠나.』
미완. 서율의 손끝이 카드 위에서 멎었다. 3년 전 아버지 장례식 방명록에 눌려 있던 그 단어가, 지금 백단휘의 손에서 다시 그에게 건너왔다.
서율은 도현을 돌아봤다. 도현의 얼굴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가지 마라." 도현이 말했다. 처음으로, 규정집 밖의 목소리였다.